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경기·호남·동북지역에 기근이 들자 정조는 침전에 ‘상황판’을 걸어놓았다.
“침실 벽에 재해를 입은 지역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고을의 수령 이름을 써놓고, 세금을 감면하거나 구휼을 마칠 때마다 그 위에 기록했다.”(<홍재전서>)
정조의 어찰. 정조는 밤새도록 보고서를 보고 경향 각지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정조가 침실을 ‘재난 컨트롤타워’로 삼아 진두지휘한 까닭은 명쾌했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으니 곤경에 빠진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과인의 마음도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3600년 전 상나라 창업주 탕왕은 7년간이나 가뭄이 계속되자 ‘희생양’을 자처했다.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른 뒤 백마를 타서 희생의 모양새를 갖추고는 상림(桑林·뽕나무밭)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거기서 ‘문란한 정사를 펼쳤고, 아첨의 말을 듣고 어진 이를 배척했으며, 뇌물이 성행해서 백성이 곤궁에 빠졌다’는 등 자신의 6가지 잘못을 일일이 거론하며 자책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탕왕의 ‘상림육책(桑林六責)’, 즉 ‘뽕나무 밭의 6가지 자책’이다. 탕왕이 간절한 기도를 올리자 곧 꿀비가 쏟아졌다.(<사문유취·事文類聚>) 당나라와 송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당 태종과 송 태종의 일화도 인구에 회자된다. 당 태종은 메뚜기 떼가 곡식을 죄다 훑고 지나가자 들판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백성의 곡식을 갉아먹으려면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으라”면서 메뚜기 두 마리를 잡아 삼켜버렸다. 그러자 메뚜기떼가 몰살했다.(<정관정요>) 송 태종은 더했다. 메뚜기떼가 뒤덮자 “내 잘못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샀으니 내 몸을 불살라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겠다”면서 제단을 쌓아 스스로 몸을 태우려 한다. 그러자 메뚜기떼가 소멸됐다.(<송감·宋鑑>)
후대의 군주들도 탕왕과 당 태종·송 태종의 일화를 그냥 흘리지 않았다. 재난이 일어나면 모두 ‘군주의 부덕’ 탓이라 자책하면서 전전반측했다. 예컨대 영조 임금은 재해가 잇따르자 “과인이 과연 당 태종처럼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하얀 밤을 새웠다. 특히 군주가 나서 발 빠른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정조의 재난대처법은 심금을 울린다.
“재난을 당한 백성을 돌보는 것은 특히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 백성의 목숨이 달려있는 사안이다.”(<홍재전서>)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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