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1377년(우왕 3년)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상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무엇일까. <고금상정예문> 혹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 2건으로 알려졌다. <고금상정예문>의 경우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본으로 찍었다”는 이규보(1168~1241)의 언급(<동국이상국집>)만 남아있다. ‘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 붙어있는 무신정권 실력자 최이(?~1249)의 발문. “기술자들을 모집해서 기해년(1239년) 주자본(금속활자본)을 거듭 인쇄한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목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최근 “속활자본으로 거듭 인쇄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깨달음의 뜻을 밝힌다(證道)’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하 남명증도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원전은 선가의 수행지침서인 <영가진각대사증도가>이다. 이 책은 진각대사 현각(665~713)이 선종의 6조 대사 혜능(638~713)을 배알한 뒤 크게 깨달은 경지를 칠언시로 읊은 것이다.
<남명증도가>는 송나라 남명대사 법천(?~1001)이 <영가진각대사증도가>의 각 구절마다 게송을 붙여 깨달음의 진면목을 설파한 책이다. 국내에 현전하는 <남명증도가>는 10여 종에 이른다. 책에는 “<남명증도가>가 널리 유통되지 않자 기해년(1239년) 주자본(금속활자본)을 ‘중조(重彫)’했다”는 무신정권의 실력자 진양공 최이(?~1249)의 발문이 붙어있다. 그러나 확실한 연도(1239년)가 기록된 이 책들은 목판본으로 알려져왔다. 발문의 ‘중조주자본(重彫鑄字本)’ 구절을 ‘금속활자본을 모본으로 해서 다시 목판으로 판각한다’는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공인본’ 중 맨 왼쪽과 세번째 한 일( 一)자는 조판 때 뒤집힌 글자이다. 훗날 목판본(삼성본)으로 재인쇄할 때 용케 바꿔놓은 ‘한 일(一)’자도 있지만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둔 것(네번째)도 있다.
■‘보물 758-2호’로 지정된 이유
그런데 여기서 반전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만약 문헌상으로만 남아있다는 가장 오래된, 그것도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지금 이 순간 국내에 남아있고, 무엇보다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다 알려진 책이라면 어떨까. 바로 2012년 보물(제758-2호)로 지정된 ‘공인출판사 소장 <남명증도가>’(이하 공인본)이다.
‘공인본’은 ‘삼성본’과 동일본이라 해서 보물로 지정됐지만 ‘공인본’과 ‘삼성본’은 확연히 글자가 다르다. 금(金)자의 경우 윗부분이 ‘人’이지만 삼성본에서는 ‘入’이다. ‘개(豈)’ 자 역시 완전히 다르다.
불교서지학자인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가 최근 펴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김영사간)가 바로 그러한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 책, 즉 ‘공인본’의 소장자는 공인박물관(경남 양산)을 운영했던 원진 스님이다. 스님은 2012년 ‘공인본은 1239년 최이 주도로 인쇄한 금속활자본이니 국가문화재로 지정해달라’ 신청했다. 그러나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금속활자본’이 아니라 ‘목판본’으로 인정해서 보물로 지정했다. 그것도 32년 전인 1984년 보물로 지정된 목판본 ‘삼성출판사 소장’ <남명증도가>(이하 삼성본)와 동일본이며, 그 ‘삼성본’보다 늦게 찍어낸 것으로 판단했다. ‘공인본’은 ‘삼성본’보다 늦게 찍어낸 후쇄본이라는 점에서 ‘-’를 붙여 ‘삼성본’(원래 758호)은 758-1호로, ‘공인본’은 758-2호로 교통정리했다.
