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년(1608년) 이후 잡채상서니 침채정승이니 하는 말들이 세상에 나돌았다. 이는 잡채나 침채를 상납해서 총애를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1566~1628)의 <상촌집>에는 ‘잡채상서(雜菜尙書)’니, ‘침채정승(沈菜政丞)’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임금인 광해군에게 채소모듬음식인 잡채와 침채, 즉 김치를 뇌물로 상납해서 장관(상서) 혹은 재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김치가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가 인상 쓰면서 먹은 김치
김치의 원형이 절임채소라면 공자도 김치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진나라의 여불위가 펴낸 <여씨춘추> ‘우합(遇合)’조에 그 사연이 등장한다.
“주나라 문왕이 창포저를 매우 좋아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얼굴을 찌푸려가며 (창포저를) 먹었는데 3년이 지난 후에야 익숙해졌다.(文王嗜昌蒲菹 孔子聞而服之 縮알而食之 三年 然後勝之)”(<여씨춘추> ‘우합·遇合’)
이 기록은 무엇을 두가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주 문왕은 공자가 존경에 마지않았던 성군의 표상이었다. 아이돌 스타의 모든 것을 따라하는 ‘사생팬’ 처럼 공자는 역사기록으로만 접한 문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다. 그러다 “문왕이 창포저를 좋아했다(文王嗜昌蒲菹)”(<한비자> ‘세난’)는 고사를 듣고는 ‘따라쟁이’가 된 것이다.
창포저는 말 그대로 창포라는 식물을 절인 김치(菹)를 가리킨다. 김치는 예부터 채소류로 만든 절임음식인 저(菹) 혹은 저채류로 일컬어졌다. 빨간 고추와 젓갈에 버무린 요즘의 배추김치를 연상하면 안된다.
아무튼 공자는 처음에는 신맛이 강한 창포김치에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적응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돌’인 문왕이 좋아했던 음식이라니 어쩔 수 없이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 뒤 3년이 지나자 겨우 적응할 수 있었고….
■제사로 올린 중국 김치
채소절임(김치)의 통칭인 저(菹)는 제사음식의 의미가 강했다.
주나라 시대의 시를 모아 공자가 펴낸 <시경>에는 “밭 안에…오이가 있으니 이것을 벗겨 저채로 만들어 조상에게 바친다.(中田有廬 疆場有瓜 是剝是菹 獻之皇祖)”는 내용이 있다.
전한시기에 편찬된 백과사전 <석명>은 “저(菹)는 막는(阻) 것인데, 발효시켜서(釀) 차지도 덥지도 않은 곳(寒溫之間)에 두어 물러지지 않게 한(不得爛)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시말하면 ‘저’는 발효라는 방법을 써서 상하거나 물러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저장음식이다.
그렇다면 <시경>의 표현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부터 조상을 위한 제사에 저장음식인 오이김치를 올렸다는 뜻이 된다.
■사람을 포떠서 절이는 형벌
그런데 이 ‘절인 채소음식’이라는 의미의 저(菹)가 끔찍한 용도로 쓰인 적도 있다.
‘사람을 죽여 소금에 절여서 육장을 만드는 극형’을 바로 저(菹)라 했다. 폭군의 대명사인 은(상)나라 주왕(기원전 1075~1046)이 이 천인공노할 형벌을 사용했다.
“은나라 주왕의 신하인 구후가 아름다운 자신의 딸을 임금에게 바쳤다. 그런데 구후의 딸이 주왕의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그 딸을 죽이고, 아버지인 구후마저 죽여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또다른 재상인 악후가 만류하자 악후 또한 죽여 포를 떠서 소금에 절여 젓을 담갔다. 그리곤 그것을 제후들에게 보내 맛보게 했다.”(<사기> ‘은본기’)
이러한 저형은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후한의 역사가 반고(기원후 32~92)가 쓴 <한서>는 ‘죄인을 얇게 저며서 소금에 절여 죽이는 저(菹)’는 경(경·얼굴에 먹물새기기)과 의(의·코베기), 사지절단(斬左右趾), 머리 매달기(梟首) 등 5대 형벌 중에서도 최악의 극형이라고 했다.(‘형법지’)
■가는 길이 달랐던 중국과 한국의 김치
각설하고 중국에서 기원을 둔 절임채소는 한반도의 김치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중국인들은 강한 신맛을 내는 초산의 발효에 기초한 채소절임을 좋아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젖산발효를 지향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초산은 알코올을 분해하는 초산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젖산에 비해 강한 신맛을 지닌다. 국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젖산은 당분을 분해하는 젖산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분해산물로 은은하고 달콤한 신맛에 가깝기 때문에 짠맛을 적게 하면 국물까지도 음용이 가능하다.
