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보물과 관련된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1933년 마을주민이 밭을 갈다가 발견한 경주 노서리 215번지 유물입니다. 그러나 주민이 수습한 것은 반쪽이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현장을 찾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가 나머지 반쪽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마을주민이 찾은 반쪽은 서울(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나머지 반쪽은 도쿄(국립제실박물관)으로 갔습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거죠. 왜 그렇게 흩어진 것일까요.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이듬해인 1966년 문제의 노서리 유물 반쪽이 반환됩니다. 두 유물이 합체됐겠죠. 이듬해인 1967년 문화재위원회는 그렇게 합쳐진 유물 중 팔찌(454호), 귀고리(455호), 목걸이(456호) 등을 보물로 지정합니다. 그렇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귀고리가 문제였습니다. 이 귀고리는 42년 뒤 보물의 지위를 잃어버립니다. 즉 보물 455호의 목록에 오른 유물은 노서리 출토 귀고리가 아닌 '황오동 출토 귀고리'로 둔갑해버립니다. 출토 때부터 반으로 나뉘었고, 서울과 도쿄로 흩어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해후했는데, 이제는 더 잘 생기고 예쁜 배우자를 만났다고 소박당한 꼴입니다. 졸지에 보물의 지위를 잃어버린 노서리 금귀고리는 지금 이 순간도 천덕꾸러기 신세입니다. 1966년 반환 이후 단 한번도 수장고 밖을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유물 사진 역시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습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29회 팟캐스트가 전합니다.
‘보물 454호 금팔찌(노서리 215번지)-보물 455호 금귀고리(황오동 고분)-보물 456호 금목걸이(노서리 215번지)….’
지정문화재 목록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 대목에서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보통 한 곳의 출토지에서 나온 문화재를 국보나 보물과 같은 중요문화재로 등록할 때는 차례차례 일련번호를 붙인다.
예를 들자면 1974년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국보로 지정할 때 161호(청동거울)-162호(석수)-163호(지석) 등으로 붙였다.
그렇다면 노서리 215번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보물번호도 454~456호로 붙여야 하는게 상식이다. 그런데 454호와 456호 사이에 생뚱맞은 유물이 하나 들어가 있다. 황오동 출토품이다. 먼저 노서리 215번지 출토품 사이에 왜 ‘황오동 금귀고리’가 은근 슬쩍 들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일까.
■노서리 215번지 고분의 미스터리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또하나 착안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고적조사사업을 펼치면서 전국의 고분에 일련번호를 붙였다.
98호(황남대총), 125호(봉황대), 126호(식리총), 127호(금령총), 128호(금관총), 129호(서봉총), 155호(천마총)…. 뭐 이런 식이다.
훗날 발굴이 진행되고 무덤의 특징을 살린 정식 이름(천마총·황남대총·식리총·금령총·금관총·서봉총…)을 붙일 때까지는 그냥 고분번호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노서리 215번지’의 경우만 ‘215호분’이 아니라 ‘215번지’라 되어 있다. 고분 이름이 아니라 지번이다. 이 무슨 조화인가.
한마디로 ‘노서리 215번지’의 경우 일제가 고적조사사업을 벌일 때 고분이 있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이었다는 뜻이다.
궁금증이 증폭된다. 고분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노서리 215번지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지금부터 한 쌍을 이루는 유물이 한쪽은 한국인, 나머지 한 쪽은 일본인에 의해 발굴됐고, 이후 한쪽은 한국에 남았지만, 다른 한쪽은 일본으로 흩어졌으며, 훗날 천신만고 끝에 반환되었지만 보물의 지위를 잃어버린 ‘노서리 215번지 금귀고리’의 슬픈 사연을 한번 풀어본다.
먼저 84년 전 꼭 이맘 때의 경주 읍내로 달려가보자.
■주민이 수습한 황금장식들
“이거 왠 돌이 이렇게 많아.”
1933년 4월 3일 경북 경주읍 노서리 215번지에 사는 주민 김덕언은 자기집 토담을 따라 호박씨를 뿌리려고 땅을 갈고 있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파는 곳마다 사람 머리 크기의 강돌이 쉼없이 나왔다.
사실 고고학의 측면에서 심상치않은 일이었다. 민가 주변에 강돌이 그렇게 많이 나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경주 읍내에 운집한 적석목곽분이 아닐까. 그 말이 맞았다. 김덕언이 강돌을 들어내고 1m 더 파고 내려가자 뭔가 수상한 물건이 나왔다.