이중으로 인쇄된 흔적. 조판된 활자가 움직인 경우, 종이가 말린 경우, 종이 놓인 위치가 바르지 않아 바로잡는 과정에서 이중 인출됐다
■“집착을 고쳐줄 요량으로”
하지만 아무리 보물의 가치가 충분하다한들 목판본을 금속활자본와 견줄 수 없다. 여기에 ‘공인본’은 이미 보물로 지정된 ‘삼성본의 아류’라는 판정을 받아 ‘-2호’의 대접을 받았으니, ‘공인본=금속활자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던 소장자(원진 스님)로서는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경북 안동의 원 소장자에게서 ‘공인본’ <남명증도가>를 구입한 원진 스님과 최근 통화했더니 “언젠가부터 이 책이 금속활자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운을 뗐다. 책 속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지 않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흔적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공인본=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한 자료를 갖고 나름 백방으로 뛰었지만 싸늘한 반응들이었습니다. 학계로부터 ‘삼성본과 동일한 목판본인데 헛수고하지 말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죠.”
금속활자본은 주물이기 때문에 점과 필획의 완성도가 떨어져 글자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공인본’을 보면 이런 부분을 가필해서 보사한 경우가 있다.
‘목판본’ 자격으로 보물지정 직후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스님은 박상국 교수에게 “문화재위원회가 잘못 판단했으니 재감정 좀 해달라”고 의뢰했다. 박 교수 역시 처음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금속활자본임을 고집하는 스님의 집착증을 제발 이참에 말끔히 고쳐줄 요량’으로 <남명증도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비판적 검토였다. 그런데 책을 한 장 한 장 들춰보던 박상국 교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볼수록 이 책(공인본)에는 금속활자본이 아니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특징들이 보였습니다. 너덜이(쇠찌꺼기)와 글자 획의 탈락 등 초창기 금속활자 주조기술의 미숙으로 생긴 흉허물이었습니다. 또 목판본인 ‘삼성본’에 나타나는 목결(나무테 흔적)이 ‘공인본’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물 기술의 부족으로 흭이 탈락한 부분을 인위적으로 칠했다.
■90년의 오류
박교수는 책에 등장하는 최이의 발문 중 ‘중조주자본(於是募工 重彫鑄字本)’ 구절을 다시 유심히 들춰보았다. 그 해(2014년) 10월 한학자인 구봉 이정섭 선생에게 불쑥 최이의 발문을 보여주며 해석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정섭 선생은 한치의 주저없이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다시 주조한다’고 해석했다.
이럴 수가…. 이 구절은 90년 가까이 ‘주자본(금속활자본)을 목판본으로 다시 새겨…’고 추호의 의심없이 해석되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삼성본’(1984년)은 물론이고 ‘공인본’(2012년)까지 목판본이라는 이유로 보물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90년의 오독’이었다니….
다른 한문 전공자들은 물론이고 중국학자인 쑨잉강(孫英剛) 저장대(浙江大) 교수(역사학)에게도 문의했더니 절대 다수의 해석이 한학자 이정섭 선생과 비슷했다. 중국의 쑨잉강 교수는 “발문에 목판본이라는 언급이 없으니 ‘다시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는 의견을 보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남명증도가>에 붙은 최이의 발문은 ‘목판본으로 다시 새겨’로 해석해왔을까. 박상국 교수는 ‘선입견의 오류’라 했다. 즉 <남명증도가>는 1931년 경성제대 도서관 주최 ‘조선활자인쇄자료전’과 1954년 서울대·연희대 전시회에 잇달아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전시회에 소개된 <남명증도가>는 모두 목판본이었다. 그런 판이니 최이의 발문을 ‘목판본의 발문’으로 철석같이 믿게 됐다는 것이다.
■공인본과 삼성본은 동일본이 아니다.
최이의 발문을 ‘거듭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인쇄했다’고 해석하자 수수께끼가 풀렸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도 2017년 ‘남명천화장승증도가(공인본)에 나타난 금속활자본의 특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박상국 교수의 연구성과를 뒷받침했다. 손환일 소장은 “최이 발문에 등장하는 ‘조주(彫鑄)’는 ‘금속활자의 주조’ 의미”라면서 목판본의 경우 <고려사> 등의 사서를 보면 ‘조판(彫板)’이라는 용어를 썼다“고 밝혔다.