이러다보니 중국의 초산발효 식품은 조미료의 역할에 머물렀다. 강한 신맛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젖산발효 저체류, 즉 김치는 밥과 더불어 먹을 수 있는 반찬의 몫까지 수행했다.
여기에 염도를 낮추고, 보존성을 높이는 향신재료의 유입에 적극 대처하면서 고추와 같은 매혹적인 외래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우리만의 김치문화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오랑캐를 젓담근 김칫독 전설
한반도에서 언제부터 이른바 절임음식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직접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고구려인들은 발효음식(혹은 술)을 만드는 데 뛰어나다”(<삼국지> ‘위서·동이전)는 등의 기록을 토대로 삼국시대부터 절임문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전설은 있다. 충북 보은 법주사 경내의 거대한 돌항아리(충북 유형문화재 204호) 전설이 그렇다.
720년(신라 성덕왕 19년) 3000명의 승려들이 먹을 김치를 보관하는 김칫독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덕유산 장수사를 방문한 조선 중기의 문신 노진(1518~1578)의 문집에도 삼국시대의 김칫독 전설이 나온다.
487년(소지왕 9년) 각연 스님이 창건한 장수사에 1자(30.3㎝) 깊이로 오목하게 파인 동그란 바위가 있는데, 그 이름이 침채옹(沈菜甕·김칫독)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이다.
“승려 각연은 이 바위 안에 채소를 쌓아 오래두어 김치로 만들어 스스로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옥계집>)
성대중(1732~1809)의 문집(<청성잡기>)에는 김칫독과 관련해서 차마 웃지못할 전설이 소개돼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오랑캐 두 놈이 신풍 장씨의 서자 집 마당에 뛰어들었다. 배가 고팠던 두 오랑캐는 땅에 묻어둔 김칫독에서 김치를 허겁지겁 배불리 먹고는 갈증이 나자 동치미를 담은 독을 찾았다. 마침내 동치미 김칫독을 찾아냈지만 국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던 탓에 퍼낼 수가 없었다. 두 오랑캐는 손을 땅에 짚고 머리를 독 속에 넣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 시원하고 새콤한 맛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신풍 장씨의 서자가 ‘이때다’ 하면서 달려사 두 오랑캐를 독 안으로 밀어넣었다. 두 오랑캐는 독 속에 거꾸로 쳐박혀 그대로 젓이 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 서자가 젓이 된 두 오랑캐의 귀를 잘라 바치자 조정은 상급으로 벼슬을 내렸다.”
중국 은(상)과 진한 시대의 ‘저형’, 즉 생사람의 포를 떠서 절이는 극형을 연상시키는, 다소 끔찍한 일화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조선의 김치와 동치미가 청나라 ‘오랑캐’의 입맛을 매혹시킬만큼 맛있다는 웃지못할 이야기이다.
■김치의 어원은 딤채?
김치류를 가리키는 용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용례는 물론 한자어인 저(菹)였다.
그런데 고려말부터 ‘침채(沈菜)’라는 또 다른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목은 이색(1328~1396)은 유구(1335~1398)가 보내준 음식을 보고 읊은 시의 제목이 ‘유구가 우엉과 파와 무를 섞어 담근 침채장을 보내다’였다. 우엉과 파, 무를 섞어 장을 침채원(채소를 절일 때 쓰는 소금과 젓갈류)으로 하여 만든 채소절임을 의미한다. 물론 간장을 이용한 물김치 형태인지, 된장에 박은 장아찌 형태인지는 알 수는 없다.
조선시대 들어 ‘침채’는 ‘저’ 다음으로 사용빈도가 높았다. ‘침채’는 조선시대에 ‘팀채’로 발음됐는데, 이것이 딤채→짐채를 거쳐 지금의 김치로 변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정설처럼 여겨졌다. 1527년(중종 22년) 최세진의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는 한자어 저(菹)를 ‘딤채’라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원래 ‘딤채’는 고유 한국어였으며, 이것을 한자어의 음과 뜻을 빌려 ‘침채(沈菜)’라 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침채’라는 한자어가 김치라는 우리말로 변한 건지, 아니면 원래 존재했던 ‘딤채’라는 고유 우리 말을 한자어인 ‘침채’로 표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김장 김치의 시원
한반도의 김장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덕유산 장수사와 속리산 법주사의 김칫독 전설이 사실이라면 김장문화의 뿌리는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공식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의 시(‘가포육영·家圃六詠’)에서 처음 보인다.
