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충남 공주에서는 금강을 따라 공주~부여를 연결하는 백제큰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해발 67m인 야트막한 산(정지산)을 절단할 참이었다. 이미 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백제큰다리)의 교각공사는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웅진백제의 고도가 아닌가. 시 전체가 유적·유물밭이므로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문화재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했다.
지표조사는 국립공주박물관이 맡았다. 만약 정지산의 지표에서 유물·유구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절단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지산 주변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채집되었다.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96년 2월부터 정식발굴조사가 시작됐다. 발굴은 박물관에서 가장 젊은 학예사(이한상 현 대전대 교수)가 맡았다. 발굴이 진행될수록 뭔가 이상했다.
■수상쩍은 기와건물의 정체는
‘아무리 얕다해도 명색이 산인데, 산의 정상부가 왜 이리 평탄할까.’
그랬다. 정상부의 면적은 800여 평이었는데 마치 학교 운동장 같았다. 그곳에서 7기의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그 가운데 평탄한 땅에서 유독 돌출돼있는 중앙 건물지(15.5평·8m×6.4m)의 정체가 수상쩍었다. 흙을 더 쌓아 돌출시킨 것이 아니라 주변의 땅 전체를 깎아낸 것이어서 더욱 이채로웠다. 건물을 높여 웅장함을 더하고 배수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주변에서 기와편이 출토되었으므로 지체높은 기와건물이 존재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희한했다. 다른 건물지와 달리 적심도, 초석도 없었는데, 무려 45개의 기둥이 3열로 박혀 있었다. 게다가 건물의 중앙부에 다시 4개의 기둥구멍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덩이가 하나 파여있다. 15평 남짓되는 기와건물에 초석도, 적심도 없이 그저 맨땅에 구멍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
그렇다면 결코 튼튼한 구조가 아니다. 오랜기간 사용한 건물이 아니라 일정기간 사용했던 특수목적 건물이 아니었을까. 뭐 이런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다.
또하나 건물에 기둥만 45개 박은 것도 흥미롭다. 게다가 한가운데는 다시 4개의 기둥을 박았고, 그 안에 구덩이가 하나 턱하니 조성해놓았다.
그렇다면 15평 남짓한 이 건물 안에는 사람이 활동할만한 공간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한 가운데 구덩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대체 백제인들은 왜 이 야트막한 야산에 800평 가량의 넓은 공간을 만들어놓고 사람이 활동할 수 없는 기와건물을, 그것도 잠깐의 목적을 위해 조성했던 것일까.
■외부인이 들고온 토기의 단서
주변에서 나온 유물에서 단서를 찾았다. 우선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사격자무늬(기하학무늬) 벽돌이 출토되었다. 웅진백제(475~538년)의 유적이 확실하다는 얘기다.
또 장고 모양의 그릇받침(器臺) 조각이 17점 확인됐다. 기대는 일반적으로 제사용 그릇, 즉 제기를 올려놓는 받침대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정지산은 백제의 제사유적이 아닐까. 유적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들도 심상치 않았다. 매우 정교한 정품(精品)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왜국 계열인 스에키(須惠器·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아 5세기부터 일본에서 제작된 회색토기)가 보였다. 이 뿐이 아니었다. 고창과 나주, 고령 등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외부 토기들이 섞여 출토됐다.
무슨 뜻일까. 왜 이 야트막한 구릉에서 공주에서 멀리 떨어진 외부의 토기들이 보일까. 혹시 공주인이 아니라 외부인이 들고온 토기가 아닐까.
■무령왕릉 지석에서 단서를 찾았다
유구와 유물을 쭉 검토해보면 뭔가 제사와 관련된 유적 같기는 한데, 과연 그 정체는 무엇일까.
이한상 학예사의 뇌리를 스친 유적이 있었으니 바로 정지산 유적의 지근거리에 있는 무령왕릉이었다. 1971년 숱한 화제 속에 발굴된 무령왕릉의 주인공은 백제 25대 임금인 무령왕(재위 501~523년)과 무령왕비였다.