굽은옥(곡옥) 1점이었다. 천년고도 경주는 전 지역이 ‘유물밭’이 아닌가. 경주 읍민으로서 누구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김덕언의 삽질이 계속됐다.
사람의 키만큼 더 파자 켜켜이 쌓인 돌무더기가 보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흙묻은 금반지·금귀고리와 굽은옥·대롱옥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습해보니 금귀고리 1점, 은팔찌 1쌍, 금반지 1점, 은반지 1점, 금 구슬 33알이었다.
수습유물의 처리를 놓고 이틀간 고민하던 김덕언은 결국 경주경찰서로 달려갔다. 황금유물의 발굴소식에 경주시내에 발칵 뒤집어졌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서둘러 경북도지사에게 “현장을 보전하고 출토유물을 잘 관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상하다 왜 한쪽만 발견됐을까”
총독부는 곧바로 총독부박물관 고적조사촉탁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을 급파한다.
4월 7일 경주경찰서에서 마을주민 김덕언이 신고한 유물을 살피던 아리미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왜 귀고리가 하나 뿐일까.”
만약 제대로 갖춰져 있으려면 한 쌍이어야 할 귀고리가 한 쪽 뿐인게 이상했던 것이다.
게다가 굽은옥과 대롱옥, 금구슬, 반지 등도 수량이 많지 않았고, 뭔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풍겼다.
‘뭔가가 덜 나온 것 같아. 제대로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아리미쓰의 마음은 급했다.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실 현장, 즉 김덕언의 집(노서리 215번지)은 심상치않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금관총·서봉총·금령총·식리총 등 황금유물이 잔뜩 출토된 노동리·노서리 고분군 중에서 가장 남서쪽의 가장자리 끝에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200기에 가까운 경주 고분의 분포도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김덕언의 집 근처는 훗날 호우총으로 명명되는 140호분만 그려져 있었다.
■“이게 바로 한쌍이야!”
4월 12일부터 김덕언의 집에서 긴급발굴이 시작됐다.
아리미쓰가 실무를 맡았지만 조사의 주체는 발굴비를 부담한 조선고적연구회였다. 일종의 발굴기관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31년부터 재정난에 빠지자 발굴조사사업을 펼칠 여력을 잃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공사 단체와 각계 인사들의 자금을 모아 발굴법인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고적연구회이다. 연구회의 이사장은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이 맡았다.
연구회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였다.
각설하고 이렇게 시작한 발굴에서 토담을 제거했다. 바로 밑에서 적석층이 보였다. 적석의 상부면을 찾아가자 토기들이 나타났다.
시신을 묻은 것으로 보이는 목곽면에서 금제귀고리가 한개 보였다. 아리미쓰가 소리쳤다.
“이거야. 이게 (김덕언이 수습한 귀고리와) 한 쌍이야.”
귀고리 주변에서 금구슬(44개)과 굽은옥, 대롱옥 등이 잇달아 보였다. 이 역시 김덕언이 수습한 유물과 짝을 이룬 것이 틀림없었다.
귀고리에서 약 40㎝ 떨어진 서쪽에서 금제품과 은제품 등 두 쌍의 팔찌가 겹쳐진 채 확인됐다.
“분명 피장자의 네 손가락에 끼우고 묻었을 것이다.”
■명품 목걸이, 귀고리, 팔찌가 한 세트로
김덕언이 수습한 유물과, 아리미쓰가 더 확인한 유물이 합쳐지자 완벽한 세트로 거듭났다.
아리미쓰는 두 번에 걸쳐 수습된 유물을 맞춰보고는 무릎을 쳤다. 이렇게 아름다운 유물이 있을까.
우선 김덕언이 찾은 33개, 아리미쓰가 발굴한 44개 등 총 77개의 황금구슬과, 비취빛 굽은옥 1점을 연결해봤다. 금목걸이였다.
이 금목걸이는 새김눈을 한 가는 금구슬을 아래 위로 각각 6개씩 연결해서 하나의 구슬 형태로 만들었다.
구슬에는 나뭇잎 모양이 달개를 5개씩 매달았다. 달개도 그냥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달개의 가장자리를 안쪽으로 말고 새김눈을 새겨서 화려함을 더했다. 이것은 8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목걸이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
김덕언이 한쪽, 아리미쓰가 나머지 한쪽을 발견해서 한쌍으로 맞춘 황금 귀고리 역시 화려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 유물은 피장자의 귓불 부분에서 나왔다.