“(제철무에) 장을 곁들이면 한여름에 먹기 좋고(得醬尤宜三夏食)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넘긴다.(漬鹽堪備九冬支).”(<동국이상국집>)
여말선초의 문신학자인 권근(1352~1409)의 <양촌집> ‘김장(蓄菜)’이라는 시에도 등장한다.
“시월이라 거센 바람 새벽 서리 내리니, 울에 가꾼 채소 거두어들였네. 맛있게 김장 담가 겨울에 대비하니(須將旨蓄禦冬乏) 진수 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조선 중후기 인물인 조찬한(1572~1631)과 김수증(1624~1701)의 시를 보면 김장문화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때가 다급해지니 씻어둔 순무채로 겨울 지낼 김장김치 만들어가지고 온다.(擬作經冬旨蓄來).”(조찬한의 <현주집>)
“집집마다 김장은 연중행사, 가을이 깊어 무를 밭에서 캐다(蘿복秋深採野田).”(김수증의 <곡운집>)
종합하면 음력 10월이면 집집마다 김장을 하며(권근·김수증)이며, 김장할 시기를 넘길까봐 걱정하고,(조찬한) 진수성찬 없이도 김장김치(무)만 있으면(권근) 기나긴 겨울을 지낼 수 있다(이규보)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겠다.
■김치에 배추는 없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 중기까지 옛 선현의 시를 가만히 살펴보면 김장김치에 ‘배추’가 잘 보이지 않는다.
주로 오이와 무, 가지 등이 김치의 재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최초의 김장김치 기록인 이규보의 시(‘가포육영’)에서 등장하는 ‘소금에 절인 순무’는 장아찌 형태의 김치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말 이색의 시(‘즉사·卽事’)를 보면 ‘오이로 만든 장김치’, 즉 오이장아찌가 나온다.(<목은시고>)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무청, 순무, 나복(무의 일종), 가지, 오이 등으로 모두 침저(김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청장관전서>)고 했다. 이밖에도 고사리싹과, 생강뿌리, 두릅, 전복, 상추, 콩나물 등을 이용한 다양한 김치가 존재했다.
■김치를 독초로 알고 주방장을 때린 군수
이중 산갓김치는 조선시대 최고의 별미김치로 알려졌다. 산갓은 잎이 숟가락같이 생겼다고 숟가락냉이라고도 한다. 톡 쏘는 맛이 갓을 닮아 산에서 나는 갓이라는 뜻으로 산갓이라고 한다. 뿌리잎으로 물김치를 담그면 매콤하고 톡 쏘는 맛이 나서 개운하다.
1611년 허균(1569~1618)이 조선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정리한 <도문대작>에 이 산갓김치(山芥菹)가 포함되어 있다.
정칙(1601~1663)의 문집(<우천집>)을 보면 경북 영천의 군수에게 산갓김치를 뇌물로 제공했다는 일화가 있다.
“영천지방 군수가 부임하자 주방장이 산중에서 산갓을 구해 김치로 만들었다. 겨울철 무김치의 국물맛만 익숙하던 군수는 먹는 법을 몰랐다. 급히 먹으니 매운 향이 코를 찔러 재채기를 하다가 어지러워 넘어졌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그러자 군수는 독초를 올렸다고 주방관리를 매로 다스렸다. 독특한 맛으로 아첨하려다가 오히려 큰 노여움을 샀다.”
신임 영천군수는 귀한 음식을 몰라봤지만 대다수 문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유순(1441~1517)은 생육신 중 한사람인 성담수(?~1456)에게 산갓김치를 보내며 한껏 ‘산갓김치 예찬론’을 펼친다.
“금세 기특한 향내를 발하는데 한번 맛보자 눈썹을 찡그리고, 두번 씹자 눈물이 글썽, 맵고 달콤한 그 맛은 계피와 생강을 깔보니…매양 미칠듯 좋아하니 어머니가…한 광주리 보내셨네.…이 맛 혼자 맛보기 아까와…군자의 집에 보내니 바라건대 그 집을 마시면서….”(<속동문선>)
■뇌물김치의 정체는?
