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물 박물관이 있습니다. 기원전 6000~기원전 2000년 사이 무려 4000년간 신석기인들의 삶을 복원해볼 수 있는 부산 동삼동 패총유적입니다.
패총이란 조개무지, 즉 신석기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들의 무덤입니다. 석회질로 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바꾸기 때문에 패총 안에 들어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잘 썩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삼동 패총에서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유물들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이곳은 당대 명품팔찌의 대량생산 공장이 존재했던 곳입니다.
1999년 발굴에서는 1500여점의 팔찌가 확인됐는데, 그 중에는 완제품도 있었고, 제작도중에 깨졌거나 아니면 제작하기 전의 조개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공장이었다는 얘기죠. 흥미로운 것은 광안리산 명품인 투박조개로 만든 이 팔찌들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동삼동 패총에서는 곰을 숭상한 사람들답게 흙으로 만든 곰인형이 확인됐고, 세밀한 형상은 과감히 생략한채 특징만 묘사한 사슴그림 토기도 보였습니다.
당대 신석기인들의 예술감각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무엇보다 동삼동 패총은 한국 고고학자들의 애환과 영욕이 담긴 발굴장이었습니다. 발굴역량이 부족했던 1960~70년대 숱한 고고학도가 동삼동에서 발굴을 배웠으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로라하는 대표학자들로 성장했습니다.
동삼동 패총에 읽힌 흥미진진 이야기,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4회는 ‘신석기 시대 명품팔찌공장 동삼동 패총’입니다.
"저기에 해동여인숙이 있었는데…. 횟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어디갔노?”
2008년 10월 어느날 필자는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과 부산 영도 동암동 패총 전시관을 갔다. 조선생이 스물여덟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1969년 군대를 다녀와 직장을 잡은 것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었지. 그런데 7개월 만인 8월 초년병 햇병아리 학예사인 나는 동삼동패총 발굴을 ‘명’받고 내려왔어요.”
조 선생의 추억담을 들으려는데, 급경사가 진 전시관 밖에 웬 젊은이들이 긴 줄을 선다.
국립해양대 학생들이었다. 학교에 가는 왕복버스를 타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시관 왼쪽으로 기다란 길이 통했고, 그 끝에 국립해양대 건물이 보인다.
“원래는 저기가 조도(朝島)라고 해서 섬이었는데 74년 해양대가 저곳으로 이전하면서 연륙되었어요.”
다시 조유전 선생의 옛이야기가 계속된다.
“여기 동삼동 패총 유적은 보시다시피 해변에 있잖아요. 당시 유적 앞바다에서는 이상한 물고기가 낚싯대에 걸렸는데…. 주둥이와 머리가 꼭 쥐처럼 생겼고, ‘찍찍’하는 소리를 내며 올라왔어요. 꼭 쥐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 못먹겠더라고…. 나중에 들으니 그걸 쥐고기, 즉 쥐치라 해서 쥐포를 만들어 맥주 안주로 먹는다고 하더군.”
“숲도 나무도 없는 8월의 뙤약볕에서 얼마나 더웠는지…. 바닷물에 풍덩 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는데 그럴 수는 없었고…. 그렇지만 흙으로 빚은 완형의 각배(角杯)와 석기, 패천(조개로 만든 팔찌)을 내 손으로 발굴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런데 조유전 선생의 회고담은 파란만장했던 동삼동 패총 발굴의 역사에서 하나의 가십거리일 뿐이다.
이 동삼동 패총에는 당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원로와 그리고 당대 고고학계의 자화상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조 관장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 고고학계를 주름잡는 1세대 고고학자들의 ‘젊은 날의 초상’도….
이 패총은 1929년 동래고보(현 동래고) 교사인 오이가와 다미지로(及川民次郞)가 처음 발견했다.
이듬해인 1930년과 32년 두 차례씩 모두 4차례 시굴조사를 벌여 빗살무늬 토기와 흑요석 등 신석기 유물들을 발굴했다. 일본인에 의한 발견과 조사. 여기까지는 일제시대 때 흔히 있었던 발굴 역사의 레퍼토리일 뿐이었다.
-어느 미국인 부부가 밝혀낸 한국 신석기 문화
그런데…. 해방이 되고도 17년이 지난 62년, A. 모아와 L.L 샘플이라는 미국인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
부부는 좀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남편인 모아는 대학 졸업 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40대 초반의 나이로 고고학에 눈을 떴는데, 관심 분야가 바로 한국 선사 고고학이었던 것이니….
