“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사이트에 쓰여있는 명승 제35호 성락원 설명자료이다.
성락원 영벽지 바위에 새겨진 글씨. 지금까지는 ‘장빙가(檣氷家)’로 읽어 ‘고드름이 열린 집’이라는 의미로 통용됐다. 그러나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빙’자는 ‘외(外)’자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연구원은 후한시대의 이른바 팔분법에 따라 표기된 용례를 들어 ‘장외가’는 ‘아름답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성락원은 1992년 당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국가문화재로 지정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최근 심상응의 별장이 아닌 고종의 호위내관 황윤명(1848~?)의 별서라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곳이다. 그런데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은 틀린 내용 그대로 두었다. 물론 “성락원과 관련된 인물 등 주요 연혁에 대한 역사적 사실여부를 조사연구중이며, 그 결과에 따라 내용이 수정될 수 있다”고 덧붙여놓았다. 연구결과가 정리되고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가 제조정된 이후 공식적으로 설명자료를 바꾸거나 삭제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조사 및 연구결과만 봐도 사실관계에 부합되지 않거나 논란이 많은 부분은 고치거나 삭제해야 할 필요성은 제기된다. 무엇보다 국가기관(문화재청)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외(外)자는 후한시대 자료인 ‘무위의례’ 죽간에서도 특이한 형태로 쓰였다. 청나라 금석학자와 서예가들인 하소기와 완원 등도 팔분법에 따른 외(外)자를 썼다. |‘손환일의 <예서집성>, 서예문인화, 2007년’에서
■바위글씨는 추사의 작품인가
지금까지의 조사·연구결과 성락원 조성자와 조성시기는 ‘내관 황윤명’과 ‘1884년(갑신정변) 이전’으로 사실상 굳어진 듯 하다. 하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바로 영벽지 바위에 새겨진 글씨의 주인공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은 여전히 ‘서쪽 암벽에 새겨진 글씨=추사 김정희’의 작품이며, 글씨도 ‘장빙가(檣氷家)’라 못박고 있다. 물론 여전히 이 ‘바위글씨의 주인공=추사’로 판단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직획 위주의 고예(古隸·전한 시기의 서체) 스타일 글자구조로 바위에 새겨진 추사체”라는 견해이다. 게다가 글씨 옆에 ‘완당(玩堂)’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또다른 호가 새겨져 있다. 그러니 글씨 주인공이 ‘김정희’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녀왔다. 그러나 ‘유배(1840년) 이전 글씨일 수는 있지만 전형적인 추사체가 아니’라는 ‘유보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전문가도 있다. 바위글씨를 둘러본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완당이 새겨진 쪽과 ‘장빙가’ 글씨 쪽이 확연히 달랐다”면서 “이는 서로 다른 시기에 ‘장빙가’ 글씨와 ‘완당’ 글씨를 썼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추사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최근들어 이 바위글씨를 검토한 손환일 대전대 서화연구소책임연구원은 “우선 석 자의 글씨는 추사체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장빙가’가 아닌 ‘장외가(檣外家)’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손연구원은 우선 이 석 자의 글씨는 전한(기원전 202~기원후 8) 시대의 전형적인 예서(고예)에서 나름의 서법을 창출한 추사체가 아니라는데 주목했다. 손 연구원에 따르면 전한시대에 유행한 예서는 쉽게 말해 깎두기 글씨로 표현되는 ‘고딕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성락원 내 영벽지 바위글씨는 후한(기원후 25~220)시대에 고안된 이른바 팔분법(八分法)이라는 것이다. ‘팔분법’은 ‘일자일파(一字一波)’라 해서 글자의 끝에 기러기 꼬리(안미·雁尾)와 같은 파책, 즉 삐침획을 주는 서체를 뜻한다. 손환일 연구원은 “추사체에는 이런 ‘팔분법’에 따른 안미법을 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바위 글씨 석 자 중 글자 끝을 오른쪽으로 휙하니 뻗어쓴 가운데 글자(손환일 연구원이 外자로 읽는 글자)의 서체가 바로 후한시대에 유행한 안미법이라는 것이다.