산갓김치 외에도 조선시대에 귀한 선물로 여겨진 것이 바로 자하(새우류)를 이용해서 만든 감동젓무김치다. 이 김치는 곤쟁이젓김치라고도 하는데, 이 이유가 있다.
‘곤쟁’, 혹은 ‘곤정’은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숙청한 남곤(1471~1527)과 심정(1471~1531)을 싸잡아 일컫는 말이다,
자하의 속명이 ‘곤쟁이’라는 점을 이용해 시중에서 남곤과 심정을 비하한 표현으로도 쓰였다. 이 자하젓, 즉 곤쟁이젓으로 만든 무김치가 워낙 귀하고 맛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선물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감동한다고 해서 ‘감동젓무김치’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일컬어졌다. 그렇다면 이 글의 첫번째 인용문, 즉 광해군에게서 정승자리를 얻었다는 ‘침채정승’이 뇌물로 바친 김치의 종류는 무엇이었을까. 정신이 퍼뜩날 정도로 맵고 상큼하고 쌉싸름한 산갓김치였을까, 혹은 감동의 맛을 선사한 곤쟁이젓무김치였까.
■‘마님의 살결은 흰떡, 계집종은 묵은 김치’
그렇다면 배추김치는 언제부터 담갔을까. 조선 전기에도 배추를 이용한 절임음식은 있었다.
서거정(1420~1488)의 시(‘촌주팔영’)에 ‘배추김치(숭제·숭제)’가 등장한다.
“서풍이 늦가을 배추 향기를 솔솔 불어오자, 항아리에 김치 담아라 색깔이 한창 노랗네.(瓦甕鹽제色政黃)”(<사가시집>)
서거정의 또다른 글에는 본부인의 살결을 ‘흰떡’에, 여자 종을 떡에 곁들인 ‘신김치’로 비유하는 ‘아재개그’가 보인다. 즉 서거정은 묵은 김치를 강희맹(1424~1483)에게 보내며 알쏭달쏭한 시 한수를 곁들인다.
“늙은 아내가 먹으라고 권하는 이 묵은 김치를 자네에게 보내네. 원래 흰떡과 묵은 김치는 미혹되는 법이네(白餠黃菜故應迷).”
그런데 서거정이 이 시의 뒤에 달아놓은 각주가 요절복통이다.
“옛날 한 늙은이가 계집종의 방에 쳐들어갔다. 계집종은 ‘마님의 부드러운 살결이 흰떡 같은데, 어찌 이 추악한 계집종을 훔치려 하느냐’고 묻자 이 늙은이가 대답했다. ‘원래 흰떡(白餠)에 묵은 김치(黃菜)를 곁들이면 더욱 좋은 거야.’ 그래서 세간에서는 계집종을 ‘묵은 김치’라 하는 것이네.”
요즘이라면 서거정은 ‘여성을 흰떡과 묵은 김치에 비유한 무개념남’으로 SNS 상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서거정이 표현한 ‘숭제’라는 표현이 정말로 배추김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양념으로 쓰인 ‘배추나물’인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 함축적인 시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진위를 가릴 수는 없다. 하지만 서거정의 시에서 ‘항아리에 담은 배추가 발효되어 노랗게 변했다’는 내용은 심상치않다.
배추나물이라기 보다는 채소절임, 즉 김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속 꽉찬 배추김치는 19세기 중반부터?
물론 조선초기에는 배추가 김치의 원료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따끔씩 사용했던 김치 역시 지금처럼 속이 찬 이른바 결구형이 아니었다. 이런 배추라도 김장용 김치에 사용했다는 첫 공식기록은 17세기 인물인 김수증(1624~1701)의 문집(<곡운집>)에서 발견된다. 즉 “무와 배추로 김치를 만들어 양지바른 곳에 묻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1830~60년대 무렵이 되어서야 속이 찬 결구성 포합형 배추가 조선의 땅에서 안정적으로 자라기 시작한 것 같다.