공인본에는 쇠찌꺼기 등으로 판독하기 어려운 활자들이 많이 생겨 가필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가필이 잘못된 경우가 있었다. 후쇄본인 목판본 ‘삼성본’에서는 그것을 ‘진(盡·왼쪽에서 두번째)과 수(首·네번째)로 고쳤다.
박상국 교수는 이 ‘공인본’이 ‘삼성본’과 동일본이라면서 ‘보물 758-1호’(삼성본)와 ‘보물 758-2호’(공인본)로 나란히 붙인 것이 명백한 잘못이라 했다. 특히 얼핏 보면 동일한 판본으로 보이는 글자도 확대해서 보면 각각 다른 판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금(金)’자의 경우 ‘공인본’(人)과 ‘삼성본’(入)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또 ‘개(豈)’와 ‘망(忘)’, ‘부(剖)’, ‘유(有)’, ‘대(大)’자 등을 비교해봐도 전혀 다르다. 또한 책 장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선’이 사라진 부분의 위치와 크기도 분명히 다르다. ‘공인본’과 ‘삼성본’은 완전히 다른 판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조과정에서 활자가 탈락되면 인위적으로 가필하기도 했는데, 틀리게 가필한 경우도 많았다. 바르게 가필했다면 왼쪽 위부터 향(鄕), 선(船), 무(舞), 봉(鳳)자였다.
■활판인쇄의 단점
양질의 나무에 잘 다듬은 글자들을 새겨 완성되는 목판 인쇄에서는 이런 금속활자본의 특징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금속활자로 찍는 활판인쇄는 어떤가.
비근한 예로 활자가 조판된 상자 위에 먹을 묻혀 책을 찍어내는 과정을 생각해보라. 사람이 한 글자 한 글자씩 조판하기 때문에 심어놓은 활자의 높낮이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아래나 위로 쏠릴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먹을 묻히고 그 위에 종이를 덮은 뒤 누르면(인쇄하면) 어떻게 될까. 인쇄된 글자들의 깊이가 달라지고, 색의 짙고 옅음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사람이 수작업으로 하다보니 먹 묻힘이나, 누르는 힘(인쇄)이 일정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역시 인쇄상태가 고르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금속활자 발명 초창기였다면 더욱 그 흠결이 도드라졌을 것이다.
주조기술의 부족으로 너덜이(쇳물찌꺼기)가 그대로 나타난 ‘공인본’(왼쪽)의 활자들. 그러나 나중에 나무판에 새긴 목판본 ‘삼성본’(오른쪽)에는 보이지 않는다.
■흠결 많은 금속활자본
박상국 교수는 “‘공인본’ <남명증도가>에서 바로 이러한 초창기 금속활자본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밝힌다. 금속활자 제작의 기술 부족으로 생긴 너덜이(쇠찌꺼기)·끊어짐·테두리 자국 필획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조판 때 회전된 오·탈자와 이중으로 인쇄되거나 인쇄 때 기울어진 글자 등이 나타났다.
‘조판 때 회전된 글자’로는 ‘한 일(一)’가 대표적이다. ‘공인본’에서 제법 보이는 ‘뒤집힌 일(一)’자 중 ‘삼성본’을 찍을 때 바로 잡은 것도 있지만 그대로 둔 것도 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글자들을 심어놓은 금속활자판에 먹솔로 먹을 칠한 뒤 종이를 얹고 문지르는 과정에서 이중으로 인쇄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였다.
틈이 생겨 활자가 움직였거나 종이가 말렸거나 종이 위치가 바르지 않아 바로잡는 과정에서 이중으로 인쇄되는 경우 등이 있다. ‘계(界)’나 ‘불(不)’, ‘비(比)’, ‘순(徇)’, ‘인(人)’, ‘안(岸)’ 등이다.
또한 인쇄 때 기운 글자도 여럿 보인다. 원래 활판 조판 때는 수평을 잡고 잘 움직이지 않도록 나무 수평대를 대고 나무망치로 톡톡 두드려 고정시킨다. 하지만 목판처럼 완전하게 수평을 잡기는 어렵다.