중심고리가 금박판을 망치로 두드려 붙인 타원형이고, 각각 17잎, 15잎의 영락이 붙어있다. 이 유물은 훗날 졸지에 보물의 지위를 상실하는 신세가 된다.
두 쌍씩 확인된 금팔찌와 은팔찌의 상태도 좋았다. 금팔찌는 앞뒤 양면에 각각 4개의 용무늬를 새겨 넣었고, 은팔찌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이외에도 대형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항아리 내부에는 굴, 대합, 논우렁, 소라, 전복, 그리고 물고기뼈와 새뼈가 있었다. 이것들을 수습하여 아래를 살펴보니 뚜껑접시 등 50여 점이 담겨져 있었다. 그 때까지 출토된 신라유물 중에서도 특급 유물로 꼽힐만 했다.
■한쪽은 서울, 한쪽은 도쿄…이산가족된 유물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을주민 김덕언이 수습해서 경찰에 신고한 유물들은 유실물관리법에 의해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아리미쓰가 실무를 맡아 발굴한 나머지 유물들은 발굴을 주도한 조선고적연구회가 보관하고 있었다. 쌍을 이뤄야 할 유물들이 처음부터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비극이 이어졌다. 1934년 8월23일 조선고적연구회 이사장이자 조선총독부 2인자인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 정무총감이 사달을 일으켰다.
아리미쓰 발굴팀이 수습한 반쪽 유물을 몽땅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해버린 것이다.
결국 같은 무덤(노서리 215번지)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절반이 한꺼번에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
“김덕언이 수습한 귀고리는 경성(서울)에 있는데, 내(아리미쓰)가 수습한 나머지 귀고리 1점은 도쿄로 갔다. 금제 목걸이를 만들 때 쓰인 금 구슬 가운데 김덕언이 수습한 33알은 서울에, 내가 수습한 44알은 도쿄로 흩어졌다. 목걸이의 한가운데를 장식한 굽은옥 역시 도쿄로 갔다. 옥제목걸이도 역시 뿔뿔이 흩어졌다.”(아리미쓰)
이 뿐이 아니었다. 피장자의 오른팔에 끼워진 금은제 팔찌 한 쌍은 오른손 네 손가락에 끼워진 금은반지 4점과 함께 도쿄로 보내졌다.
반면 왼팔을 장식한 은제팔찌 한쌍과 금반지 1쌍은 서울에 남겨졌다. 참으로 기막힌 이산가족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아리미쓰는 “한 사람의 피장자를 치장한 장신구를 경성(서울)과 도쿄로 갈라놓은 조선고적연구회의 처사는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공허한 목소리였다.
고적연구회측은 ‘연구회가 수집한 유물은 국고에 귀속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처분한다’는 회칙 제10조를 들어 아리미쓰의 주장을 일축했다.
조선에서 난 귀중한 유물들을 일개 발굴법인 멋대로 반출해간 것이다. 훗날 아리미쓰도 이 대목에서 분통을 터뜨렸지만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든 격이었다.
“조선고적연구회의 일개 조수였던 나(아리미쓰)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물로 지정된 노서리 출토 세자매
노서리 215번지 유물은 이후 34년 동안 이산가족 신세로 나뉘어 있다가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협정에 따라 66년 5월 28일 도쿄국립박물관으로부터 문제의 유물들을 반환받았다.
둘로 나뉜채 한 점은 서울, 다른 한 점은 도쿄에 보관돼 있던 금귀고리가 마침내 어엿한 한쌍이 되었다.
금목걸이도 서울의 금구슬 33개와 도쿄의 금구슬 44개와 굽은옥 1점을 연결하자 온전히 화려한 자태를 드러냈다. 피장자 1인의 손에 끼어있던 팔찌와 반지도 제모습을 찾았다.
이듬해인 1967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회는 이렇게 합체된 노서리 215번지 유물 가운데 금팔찌(454호)와 금귀고리(455호), 금목걸이(456호)를 보물로 지정했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최상급임을 인정한 것이다. 36년간의 이산 소동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 같았다.
■뒤바뀐 보물의 발견
다시 37년이 흐른 2000년 어느 날이었다.