“가을배추 살쪄 희고 연한 것이 비계같고(秋숭肥白軟如脂)…주름진 금색 넓은 잎 흐드러진 은색 줄기(추金闊葉爛銀苞)….”(<두실존고> ‘잡영추고’)
이미 심상규(1766~1838)의 시에 ‘희고 연하고 살찐 배추가 주름진 넓은 잎을 자랑한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조선 말기의 인물인 곽종석(1846~1919)의 시(<면우집>)에도 “이슬 내린 밭에 천통을 묶어 고르게 세웠고, 주름진 누런 심엽 기쁘게 층층히 나왔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속이 꽉찬 배추가 튼실하게 자라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19세기 말 기록으로 추정되는 <언문후생록>에서는 ‘석박김치 담그는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통배추의 양념은 조기젓국, 조기, 낙지, 소라, 생굴, 전복, 생강, 마늘, 실고추, 청각 등을 잘게 썰어 배추 입속에 겹겹이 넣고 갓을 양념으로 넣어 담그라.”
■고추에 열광한 조선
김치에 양념고추는 언제부터 넣었을까. 남미 원산지인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전후’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김치에 고추를 이용한 최초의 기록은 <증보산림경제>(1766년)였다.
그런데 최근 한 연구자(박채린 세계김치연구소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가 조선시대 문집 250권을 뒤져본 결과 <증보산림경제>보다 최소한 50~100년은 앞선 기록이 존재했음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17세기 중반~18세기 초반의 인물인 이서우(1633~1709년)의 시(‘영채’).
“만가(고추)가 빨갛게 익으면(蠻茄紅熟時) 매운 고추 생강을 뒤따른다.(辛辣椒薑遜) 들에서 익은 채소, 창자를 붙잡는다….”(<송파집>)
이서우의 다른 시(‘끽채·喫菜)’에도 등장한다. “고추를 항아리 속 채소와 섞으니 김치는 맛이 있다(椒和瓮菜寒菹美)”(<송파집>)는 것이다.
고추가 향신양념인 생강을 대신해서 식용으로 사용됐다는 증거가 된다. 비슷한 시기의 문인인 김창업(1658~1721)의 시에도 고추가 김치의 재료로 사용된 내용이 담겨 있다.(<노가재집> ‘야초’)
“밭 고추가 울타리에 나서 떨어졌는데, 열매 또한 향기롭네. 김치에 넣으니 부드럽고 맛은 시원해지네. <식경>에 나와있지 않은 것이 원망스럽네.(野椒生籬落 有實亦芬馨入菹助脆爽 恨不著食經)”
■일본으로 역수출된 조선고추
김창업의 언급처럼 고추는 동양의 음식경전인 <식경>에 등장하지 않은 작물이다. 그 외래종이 조선인의 입맛을 단숨에 ‘휩쓸어 버렸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조선의 문인 학자 김려(1766~1821)는 고추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외래종인데도, 어느새 조선인이 가장 사랑하는 품종으로 거듭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고추는 사계절에 이바지하고 이로움이 푸성귀 중 으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한 품종이니(東俗盛種) 이것이 왜채인지 의심스럽다.(疑是倭菜)”(김려의 <담정유고>)
김려는 특히 “고추를 따니…겨울김치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언급함으로써 고추를 김치양념으로 썼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고추가 김치와 고추소박이장조림, 그리고 고추장 등 조선음식의 재료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추의 연한줄기와 잎을 채소로 만들어 김치를 만들면 맛좋다. 푸르고 어린 열매를 속을 제거하고 저민고기로 채워 달인 청장에 넣으면 맛있는 반찬이 된다. 가루로 만들어 장을 담그면 일명 초장이다. 순창군 및 천안군의 것은 우리나라 으뜸이다. 그 열매를 겨울에 액을 짜면 채소가 맑고 담백해진다. 근간에 우리나라 고추는 왜관에서 상품을 거래되는데, 그 이익이 쏠쏠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들어온 고추가 점점 유행해서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안될”(今爲日用恒饌) 정도로 조선인들은 고추에 빠르게 중독되었다.
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은 “고추가 김치와 고추소박이장조림, 고추장 등 여러가지 조선 음식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들어온 고추가 토착화에 성공해서 다시 왜관을 통해 역수출되고 있다는 대목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김칫독은 조선인의 자존심
조미료나 혹은 제삿상에만 올려졌던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의 김치는 신분이나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에서 사랑받던 음식이었다.