때로는 윗부분이 높고 아랫부분이 낮게 심어진 활자들은 윗부분은 진하게, 아랫부분은 흐리게 인쇄된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도 있다. 또 한쪽 옆부분이 다른 면보다 높게 심어진 활자들이 있을 경우 ‘왼쪽은 짙게 오른쪽은 흐리게’나 ‘오른쪽은 짙게, 왼쪽은 흐리게’의 형태로 인쇄될 수 있다.
‘위는 짙게 아래는 흐리게’의 경우는 ‘관(觀)’, ‘구(究)’, ‘근(近)’, ‘기(幾)’, ‘기(棄)’ 등이다. 거꾸로 ‘아래가 짙고 위는 흐리게’는 ‘거(去)’, ‘견(見)’, ‘계(界)’, ‘권(卷)’, ‘근(勤)’등이 있다. ‘오른쪽은 짙게 왼쪽은 흐리게’는 ‘각(却)’, ‘견(見)’, ‘관(觀)’ ‘귀(歸)’, ‘망(妄)’ 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금속활자본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공인본’만의 특징이었다.
‘공인본’에서 윗쪽은 진하고 아랫쪽은 흐리게 보이는 등 활자의 기울기에 따라 인쇄상태가 다를 수 있다. 목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아차! 실수…가필의 흔적
또한 ‘공인본’에는 인위적인 가필의 흔적이 역력하다. 금속활자는 주물(주형 속에 용해된 금속을 넣어 응고시켜 형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점과 필획의 완성도가 떨어져 글자의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이런 글자가 나오면 원고의 최종 교정 차원에서 가필 했다. ‘공인본’에서 가필 글자의 예는 ‘위(爲)’, ‘차(嗟)’, ‘환(幻)’, ‘구(句)’, ‘대(大)’ 등이 있다. 가필이 잘못된 글자도 보인다. ‘공인본’에서 ‘진(盡)’자가 판독하기 어렵게 되자 인위적으로 가필했지만 ‘상(桑)’자로 잘못 써넣었다. 이를 훗날 목판본으로 인쇄한 ‘삼성본’에서 ‘진(盡)’자로 바로 잡았다. 또 무(舞)자를 알아 볼 수 없게 되자 기술자가 가필했지만 그만 파(波)자로 잘못 써넣었다. 이를 훗날 목각본으로 새긴 ‘삼성본’에서는 무(舞)자로 고쳐넣었다.
반대로 윗부분이 흐리고 아랫부분은 진한 경우. 활자가 일정하게 놓이지 않아 인쇄상태에 영향을 미쳤다.
■너덜이는 금속활자의 특징
또 ‘공인본’에서논 금속활자의 주조과정에서 달라붙어 생기는 너덜이(쇳물찌꺼기)의 흔적이 여럿 보인다.
이러한 흠결 때문에 ‘공인본’이 ‘삼성본’ 보다 후대에 인쇄된 것으로 판단되는 오류가 생겼다는 게 박교수의 견해이다. 보물지정 때 문화재위원회가 여러번 찍어 낡게 된 ‘삼성본’ 목판을 토대로 ‘공인본’을 찍었으니 인쇄상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덜이와 같은 흠결은 오히려 초창기 금속활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게 박교수의 이야기다.
왼쪽이 흐리고 오른쪽이 진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찌꺼기가 잔뜩 묻은 ‘공인본’의 ‘불(불)’자는 ‘삼성본’에서 말끔하게 다듬어졌다. ‘래(來)’와 ‘좌(坐)’, ‘종(終)’, ‘주(住)’, ‘중(中)’, ‘체(體)’ 등 금속활자본인 ‘공인본’에서는 보였던 너덜이가 목판본인 ‘삼성본’에서는 깔끔하게 정리됐다.
박상국 교수는 “이런 모든 요소들이 아직 제작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초기 금속활자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공인본’의 부족한 부분은 목판본인 ‘삼성본’을 인쇄할 때 대폭 보완됐다. 손환일 소장은 “‘공인본’을 모본으로 목판본을 만들 때 조각수가 잘못되었거나 빠지고 뒤틀린 글자나 필획을 고쳐 새겨넣었다”고 전했다.