“갑자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과 매지권(買地券·무덤조성을 위해 땅을 매입했음을 알린 상징적인 매매계약서), 무령왕비의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이 떠오르더군요. 새삼스레 들춰보게 되었죠.”
1971년 발굴된 무령왕의 지석과 매지권, 그리고 왕비의 묘지는 당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즉 발굴 당시 무령왕릉의 널길에 지석 2장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지석 1장은 무령왕의 묘지가 새겨져 있었다.
“사마왕(무령왕)이 나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12일 대묘에 안장했다.”(무령왕의 지석)
즉 무령왕은 죽은지 27개월 만에 대묘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령왕의 시신은 27개월 동안 어디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유지(酉地·서쪽)와 신지(申地·서남쪽)의 비밀
이한상 학예사는 다시 또다른 지석 한 장을 살펴보았다.
그 지석 1장의 앞면에는 무령왕이 죽자 지하신에게 무덤조성을 위해 땅을 샀음을 알린 무령왕의 매지권이 새겨져 있었다.
“~무령왕이 죽자~신지(申地)의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했다.”는 것이었다.
24방위의 하나인 ‘신지(申地)’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서쪽에서 남으로 30도 안쪽의 방위를 일컫는다. 무령왕이 묻힌 땅, 즉 지금의 무령왕릉이 서남쪽 땅이라는 소리다.
다시 매지권을 새긴 그 지석의 뒷면을 쳐다보았다.
뒷면에도 역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남편(무령왕)보다 3년 뒤 죽은 부인(무령왕비)의 묘지였다.
백제 조정은 남편(무령왕)보다 나중에 죽은 무령왕비의 묘지를 무령왕의 매지권 뒷면에 새겼을 것이다. 무령왕비의 묘지 내용은 이랬다.
“병오년(526년) 12월 백제왕비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셨다. 유지(酉地·서쪽)에서 상례를 치르고(居喪在酉地), 기유년(529년) 2월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지냈다.”
■서쪽땅(정지산)에서 빈전을 차리고, 서남쪽 땅(무령왕릉)에 묻었다.
이한상 학예사는 지석 2개의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523년 5월 7일 62살의 무령왕이 죽어 서남쪽이 조성된 대묘(무령왕릉)에 안장되었다.(525년 8월12일) 그런 뒤 1년 4개월만인 526년 12월 부인(무령왕비)도 죽었다.
그러나 부인은 곧바로 남편 곁에 묻히지 못했다. 일단 유지(酉地), 즉 서쪽의 땅에서 장례를 치른 뒤 ‘죽은지 2년 3개월 만에’ 남편이 묻힌 대묘에 합장됐다. 남편인 무령왕도, 부인인 무령왕비도 똑같이 죽은 지 27개월 뒤에 무덤에 묻힌 것이다.
무령왕과 왕비가 묻힌 땅(무령왕릉)이 신지(申地), 즉 서남쪽이라 했고, 왕비가 남편 곁에 묻히기 전에 일단 상례를 치른 곳이 유지(酉地), 즉 서쪽이라 했다,.
그렇다면 대체 기준점은 어디라는 것인가.
“그곳은 바로 국왕 부부가 생전에 거처했고, 정사를 펼쳤던 왕궁이었겠죠. 왕궁이라면 공산성이었겠죠.”
이한상 학예사는 공산성을 기준점으로 무령왕릉과 정지산의 방위와 각도를 재보았다. 과연 들어맞았다.
공산성에서 볼 때 서남쪽(신지)에 무령왕릉이, 서쪽(유지)에 정지산이 기막히게 걸렸다. 그렇다면 공산성-정지산 선상에 다른 후보지가 있지는 않을까. 가능성이 없었다. 그 선상에는 산과 강이 만나는 저습지만 있었다.
“결국 정지산 유적은 죽은 무령왕비의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이한 공간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해석하니 유구와 유물의 양상이 얼추 맞아 떨어졌다.
즉 해발 67m 정지산 정상부에 조성한 800평 남짓한 평탄대지에 무령왕비의 빈소가 차려졌을 것이다. 백제 조정은 이곳에서 국내외 조문객의 문상을 받았을 것이다.
