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술이야.”
1974년 초겨울.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 전국시대(BC 475~BC 221) 중산국(中山國)의 왕릉터에서 흥미로운 유물1만9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액체가 가득 찬 병들이 다수 보였다. 조심스레 분석하던 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곡주(穀酒) 성분이 분명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2300년 된 술이었다.
예로부터 중산국의 술은 전설로 남을 만큼 유명하다. 중산국에 적희(狄希)라는 술의 명인이 있었다. 그가 만든 ‘천일춘(千日春)’은 대륙을 풍미했다. 어느 날 유현석(劉玄石)이라는 자가 적희를 찾아왔다.
“술맛 한번 보게 해주시면….” 적희가 “아직 숙성이 덜 됐다”고 말렸다. 하지만 유현석은 막무가내로 마셔버렸고, 술에 취해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 적희가 유현석의 가족에게 말했다.
중산국의 왕릉터에서 확인된 술병. 술병 안에 2300년전의 술이 담겨있었다.
“이제 깨어날 때가 됐네요.” 가족이 반신반의하면서 무덤을 파서 관을 열었다.
과연 유현석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아 정말 맛있는 술이었어요.”
여전히 술냄새가 진동했다. 술을 마신지 3년이 지났는 데도…. 얼마나 지독했던지 무덤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 술냄새에 취해 3개월간이나 쓰러져 있었다.
중산국 뿐이 아니다. (은)상나라(BC 1600~BC 1046) 사람들의 ‘술사랑’은 유난스럽다. 상나라 무덤을 파보면 술잔과 술병 등이 즐비하다. 얼마나 술을 좋아했던지 죽어서도 그 좋아하는 술을 마시라고 무덤에 부장해 놓은 것이다. 출토된 갑골문에는 “100잔의 술을 권했다”는 문구가 있다.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100잔을 권할 만큼 주량 또한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양조기술도 첨단을 걸었다. 술의 재료는 기장과 쌀이었다. 기장과 향기로운 풀을 섞어 만든 술은 창()이라 했고, 쌀로 만든 술을 예(醴)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그 놈의 술 때문에’ 나라까지 멸망했다고 했을까. 서주(西周)시대의 청동솥에는 “상나라는 제후와 백관이 술에 절어 패망했다”는 명문이 새겨있다. 또 <상서(尙書)> ‘주고(周誥)’는 “상나라 백성이 모여 술을 마시는데 그 술냄새가 하늘까지 올라갔다. 하늘이 노여워해서 상나라를 멸하도록 했다”고 기록했다. 그 악명높은 ‘주지육림(酒池肉林)’ 고사의 장본인이 은(상)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아닌가. <사기> ‘은본기’는 “술과 음악, 여자를 탐한 주왕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혀를 끌끌 찼다.
이쯤해서 뜬금없이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하냐고 묻는 이가 있을 터. 절대 그렇지 않다. 상나라나 중산국이나 모두 동이족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상나라의 시조인 설(楔)은 동이족의 일파다. <순자(荀子)> ‘성상(成相)’은 동이족인 상족이 중원으로 내려와 한족의 나라인 하(夏·BC 2070~BC 1600)를 멸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중산국의 경우 춘추시대 때는 ‘선우(鮮于)’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런데 이 ‘선우’라는 이름은 조선의 선(鮮)과, 기자의 둘째아들(우·于)를 딴 것이다. (은)상이 멸망하자 기자(箕子)가 둘째아들인 ‘우’를 지금의 핑산에 봉하면서 선우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는 속일 수 없는 법. 상나라-중산국의 ‘술사랑’은 부여(BC 3세기~AD494)로 이어진다.
부여는 ‘상나라의 역법을 사용하고, 상나라 정월에 제사를 지냈으며, 상나라 색깔인 흰색을 숭상한’(<삼국지> ‘위서·동이전’ 등) 나라다. 그런데 부여는 상나라 정월에 제사를 지낸 뒤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연일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 한반도 남쪽인 마한 등에서도 “5월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밤낮으로 쉼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
못말리는 동이족이다. 그렇다면 과연 동이족의 술사랑은 지나친 것이었을까.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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