“모아가 일본을 둘러보고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었어요. 이미 일본 선사시대 관련 연구는 차고 넘쳤지만 한국 선사시대, 그것도 신
석기시대는 연구의 불모지라는 걸 알았던거지. 그래서 한국 신석기를 전공으로 택한 거지.”(정영화 전 영남대 교수)
‘늦게 배운 고고학에 날새는 줄 몰랐던’ 모아부부는 미국 과학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했고, 급기야 2만달러라는 거금을 받고 한국에 온다.
“서울 집 1채 값이 달러로 쳤을 때 한 900달러 정도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2만달러라면 집을 20채 이상 살 수 있는 거금이었어요.”(정영화교수)
어쨌든 부부는 곧바로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을 찾아 “동삼동 패총을 한 번 발굴해보고 싶다”면서 도움을 청했다.
잠깐 참고사항 하나. 당시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두가지 큰 변화(진전)가 있었다.
하나는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이 61년 서울대에 고고학과를 개설한 것이고, 두번째는 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법에 따르면 유적 발굴은 반드시 문화재위원회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김재원 관장은 당시 김원룡 서울대 주임교수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달았다.
“모아씨. 단독발굴은 안됩니다. 하려면 서울대와 공동으로 하십시오.”
하지만 김원룡 교수는 모아의 발굴을 묵인했다. 도리어 모아 부부에게 방까지 만들어주고 서울대 고고학과 1기생(당시 3학년)인 정영화와 임효재 등 두 사람을 아르바이트 겸 조교로 붙여주었다.
“김원룡 선생은 이 기회에 걸음마 단계였던 고고학 발굴 기술을 배우자는 뜻도 있었을 겁니다. 동삼동 패총 발굴은 이 때문에 사실상 모아 부부의 단독발굴이었어요. 임효재나 저(정영화)나 영어도 배우고 외국의 선진 발굴기술도 배우고…. 남들이 부러워했죠. ‘저 친구들은 유학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정영화 교수)
하지만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만다. 모아가 동삼동을 파고 있다는 소식이 돌고 돌아 김재원 관장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김 관장은 삼불(김원룡 교수의 호)을 불러 “왜 외국인에게 단독발굴을 시켰느냐”고 호되게 꾸짖었고, 불똥은 모아에게 떨어졌다.
“지금도 생생해요. 삼불 선생님 성격이 불 같으시거든. 저희가 옆방에 있는데, 선생님이 모아에게 뭐라 큰소리치고 모아 역시 지지않고 대들고…. 잠시 후 보니 두 사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더라고….”(정영화 교수)
이 일로 삼불과 모아는 결별하고 만다. 화가 난 모아는 동삼동에서 발굴한 유물보따리를 들고 연세대를 찾는다.
“서울대 고고학과 입장에서는 사실 안타까운 일이었지. 만약 모아가 계속 있었으면 서울대가 주도적으로 동삼동 패총을 발굴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별로 서울대로서는 또 한번 쓰라린 일이, 연세대로서는 뜻하지 않은 ‘기화(奇貨)’를 얻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모아는 동삼동 패총을 조사하던 도중 틈틈이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했는데, 공주 석장리에서 첨두기(尖頭器) 같은 구석기 유물들을 수습한다. 정영화 교수의 회고.
“동삼동 패총 조사 도중에도 모아는 우리들에게 석장리에서 수습한 후기 구석기 유물들을 보여주었어요. 한국에 구석기 유적이 있다고…. 우리들은 무슨 구석기냐고 일축했어요. 한국 구석기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모아가 그래요. ‘왜 너희들은 찾아보지도 않고 없다고 부정하느냐’고…. 난 그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학문을 하는데 부정적 사고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평생 교훈으로 삼았어요.”
어떻든 모아는 이 석장리 구석기 자료 역시 연세대로 가져갔다. 당시 손보기 연세대 교수는 그 자료를 토대로 64년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했다. 손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구석기 유적을 확인함으로써 구석기 발굴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국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모아는 66년 일본 덴리대(天理大)가 발행하는 한국학 관련 학술지(조선학보)에 동삼동 패총 출토 유물을 정리하여 중간보고 형식으로 발표한다. 이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동삼동 패총 맨 밑바닥에서 채취한 목탄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가 BC 3000년 전후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충격 그 자체였지. 획기적이라고 했던 리비의 탄소연대측정 방법이 소개된 게 50년대였거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탄소연대측정이라는 개념도 잘 몰랐던 때였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연대가 그때만 해도 가장 첨단의 측정 방법으로 BC 3000년까지 올라간다는 결과를 얻었으니….”(조 관장)
-발굴의 기초를 배우다.