초석과 적심없이 기둥만 3열로 45개 박아 조성한 기와건물 안에 무령왕비의 시신을 모셨을 것이다. 건물의 구조를 재추정하면 흙으로 된 벽체는 없었으며 밀착된 기둥사이로 공기가 통하도록 배려했을 가능성이 짙다. 내부에 세워진 4개의 기둥을 보면 건물구조가 2층일 가능성도 있으며 내부의 얕은 기둥은 평상 등의 시설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시신을 보관한 자리일 것이다. 한가지 의문점이 더 생긴다.
무령왕비의 빈전은 27개월 동안 차려졌을 가능성이 짙다. 일단 병오년(526년) 음력 12월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시신 또한 별탈없이 겨울철 한철은 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름철은 어떻게 보냈을까. 시신을 어떻게 썩지 않도록 보관했을까.
■시신을 27개월간 보존한 비결
이와 관련해서 눈에 띄는 연구가 있다.
정지산에 무령왕비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려고 조성한 빙고(氷庫)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김길식 용인대 교수는 정지산에서 확인된 괴상한 형태의 구덩이를 주목했다.
진흙덩어리가 두껍게 깔려있는 구덩이(너비 502~568㎝, 깊이 157㎝)였다. 구덩이 윗부분에는 목탄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 구덩이 모서리에 길이 480㎝, 폭 30~80㎝, 깊이 70~150㎝ 규모의 U자형 관(배수로)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관은 아래쪽으로 경사지게 연결되어 있었다. 배수로 끝에는 깊이 30~40㎝의 구덩이가 또 있었다.
김길식 교수는 여기서 고고학적인 해석을 덧붙였다.
구덩이의 상층부에 겹겹이 쌓인 진흙덩어리는 무엇인가. 고체인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생긴 끈끈한 점액질이 아닐까.
혹시 겨울철에 인근 금강의 얼음을 잘라 저장한 것은 아닐까. 그래놓고 얼음이 쉽게 녹지 않도록 짚, 솔가지 등의 보냉재와 빙탄으로 사용할 목탄을 쌓아두고는 구덩이 상부를 덮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구덩이 모서리에 아래쪽으로 경사지게 설치한 배수관은 무엇일까.
얼음이 녹으면 배수관을 통해 경사진 밑에 설치된 소형구덩이로 흘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바로 이 집수시설에 고인 찬물을 이용, 냉수·냉주와 함께 신선한 음식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혹시 이 신선한 음식을 조문객에게 접대한 것은 아닐까.
또 정지산의 저장구덩이에서 특히 외부토기가 많이 출토되는데, 이것은 조문사절이 가져온 재물을 특별히 ‘보관한’ 것은 아닐까.
■정지산엔 빙고(얼음창고)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저장한 얼음덩이를 어떻게 무령왕비 시신의 부패방지에 사용했을까.
기와건물지 한가운데는 왕비의 관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바로 그 관의 밑바닥에 빙반(氷盤)을 조성, 빙고에서 보관된 얼음덩어리를 부패방지용으로 깔아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터무니 없는 상상력일까.
그렇지는 않다.
기원전 7~5세기의 춘추시대 시가집인 <시경>은 얼음저장시설인 ‘능음(凌陰) 빙실(氷室)’의 존재를 기록해놓았다.
문헌기록 뿐 아니라 춘추시대 진나라의 능음(빙고) 유적이 산시성(陝西省) 용청(擁城)에서 확인되고 있다.
중국의 전통 예서 3종세트인 <의례>와 <예기>, <주례> 등도 “여름이면 시신 옆(혹은 밑)에 얼음을 담은 빙반을 두고, 가리개로 죽은 자를 가린다”고 했다. 또 남조시대 효무제(재위 453~464)는 462년 여름 장례식에 쓸 얼음을 저장하려고 빙실을 만들었다.
굳이 중국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부여에서는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채워둔다(其死 夏月皆氷)”(<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부여조’)는 기록이 있다.