‘외’자의 다양한 용례. 특히 후한시대의 자료인 ‘사신후비’와 ‘서협송’의 ‘외’자는 성락원 영벽지 바위글씨의 ‘외’자와 흡사하다. |‘손환일의 <예서집성>, 서예문인화, 2007’에서
■“빙(氷)자가 아닌 외(外)자다”
손 연구원은 또한 “지금까지 ‘빙(氷)’으로 통용되어 국가문화유산 포털에서 ‘장빙가(檣氷家)’로 표기된 바위글씨도 ‘장외가(檣外家)’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통용된 ‘장빙’은 사전에는 없지만 ‘돛대(檣)처럼 긴 얼음(氷)’이라는 뜻의 ‘고드름’ 조어로 알려져 왔다. 그러니 ‘장빙가’는 ‘고드름이 달린 집’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손환일 연구원은 이따끔 “나무 목(木)변과 흙 토(土)변이 혼용되어 ‘장(檣)’자와 ‘장(墻)’자가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밝혔다. 명리학 ‘여명론’에서도 장외도화(墻外桃花)가 장외도화(檣外桃花)로 쓰였고, “퇴계선생이 서울에 거주할 때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몇개 넘어와…손수 주워 담장 밖으로 던졌다”는 기록(<선조수정실록> <석담일기>)도 출전에 따라 담장을 뜻하는 장(墻)자와 장(檣)자가 혼용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연구원은 “중국에서 ‘담장밖’을 의미하는 ‘장외(墻外)’는 ‘좋고 아름답지만, 그러나 남들은 모르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반면 ‘담장 안’을 의미하는 ‘장내(墻內)’는 ‘아름답지만 널리 알려진 곳’이란다. 따라서 “성락원 내 영벽지의 바위글씨(‘장외가·檣外家’)는 ‘아름답고 빼어나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다”는 것이다. 고종의 호위내관 황윤명의 별서로 확인된 지금의 성락원 일대는 중국 당나라 시인·화가인 왕유(699~759)의 ‘망천별업’에 비유될 정도로 빼어난 풍치를 자랑했다. 황윤명 역시 자신의 문집(<춘파유고>)에서 “복사꽃이 만발한 성북동(북저동)의 그윽한 경치(北渚幽景)”라 표현한 바 있다.
■외(外)자의 다양한 서법
손환일 연구원은 삐침획이 확연한 후한 스타일의 ‘외(外)’, 즉 ‘夕+Κ’형태의 글자 용례를 찾았다. 즉 후한시대 무도(武都)의 태수가 서협의 각도(閣道)를 수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너럭바위에 새겨 넣은 ‘서협송’, 역시 후한시대인 기원후 168년 사신(史晨)이라는 인물이 산동성 공자묘에 새긴 비석인 ‘사신후비’ 등에 등장하는 ‘외’자가 영벽지 바위글씨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또 감숙성 무위(武威)의 무덤에서 출토된 ‘의례 죽간’, 즉 ‘무위의례’ 죽간에도 비슷한 글자가 보인다고 했다. 손 연구원은 “이런 형태의 외(外)자는 후한의 ‘팔분법’이 크게 유행한 18~19세기 청나라 서예가이자 금석학자들 글씨에도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즉 청말 금석학자 혹은 서예가, 학자인 하소기(1799~1873)와 완원(1764~1849), 고애길 등의 글씨에도 비슷한 형태가 보인다.
성락원 일대에 새겨진 바위글씨들. 모두 6기의 바위글씨가 있지만 모두 동시대 것이 아니라 정원 조성 이전부터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새겨진 글씨들이다.|문화재청 제공
■‘추사 코스프레’ 한 인물은 누구?
그러나 손환일 연구원은 “‘장외가’ 옆에 새겨진 ‘완당’은 김정희의 글씨가 맞다”고 보았다. 추사는 6~7세기 당나라에서 유행한 구양순(557~641)의 이른바 ‘구양순체’로 해서와 행서를 썼는데, ‘완당’ 글씨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손환일 연구원은 “행서인 이 ‘완당’자는 갸름한 결구와 필획이 특징인 추사체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누군가 ‘장외가’ 글씨를 써놓고 그 옆에 추사의 글씨를 집자(集字·문헌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음)해서 새겨넣었다”는 것이다. 손 연구원은 “필시 추사를 추종하는 인물은 아닐 것”이라고 단정했다. 추사를 따르는 인물이 그렇게 자기 글씨를 추사의 글씨인양 ‘완당’을 새겨넣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좋게 말하면 ‘추사 코스프레’한 것이라 봐도 좋을 듯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사 코스프레’를 한 인물은 누구일까.
박철상 소장에 따르면 성락원 안에는 모두 6기의 바위글씨가 있지만 동시대 것이 아니라 정원 조성 이전부터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새겨진 글씨들이다. 그 중 하나인 ‘장외가’ 글씨도 언제, 누가 새긴 것인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성락원의 조성자가 내시 황윤명이라면 그 황윤명이 자기가 조성한 별서에 ‘장외가’ 글씨를 새긴 뒤 ‘추사 코스프레’하는 차원에서 ‘완당’ 글자를 집자해서 새겨놓은 것은 아닐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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