사실 모아 부부가 남긴 유산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발굴기법을 잘 모르던 당시, 우리는 선진 발굴의 기법을 고스란히 배웠습니다. 깊이 20㎝의 2m×4m짜리 피트를 두 곳 파서 층위를 구분하는 방법을 찾고…. 토기편 등을 넘버링하면서 분류하는 방법, 유적 명칭을 정하는 방법 등등…. 당대 선진발굴 기법의 ABC를 모아에게 배웠다고 봐야지.”(정영화 교수)
모아의 발굴로 비상한 관심을 끈 동삼동 패총의 가치는 69~71년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와 공동발굴)의 3차례 발굴로 더욱 구체화한다.
“동삼동 패총 발굴은 유적의 가치뿐 아니라 한국고고학계에도 엄청난 획을 그은 조사였어요. 현재 한국 고고학계를 이끄는 분들이 한결같이 동삼동에서 배운 발굴 기법으로 저마다 일가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거든.”(조유전 선생)
김원룡 당시 박물관장을 단장으로 박물관에서 윤무병·김정기·한병삼·김종철, 서울대 고고학과 출신인 김병모·임효재·정영화·조유전·지건길·최몽룡·이종선·전경수, 그리고 동아대 김동호 등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학자들이 참여했다.
1971년 3차 발굴에 참여한 부산대 출신 정징원 교수(부산대 명예교수)의 일화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전 당시 부산대박물관 조교였는데요. 얼마나 동삼동에 가고 싶은지 몸살을 앓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여의치 않았죠.”
스승인 김정학 부산대 교수와 서울대가 주도한 국립박물관 쪽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정학 교수만 해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명망있는 학계 원로였다. 당시 김원룡-손보기-김정학 교수 같은 이들은 한치의 양보 없이 자존심 싸움이랄까 하는 경쟁구도로 이른바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정학 교수의 텃밭인 부산에서 진행 중인 발굴에 부산대가 참여하지 못했으니….
“발굴에는 참여하고는 싶은데 (스승 눈치보느라) 갈 수는 없고…. 묘안을 냈어요. 국립대학 박물관 조교니 공무원 신분이잖아요. 그래 휴가원을 내고 동삼동으로 뛰어간거지. 스승님(김정학 교수)이 가끔씩 출토유물을 보러 동삼동 현장에는 오셨는데요. 그때마다 저는 선생님 눈에 띌까 숨어버리고….”
그렇게 어렵게 배운 패총에 대한 발굴 기법은 정징원 교수의 학문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이렇듯 부산 앞바다의 한적한 영도에 자리잡고 있는 동삼동 패총은 우리 고고학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고학자들의 영욕과 애환을 담고 있는 동삼동 패총이 주는 고고학적,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정징원 교수가 정리한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유적 연대가 모아의 탄소연대측정 연대, 즉 BC 3000년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발굴 결과 연대는 계속 올라갔고, 결국 이 유적은 BC 6000년, 즉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무려 4500~50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는 고고학적 자료가 나온거지. 말하자면 동삼동 패총은 신석기 문화의 전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입니다.”
그러니까 한반도 동남부 끝자락인 부산에서 이른바 중국 발해연안인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과 한반도 동부 고성 문암리 유적과 동시대라 할 수 있는 신석기 유적이 나온 것이다. 또한 이 동삼동인들은 4500~5000년간 지금으로 치면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잡은 세계인이었던 것이다. 그 증좌를 이제 하나하나 짚어보자.
-신석기문화 위용 드러낸 ‘동삼동 팔찌 수출단지’
대체 동삼동 패총(貝塚)이 무엇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오랜 기간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인 셈이다.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닷가에 모여살던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삶의 흔적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땅은 산성(酸性)이 많이 함유된 특징 때문에 동물이나 물고기뼈를 비롯한 유구와 유물이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백골이 진토(塵土)된다”는 말이 딱 맞다. 하지만 석회질로 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바꾸기 때문에 패총 안에 들어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잘 썩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토기와 석기, 뼈연모, 토제품 등 생활도구는 물론 무덤과 집자리, 화덕시설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선사시대 사람들이 지금처럼 ‘유난을 떨며’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면? 우리는 선사시대가 남긴 숱한 삶의 정보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 현명한 우리의 선사인들이여!