“쟁반에 오직 김치만 있고(飯饌有沈菜) 상위엔 소금만 올려놓았네.(床排只海鹽)… 젓가락 끝이 매우 청렴하네.(下筋太廉織).”(<매월당시집> ‘명주일록’)
생육신 중 한 사람인 김시습(1435~1495)의 시처럼 김치는 가난하지만 청렴한 선비의 소박한 삶을 상징하는 반찬이었다. 조선 중기의 시인인 권필(1569~1612)은 아예 “가난한 선비의 반찬은 김치로 충분하다.(貧儒食籍是寒菹)”고 했다.(<석주별집>)
찢어지게 빈한한 선비의 집을 표현할 때는 ‘집에 장항아리와 김칫독만 있었다.’(박윤원의 <근재집>) ‘부엌 시렁에 얹어둔 것은 김치밖에 없었다.’(홍언필의 <묵재집>)는 따위의 표현이 등장했다.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김치와 김칫독은 있었다는 것이었다. 김치는 조선인의 삶에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남곤과 심정의 ‘곤쟁이 젓감치’
최근 젓갈김치의 시원을 200년이나 앞당기는 연구성과가 발표되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조리서(<주초침저방·酒醋沈菹方>)의 필사시기가 조선전기인 15~16세기이며, 그 안에 감동젓갈로 담그는 ‘감동저’와 동아로 만든 새우젓 김치인 ‘동과백하해교침서’의 레시피가 포함돼있다는 것이었다. 감동저는 앞서 인용한 남곤과 심정의 기묘사화(1519년·중종 14년) 사연이 담긴 곤쟁이젓무김치를 뜻한다.
연구자들(박채린 세계김치연구소 박사와 백두현 경북대 교수)은 <주초침저방>에 실린 조리법 중 15~16세기에 쓰였던 세글자 병서자(‘ㅴ’와 ‘ㅵ’)이 포함된 점을 근거로 필사 시기를 확정했다. 이 연구는 김정국(1485~1541)의 <사재집>에 실려있던 ‘감동젓’ 즉 ‘곤쟁이 젓’으로 만든 젓갈김치 일화의 결정적인 근거
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젓갈김치의 확실한 기록은 ‘증보산림경제’(1766년)에 실린 ‘새우젓오이김치’와 ‘소문사설’(1700년대)에 실린 무김치였다.
젓갈김치는 고추의 도입과 함께 더욱 발전해나갔다. 고추가 비린 맛을 가려주면서 감미의 효과까지 내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아들인 정학유(1786~1855)의 <농가월령가>를 한번 곱씹어보자.
“시월은 맹동이라 입동 소설 절기로다.…무 배추 캐어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정히 씻어 염담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곁에 중두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가가 짓고 짚에 까 싶이 묻고 박이 무우 알암말도 얼잖게 간수하소.”
■군침도는 김장철
바야흐로 김장철이다.
예전에는 서울시내에서도 김장 한 번 한다 싶으면 200~300포기는 너끈하게 했고, 이것이 집안의 큰 일이었다. 지금도 김장날 구수한 김치된장국과, 빨간 양념을 노르스름한 배추속에 싸서 뜨거운 밥과 함께 먹었고, 혹시 운이 좋으면 삶은 돼지고기도 맛볼 수 있었던 어릴 적 생각이 떠오른다. 새삼 군침이 돈다.
“김장 무김치는 맛있고 밥그릇 쌀은 풍년이다.”(박윤묵의 <존재집>)
“흰 밥에 푸른 김치 풍미가 넉넉하다.”(이만수의 <극원유고>)
조선전기의 인물인 유순(1441~1517)의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산갓김치~매양 미친듯이 좋아하니(每遇喜欲狂) 어머니께서 그런 줄을 아시고(慈母知其然) 정성스레 한 광주리 부치셨네.(殷勤寄一筐)”(<속동문선>)
‘엄마’가 자식 먹으라 정성스럽게 보내주신 김치의 맛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리라.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기사는 '박채린의 <조선시대 김치의 탄생>, 민속원, 2013년'을 주로 참고해서 작성했습니다.)
<참고자료>
박채린, <조선시대 김치의 탄생>, 민속원. 2013
박채린 권용민 등, '주초침저방에 수록된 조선 전기 김치 제법 연구-현전 최초 젓갈김치 기록 내용과 가 치를 중심으로',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32권 5호, 한국식생활문화학회, 2017
이철호 안보선, '김치에 대한 무넌적 고찰-김치의 제조역사', <한국식생활문화학지> 10권 4호, 한국식생활문화학회, 1995
세계김치연구소, <김치속에 숨은 과학가 문화-똑똑한 김치를 찾아서>, 세계김치연구소, 2015
세계김치연구소, <김치와 김장문화의 인문학적 이해>, '세계김치연구소 김치학 총서 1' , 세계김치연구소, 20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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