505년(신라 지증왕 6년)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신라에 존재한 빙고가 백제에 없을 리가 없다.
따라서 정지산 유적에도 왕비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조성된 빙고(氷庫)가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7개월의 비밀
무령왕과 무령왕비는 왜 죽은 다음 곧바로 묻히지 않은 것일까.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북사> <주서> <통전> 등 중국 역사서는 백제의 장례제도에 대해 일관된 표현을 하고 있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상복을 입었고, 여타의 친척들은 장례가 끝나면 바로 상복을 벗었다”는 것이다.
그저 상복을 입고 벗는 습속만 나와있을 뿐이다. 그런데 <수서>를 보면 “백제의 상례제도는 고구려와 같다”는 표현이 보인다. 그렇다면 <수서>의 ‘고구려전’을 보자.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서 빈(殯)하고 3년이 지나 길일을 택해 매장한다. 부모와 남편의 상복은 3년, 형제는 3개월이다.”
빈(殯)의 사전적인 의미는 '죽은 이를 관에 넣는 것이며, 빈객들이 망자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죽으면 문상객을 맞이하는 빈소를 뜻한다. 대체로 죽음(상·喪)에서 장례식까지의 기간 혹은 발인할 때까지 관을 모셔놓은 공간을 일컫는다.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을 토대로 계산해보면 백제왕과 왕비의 시신이 빈전에서 문상객을 받은 기간 27개월이다. 만 3년은 아니지만 햇수로 3년이 된다.
<수서> 같은 문헌에서 언급한 3년과 무령왕릉 지석이 말한 27개월은 다른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왕과 왕비, 두 분 다 빈장 기간이 27개월로 동일하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문헌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웅진백제 시절, 백제 국왕 부부의 장례기간이 27개월이었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생기는 또하나의 궁금증이 있다. <수서>에 등장하는 고구려(백제)의 장례풍습은 ‘빈전을 집 내부(屋內)에 설치한다’는 대목이었다.
그렇다면 무령왕비의 빈전 또한 왕성 밖인 정지산이 아니라 왕성 내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일본서기>를 보면 641년 “조메이(舒明) 천황이 백제궁에서 죽자 이듬해인 642년 궁의 북쪽(宮北)에서 빈전을 차렸고, 그것을 일컬어 백제 대빈(大殯)이라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메이 천황이 백제궁에서 죽었고, 그의 시신을 안치하고 조문객들을 받았던 빈전을 ‘백제대빈’이라 한 것도 흥미롭다. 또한 그 백제대빈(빈전)이 궁의 북쪽, 즉 궁북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빈전이 <수서>의 표현대로 임종한 궁궐 내에 설치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빈전이 아니라는 반론의 제기
살펴보았듯이 정지산 유적을 무령왕비의 시신을 모시고, 조문객의 문상을 받은 ‘빈전’라고 해석한 연구자들의 견해는 문헌기록과 100% 아귀가 맞지는 않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지석내용을 토대로, 정지산 유적의 유구·유물 출토상황 등을 종합해보면 ‘정지산=무령왕비 빈전’ 설이 유력해보인다.
최근에는 ‘정지산=무령왕비 빈전’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이병호 국립미륵사지 유물전시관장은 “정지산 유적 형태는 부여 청산성 일대에서 발견된 건물지군과 유사하다”면서 “따라서 정지산 유적은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국가시설이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부여 청산성(사적 제59호)은 사비 백제 시대(538~660)인 605년(무왕 6)에 사비(부여)를 수호하려고 세운 토성이다.