-곰 신앙의 정체
“특히 동삼동 패총은 선석기 초기인 BC 6000년부터 말기인 BC 2000년까지 4000년 동안 신석기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혀있어요. 각종 토기류와 석기, 골각기, 패(貝)제품, 토제품, 의례품을 포함해 그때의 자연환경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포함돼있어요. 그러니 신석기시대의 전 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거지.”(조유전 선생)
찬찬히 뜯어보자. 먼저 이곳에서 숱하게 출토된 덧띠무늬(융기문) 토기들은 연대 측정결과 유적 조성연대가 BC 6000년임을 알려준다. 울산 세죽유적과 강원 고성 문암리 출토 덧띠무늬 토기와 같은 시기임이 판명되었다.
“강원 고성 문암리라든가, 중국 동북방 발해연안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 등 BC 6000년 유적과 같은 시대임을 알 수 있어요. 또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 토기류가 쏟아졌는데, 토기에 이렇듯 갖가지 문양을 새기면서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조 관장)
출토 유물 가운데 재미있고 의미있는 몇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종교의례와 관련된 유물들.
조개가면은 크기가 12.9㎝, 11.8㎝ 정도인데, 국자 가리비에 사람의 눈과 입 모양으로 구멍을 뚫은 형상이다. 집단의 공동체 의식이나 축제 때 사용했거나 혹은 벽사의 의미를 담은 주술구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흙으로 만든 곰(熊) 모양의 토우(土偶)도 의미심장하다. 이 유물은 BC 4500~BC 3500년 문화층에서 확인됐다. 기자는 이 토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 유적지인 중국 뉴허량(牛河梁) 유적에서 발굴된 곰이빨과 흙으로 만든 곰 소조상, 곰 모양 옥기(玉器)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훙산문화 시대는 동이족이 창조한 발해문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
뉴허량 유적은 제단(壇)·신전(廟)·무덤(塚·적석총)이 결합된 제사유적. 그런데 바로 여신을 모셨던 신전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던 제단·적석총 등에서 유물들이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이로써 훙산인들의 곰 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필자의 시선을 더욱 붙잡은 것은 동삼동 출토 곰 토우의 연대가 훙산문화와 같은 시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역시 지금의 중국 동북방과 한반도 최동남단은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증거해주는 단서이다.
-사슴그림의 비밀
또 하나 재미있는 유물의 탄생비화. 2003년 어느 날, 당시 하인수 복천박물관 조사보존실장은 동삼동 패총에서 쏟아진 유물정리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1999년 동삼동 패총을 발굴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런데 출토된 토기가 편을 합해 유물상자로 300상자가 됐어요. 그야말로 ‘흙 반 유물 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어요. 그걸 스폰지나 칫솔 같은 도구로 토기에 묻은 흙을 씻어내느라 죽을 힘을 다했는데….”
기형과 문양별로 토기를 분류·정리해야 무문토기인지, 덧띠무늬 토기인지, 빗살무늬인지 알 수 있고, 빗살무늬라도 세부 문양이 어떤지를 파악해야 문화양상과 시대구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 어느 토기편(길이 8.7㎝, 너비 12.9㎝)에 눈이 한번 더 갔어요. 뭔가 선각(線刻)한 듯한 문양이 있는데, 왠지 단순한 문양이 아닌 것 같았어요.”
일일이 칫솔로 토기편을 씻어내던 하인수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사슴그림이 분명했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사슴 그림은 뼈나 대칼 같은 도구로 폭 2~3㎜의 선각으로 그렸다. 세밀한 형상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 특징만 잡아 추출 묘사함으로써 대상물의 이미지를 간결하고 단순하게 형상화했다.
“처음 길게 그은 선의 3분의 1 지점에 수직으로 선을 내려 사슴의 목과 몸체를 구분하고, 몸체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묘사했어요. 이 그림은 걸어가고 있는 사슴의 형상이 분명합니다. 신석기인이 이토록 첨단의 미술기법을 발휘하다니….”
반면 경주 출토로 알려진 견갑(肩甲)형 청동기와 아산 남성리 석관묘 출토 검파(劍把·칼자루)형 청동기 등에 보이는 청동기시대 회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곧 정신을 차린 하인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주목했다.
-동삼동에서 확인된 곰형 토우(土偶).
“반구대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암각화 제작에 고래 사냥에 표현된 작살의 형태가 청동기일 것이라는 추정을 토대로….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전문적인 고래사냥 또한 청동기 시대 때 일어난 일이라고 보았고….”