공인본(A)과 삼성본(B)이 동일본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확연히 다르다. 미(眉)자 부분을 보면 공인본(A)과 삼성본(B)의 글자와 테두리의 높이가 다르다
■시험인쇄에 성공한 금속활자
박상국 교수는 따라서 그동안 ‘삼성본’과 동일한 목판본으로 여겨져 보물로 지정된 ‘공인본’은 1239년 제작·인쇄된 분명한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공인본’ <남명증도가>는 직지심체요절보다 정확히 138년 앞선,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는 왜 금속활자의 발명국이 되었을까.
고려인들은 거란이 침입하자(993년)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1011년(현종 2년)~1087년(선종 4년)에 걸쳐 대장경(처음 제작했다는 의미에서 초조대장경이라 한다)을 판각했다. 1232년(고종 19년)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자 또다시 구국의 일념으로 16년(1233~1248)에 걸쳐 새긴 경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해인사 고려대장경이다. 박상국 소장은 바로 이 무렵(1239년) 금속활자본인 ‘공인본’ <남명증도가>가 탄생한 것에 주목한다.
활판인쇄로 찍어내는 과정이다. 초창기에는 활자를 주물한 뒤 조판하여 인쇄하는 과정이 매우 까다로웠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시기에는 <고려대장경>의 목판 제작을 위해 전국 사찰의 각수들이 (대장경판을 제작하던) 남해로 차출되었습니다. 중앙에서는 기술자 공동현상이 빚어진 거죠. 그래서 당시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인 최이는 목판이 아닌 금속활자 인쇄를 시도한거죠.”
금속활자술은 목판술과 달리 제작한 활자를 다른 책이나 다른 쪽을 인쇄할 때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도된 금속활자 인쇄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초보적인 금속활자술이 당시 <초조대장경> 간행 등 고도로 발달한 목판인쇄술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초창기 제작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너덜이(금속찌꺼기)를 비롯한 온갖 흠결들이 나왔을 터인데, 기술자들은 주조와 시험인쇄를 거듭해가며 수정·보완했을 것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금속활자로 제작한 책(공인본)이 나왔으니 최이가 감격해서 발문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최이의 ‘중조 주자본(重彫 鑄字本)’ 발문 구절 중 ‘중조(重彫)’ 부분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찍어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세계기록유산인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목판본은 초창기 금속활자본과 달리 깔끔하게 인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목판본은 오로지 특정 책의 용도로만 쓰였지만 금속활자는 다른 책의 인쇄에도 쓰일 수 있었다. |해인사 소장
■어떤 경우든 구텐베르크보다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탄생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대로 그렇게 발명된 금속활자본의 인쇄상태는 만족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박상국 교수는 “따라서 고려 인쇄의 주류는 인쇄상태가 좋은 목판인쇄로 회귀했고, 금속활자인쇄는 그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문헌상 등장하는 <고금상정예문>(1239~1241년 추정)과 현전하는 <직지심체요절>(1377년) 등외에는 금속활자본이 알려지지 않고 있어요. 이런 책들은 인쇄문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겨우 그 기술을 재현한 것이겠지요.”(박상국 교수)
그렇다면 1239년 간행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공인본’ <남명증도가>)은 ‘실패한 발명품’인가. 그렇게 볼 수 없다. 그 실패의 경험은 고려말~조선초 피가 되고 살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태종은 “성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자소를 만들어(1403년)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정해자’)를 제작했고(1407년), 세종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를 창조했다.(1434년)
그 어떤 경우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8)의 금속활자 발명(1447년 무렵)보다 앞선 발명품이니 금속활자 발명에 관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이쯤에서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왜 서양만큼 활자문화를 꽃피우지 못했을까. (사진은 박상국 교수와 손환일 소장, 원진스님이 제공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박상국,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 김영사, 2020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보조사상 연구원 제11차 정기학술대회, 2015
손환일, ‘남명천화상송증도가(공인본)에 나타난 금속활자본의 특징’, <문화사학> 48, 한국문화사학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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