그렇다면 빈전이 아니라는 것인가. 이병호 관장의 주장은 “그렇다”는 것이다. 즉 죽은 선대왕의 조문객을 맞이하려면 왕궁 안에 빈전을 모셔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지산은 왕궁에서 너무 먼 거리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기> ‘단궁상’에 나와있는 대로 빈전은 죽은 자의 저택 내부에 설치하지 정지산처럼 매장지 부근에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대왕이 죽으면 아침저녁으로 빈전에서 곡하고. 상식(上食·상가 음식)을 올리는 의례가 매일 혹은 삭망(초하루와 보름)에 진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시대 빈전 또한 후대왕이 선대왕을 모시기에 편리한 가장 가까운 곳, 즉 왕궁 내부의 어떤 장소에 설치하지 않았을까요.” 닏
일리있지만 이 또한 추론이다. 아직까지는 정설로 굳어진 ‘정지산=무령왕비 빈전’설에 대한 문제제기 형식의 반론일 뿐이다.
고고학에서는 어차피 ‘100% 정답’은 없다. 단적인 예로 타임머신을 타고 무령왕과 왕비가 훙(薨)한 1500년 전인 서기 520년대로 돌아가서 직접 목도하지 않은 한 어느 누가 정지산 유적의 실체를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문헌과 고고학자료 등을 토대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을 얻어야 한다. 향후 관련 논문이 더 발표되어 활발한 논쟁의 장을 펼칠 수 있으면 좋겠다.
■무령왕비의 빈전에서 명복을 빌었다
필자는 얼마전 가족과 함께 정지산 유적을 찾았다. 처음에는 애를 먹었다. 네비게이션에 ‘정지산 유적’을 입력시키고 차를 몰았더니 터널 입구에서 갑자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멘트와 함께 안내가 종료됐다. 당황한 필자는 두번이나 그 길을 왕복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길을 찾지 못했다.
“무령왕비님께 조문하러 가자”고 큰소리친 필자는 가족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그럴만 했다. 나중에 보니 터널 위가 바로 정지산 유적인데, 대로변에서 유적으로 들어가는 길이 없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정지산 답사를 포기하고 공산성-무령왕릉 길로 돌아가는 와중에 비로소 ‘정지산 유적’의 표지판을 찾았다.
그러나 그 길 또한 어사무사했다. 민가 사이의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지나가야 했다. 웬만한 목적의식이 없다면 찾기 어려운 길이었다. 중요한 유적이라 해서 사적(제474호)으로 지정까지 해놓고 원 이렇게 접근하기 힘들어서야…. 그렇다면 대로(백제큰길)에서 유적으로 드나드는 진입로만 만들면 될 일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오른 정지산에서 보이는 공산성이 지호지간(指呼之間)이었다.
왕궁(공산성)에서 ‘서쪽 땅(유지·酉地)’에 마련한 무령왕비의 빈전이 바로 이곳이라는 말인가. 이곳에서 27개월 조문객을 받은 무령왕비의 시신은 다시 이곳에서 지근거리이며, 왕궁을 기준으로 서남쪽(신지·申地)인 대묘(무령왕릉)에 묻혀있는 남편의 곁으로 갔다는 말인가. 필자 가족들도 1500년전 돌아가신 무령왕비의 명복을 빌었다. 필자가 조문한 곳은 정지산 터널 바로 위였다.
원래는 백제큰길을 조성하면서 정지산을 절단내려 했지만 유적보존을 위해 터널을 뚫었다. 터널을 지나면 곧바로 금강의 남북을 잇는 다리(백제큰다리)가 설치됐다. 유적 보존 때문에 공사비가 300억원 이상 더 투입되었고, 그 책임을 물어 담당공무원이 중징계 당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만약 얼렁뚱땅 유적을 깔아뭉개고 길을 뚫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백제 무령왕비의 흔적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한상, ‘발굴에서 해석까지-정지산 유적의 사례, <한국 고대사 연구의 자료와 해석(노태돈 교수 정년기념논총 2)>, 사계절, 2014
‘백제의 상장의례와 고대 동아시아’, <충청학과 충청문화> 19집, 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14
김길식, ‘고대의 빙고와 상장례’, <한국고고학보> 47권, 한국고고학회, 2002
‘한국고대의 묘제변화와 상장례, 용인대, 2005
이병호, ‘백제왕실의 조상제사 변천에 대한 시론’, <동아시아 종묘와 무덤제사의 비교고고학> 학술대회,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추지단·성림문화재연구원 공동주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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