하지만 동삼동 패총에서 보인 사슴그림은 반구대 암각화 사슴과 미술사적으로 동일한 양식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바로 고래사냥입니다. 지금까지는 신석기 시대에는 고래사냥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정설이었는데요. 문제는 동삼동 패총의 전 문화층에서 고래뼈가 다량으로 출토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남해안 유적에서도 고래 유존체와 함께 대형석제 작살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그것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래사냥이 성행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수출용 팔찌를 생산한 산업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인수가 또 주목한 것은 1999년 조사에서 확인된 1500여 점에 이르는 조개팔찌(패천·貝釧)와, 발굴조사 때마다 보이는 일본산 흑요석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발굴된 1500여점을 유심히 보면 완제품은 물론 파손된 제품과 아직 제작되지 않은 제품 등이 섞여 있어요. 출토 팔찌의 70~80%는 중간단계에서 파손됐고, 일부는 마연 및 마무리 단계에서 깨졌어요. 조개팔찌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종합하면 동삼동에는 대규모 ‘팔찌공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팔찌의 재료가 밤색무늬조개과에 속하는 투박조개(90%)라는 점. 이 투박조개는 수심 5~20m 사이의 모래밭에서 서식하는데, 바위가 많은 일본 대마도에서는 볼 수 없다. 하인수는 투박조개가 서식한다는 동해안 죽변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수시로 답사했다.
“투박조개가 어떻게 서식하고 잡히는지 직접 잠수복도 입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채집까지 해봤어요. 그래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동삼동 패총의 조개팔찌는 광안리산 투박조개였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투박조개는 매끌매끌하고 워낙 단단해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을 정도지만 그만큼 가공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조개팔찌를 만드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였던 셈이다. 덧붙이면 실패율이 그렇게 높았어도 투박조개만 고집한 것은 투박조개 팔찌가 최고급 장신구였음을 시사해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팔찌 113점 가운데 투박조개 팔찌가 84%(95점)나 된다는 점. 대마도에서는 나지 않는 투박조개 팔찌가 왜 대마도에서 다량으로 나오는가. 그리고 일본산 팔찌의 제작방법과 형태, 속성이 동삼동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것은 ‘동삼동산 조개팔찌’가 대마도와 일본 규슈로 대량 수출됐다는 이야기다.
-일본산 흑요석의 의미
그렇다면 수입품은? 하인수는 그것을 일본산 흑요석이라 본다.
“석기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흑요석은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정도에서만 나옵니다. 그런데 동삼동 패총을 비롯, 남해안 패총 유적 18곳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은 대부분 일본 규슈 고시다게(요악·腰岳)산입니다.”
동삼동 ‘팔찌공장’에서 제작된 조개팔찌(패천)와의 교역품일 가능성이 큰 일본산 흑요석.
또 하나, 하인수는 대마도에서 확인된 고시다카(越高) 유적을 주목했다. 이곳에서는 한반도산 융기문 토기가 2600여점 쏟아진 반면, 일본계 유물인 승문(繩文·새끼줄 문양)토기는 단 7점에 불과했다.
“곧 대마도에는 동삼동 등 한반도에서 건너가 중개무역을 담당했던 집단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반도인들은 대마도에 둥지를 틀고 동삼동산 최고급 조개팔찌와 일본산 흑요석을 물물교환이나 아니면 다른 교역의 형태로 거래한 것입니다.”(하인수씨)
“그런데 수입된 흑요석의 경우엔 완제품도 있었겠지만 원석도 있지?”(조유전 선생)
“예. 통영 연대도 패총에서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길이 4.8㎝, 너비 3.3㎝, 두께 2.5㎝, 무게 43.6g의 흑요석 원석이 확인됐어요. 그것은 한반도 사람들이 원석을 가져다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는 얘기입니다.”(하인수씨)
결국 동삼동은 당대 최대의 수출용 팔찌를 제작한 ‘산업단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흑요석이 집중 출토된 부산 범방패총, 통영 욕지도·연대도 패총 등은 수입된 흑요석으로 석기를 제작한 거점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제주도 간 교역은 이미 구석기말~신석기 초부터 시작됐는데, 동삼동에서 제주 북촌리식 토기와 규슈산 승문토기 등이 보이는 이유이다.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열도 서북 사이는 200㎞ 정도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8000년 전부터 이런 교역이 이뤄졌냐고요? 해양학을 전공한 윤명철 교수(동국대)의 연구에 따르면 항해도구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선사시대에도 기본적인 항해수단만 있으면 자연조건을 이용해서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해요.”
예컨대 규슈해안~한반도 남해안에 닿으려면 대마도 남서해안에서 북서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대한해류를 타고 항해할 경우 동남해안인 부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조유전 선생이 동삼동 패총 유적을 정리했다.
“동삼동 패총은 한국 고고학계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유적입니다. 한국 고고학이 걸음마 단계일 때 실습장이 되어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의 산실이었고…. 고고학자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국 신석기 문화 4000년’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유적이라 할 수 있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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