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

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별건곤>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 실린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 관련 일화이다.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팔자 고친 경성시내 육대문 신세타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한문이야말로 여러 대궐문 중에서 제일 나이 어리고 팔자 사나온 문”이라고 지칭하면서 이름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꾼 이력을 소개했다.

1906년 이전에는 덕수궁의 정문 이름이 ‘대안문’이었다. 그러다 그해 이름이 대한으로 바뀌었다. 1906년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꾸고 수리한 뒤 그 내역을 기록한 <경운궁중건도감의궤> 중 ‘대한문상량문’을 보면 ‘대한(大漢)’이라는 이름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을 갖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기사에 등장하는 배정자(1870~1952)가 누구인가. 일본명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로 알려진 매국노다.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양녀가 되어 사다코로 개명한 뒤 철저한 스파이 교육을 받고 귀국해서 밀정이 되었다. 

그래서 ‘요화(妖花)’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토에게서 수영, 승마, 사격, 국제예절, 변장술을 배운 배정자는 지성미와 멋을 갖춘 여인으로 둔갑해 고종을 홀렸고, 조선 최고의 기밀을 빼낸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 8월18일 경향신문은 서울시가 태평로를 넓히면서 대한문의 위치를 뒤로 물릴 계획이라는 기사를 썼다. 이 사진은 대한문이 후퇴이전 하기 전의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배정자는 이후에도 만주와 중국을 오가며 스파이로 암약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1941년 12월) 70노구의 몸으로 조선인 여성 100여명을 ‘군인 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에까지 끌고가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하도록 강요했다. 

<별건곤>은 “모자를 쓰고 궁궐을 드나들던 배정자가 재수없다고 해서 ‘갓을 쓴 여인’을 가리키는 안(安)자를 한(漢)자로 바꾸었다”고 했다.

또 다른 설이 있다. 대중잡지인 <삼천리> 제3권 제10호(1931년 10월1일)는 ‘옛 궁궐의 애사(舊宮哀詞)’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가을의 덕수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1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대한문. 월대가 확연히 보인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대궐의 정문은 처음에 돈례문(敦禮門)이라 했다가 뒤에 대안문(大安門)으로 고쳤다. 그러다 ‘안(安)’자가 된 것이 ‘관(冠) 머리’ 아래 ‘여(女)’자를 쓴 것이니 이것은 여자가 남자와 같은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인즉 매우 재미없는 것이라 해서 남성의 글자인 한(漢)자로 바꾸어 대한문이라 했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배정자와의 연관성은 쏙 빼고 ‘갓 관(冠) 밑의 여(女)’자인 ‘안(安)’은 남녀평등을 뜻하는, 매우 재미없는 글자이니 ‘남성의 글자’(사나이)인 ‘한(漢)’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설이 맞다면 ‘대한문’은 정말 시대착오적인 개명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만 하다. 이외에도 일제가 ‘큰(大) 도적놈(漢)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는 설도 나왔다. 한(漢)자는 ‘사나이’라는 뜻과 함께 ‘놈’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이밖에 ‘한(漢)’은 중국(한나라)을 의미하는 글자이니 한(韓)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제기됐다.  

현재의 대한문. 월대는 사라졌고 문도 뒤로 33미터나 후퇴했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사무소 제공

그렇다면 무엇이 정설일까. 역사기록은 단촐한 편이다. “대안문 현판을 쓰는 관리로 의정부 참정 민병석을 임명”(황성신문 1898년 2월15일)한 뒤 “정문에 대안문이라 쓴 현판을 달았고, 그 문 앞 축대 공사도 시작됐다”(독립신문 1899년 3월3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고종실록> 1906년(광무 10년) 양 4월 25일조는 “경운궁(덕수궁)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친다”고 했다. 

‘크게(大) 편안하다(安)’는 대안문의 이름을 왜 바꾸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2007년 문화재청은 궁궐의 현판을 일제조사하면서 그 유래를 밝혀냈다. 즉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친 과정을 기록한 <경운궁중건도감의궤> 중 ‘대한문상량문’을 찾았다.(문화재청의 <궁궐의 현판과 주련> 3-덕수궁·경희궁·종묘·칠궁>, 2007에서)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해질 것이고 한양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했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 대한이라는 정문을 세우니…. 단청을 정승스레 칠하고 소한(宵漢·하늘)과 운한(雲漢·은하)의 뜻을 취했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되도다.”

19세기말 조선과 중국 만주를 오가며 일제의 밀정 노릇을 했던 배정자.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 된 배정자는 고종을 홀려 최고급 비밀을 빼간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후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사진은 1966년 개봉된  영화 ‘요화 배정자’.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마디로 줄이면 ‘대한(大漢)’이라는 이름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으로 썼다는 것이다.그러니 ‘양장 입고 모자(갓) 쓴 배정자 때문’이라느니 ‘남녀 평등을 의미하는 안(安)자 대신 남성적인 글자(漢)를 썼다’느니 하는 여러 설은 공식적으로는 사실무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크게 편안하다’는 의미의 ‘대안문’ 이름을 굳이 ‘대한문’으로 고친 결정적인 이유는 상량문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배정자 때문이든, 남녀평등 때문이든 ‘대안’이라는 이름이 뭔가 느낌이 좋지않아 바꾼 것은 분명하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최근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덕수궁 대한문의 월대(月臺)의 복원 설계 사업을 착수했다고 밝혔다. 월대는 궁궐의 정전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이다. 

궁궐의 정문이나 덕수궁 중화문 및 경복궁 근정전 등 주요 정전에 설치해서 건물의 위엄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대한문 앞 월대는 “대안문 앞 축대 공사도 시작됐다”(독립신문 1899년 3월3일)는 기록이 보듯 1899년 축조됐다. 박상규 덕수궁사업소 연구사는 “월대는 궁궐 정문 구성의 필수요건”이라면서 “월대 복원 사업은 대한제국 황궁의 정문인 대한문의 면모를 되찾는데 있다”고 전했다. 

1968년 2월1일 동아일보. 대한문의 33m 후퇴이전 소식에 '문화재를 깔고 태평로를 넓히려는 것이냐'는 전문가들의 항변을 실었다.  

하지만 월대는 대한제국 당시의 그 자리 그대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자체가 본래의 위치에 서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문은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한다는 이유로 원래 위치에서 33m 가량 뒤로 후퇴 이전됐다. 문화재 전문가들이 ‘구한말 역사의 상징’이라며 반발했지만 “태평로를 넓히면 교통에 방해가 된다”면서 후퇴 이전이 결정됐다. 

하기야 9년 후인 1979년 고가도로 설치에 방해가 된다면서 독립문 마저 이전했다. 1970년대는 다른 이유도 아닌 교통소통 때문에 문화유산을 마구잡이로 이리저리 옮긴 시대였다. 그런 뜻에서 문화재청의 월대복원은 사실상 ‘원위치 복원’이 아닌 셈이다. 김동영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장은 “대한문의 위치를 원 위치로 옮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월대 역시 지금의 위치에서 복원하기로 했다”면서 “그러나 철저한 원형고증으로 현실적인 재현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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