이한상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현 대전대 교수)는 ‘신비한 황금의 나라 신라 황금전’ 특별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삼국시대 황금제품이 전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일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본에서 신라고고학을 전공한 후지이 가즈오(藤井和夫)라는 인물이었다. 후지이는 노서리 215번지 고분을 발굴한 아리미쓰와도 친분을 쌓았던 사람이었다.
“이(한상) 선생님. 선생님의 논문 중에 바로잡아야 할 게 있어서 연락드려요.”(후지이)
이한상 학예사가 깜짝 놀랐다.
“네. 어느 부분입니까.”(이한상)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이 있어요.”(후지이)
후지이는 이한상 학예사가 1998년 학술지 <고대연구>에 발표한 ‘5~6세기 신라 태환이식의 분류와 편년’ 논문을 거론했다.
“이 선생님 논문 중에 보물 455호라고 한 금귀고리는 노서리 215번지 유물이 아니에요.”
이 무슨 말인가. 문화재청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보물목록에 올라있는 보물 455호 유물이 ‘노서리 215번지 출토 금귀고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록 속 보물 455호 유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42년 만에 밝혀졌으나…
그것은 경주 황오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였다. 한마디로 보물 455호가 노서리 금귀고리에서가 황오동 금귀고리로 둔갑한 것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뒤바뀐 보물의 사연을 알 길은 없다.
다만 추정할 수는 있다. 한·일 협정에 따라 반환된 노서리 215번지 금귀고리 한 점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했다.
이 두 유물은 무사히 합체되어 소장고에 고이 넣어두었다. 이듬해인 1967년 6월 21일 문화재위원회의 보물지정 심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서랍을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잘못 보관한 것인지 몰라도 노서리 215번지 금귀고리가 아니라 황오동 고분의 금귀고리를 심의에 올린 것이다. 그러니까 문화재위원들은 이날 노서리 215번지의 금귀고리인줄 알고 보물로 지정했다는 얘기다.
행정상의 명백한 실수였다. 그후 34년 동안 노서리 215번지 출토 금귀고리로 알고 있던 보물 455호는 사실 황오동 출토 금귀고리였던 것이다.
“착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 황오동 금귀고리가 더 정교하고 더 화려합니다. 박물관에서 도쿄에서 가져온 귀고리 한짝과 서울의 한짝을 합쳐 보관했을 때 황오동 금귀고리와 착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흑백사진으로만 남은 노서리 금귀고리의 신세
어쨌든 뒤늦게나마 보물이 뒤바뀐 사실을 알게된 것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2009년 10월 10일 이른바 ‘보물 제455호 금제귀고리’ 관련 지정문화재 심의회의가 열렸다.
웬만하면 노서리 215번지 금귀고리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했지만 심의결과는 달랐다.
황오동 금귀고리가 노서리 금귀고리를 밀어내고 보물의 지위를 완전히 차지해버렸다.
지정목록에만 ‘노서리 215번지 금귀고리’라 했을 뿐 지금까지 각종 전시출품이나 전시도록에는 모두 ‘황오동 금귀고리’가 수록돼있다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였다.
무엇보다 황오리 유물이 더 정교하고 화려하다는 점이 감안됐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출토 당시부터 반으로 나뉘었고, 결국 서울과 도쿄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천신만고 끝에 해후한 부부였는데, 이제는 더 잘 생기고 예쁜 배우자를 만났다고 내팽개친 꼴이다.
졸지에 보물의 지위를 잃어버린 노서리 215번지 금귀고리는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1966년 반환 이후 단 한번도 수장고 밖을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유물 사진 역시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다. 모든 전시회나 전시도록은 ‘보물 455호 황오동 금귀고리’가 장식하고 있다.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발굴조사보고’, <조선고적연구회 유고-경주 황오리 제16호분,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발굴조사보고서>, 유네스코 동아시아문화연구센터, 재단법인 동양문고, 2000
이한상, <황금의 나라 신라>, 김영사, 2204
김현희,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경주 노서리 215번지에서 출토된 금목걸이’,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http://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920)
국성하,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협상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김지현, ‘전후 한일 분화재 반환 교섭에 괌난 재평가’, 국민대 석사눈문, 2011
이준구, ‘한·일 회담 반환문화재 인수유물’, <미술사학연구> 165호, 한국미술사학회, 1985
이순자,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 숙명여대 박사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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