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t트럭 100대 분량의 흙을 물체질로 걸러낸 끈기와 집중력의 개가….
얼마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 해자와 그 주변의 고환경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실감:월성 해자’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경주 신라월성연구센터(숭문대) 전시동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요.
월성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판 물도랑 혹은 연못)에서 출토된 동물 유체는 물론이고요.
작은 씨앗과 미세한 꽃가루 같은 식물자료까지 학제간 연구를 통해 분석해서 당대(5세기)의 환경을 복원해낸 건데요.
복사나무(복숭아나무), 잣나무, 가시연꽃, 밀 등의 식물과 각종 곡식이 자라나는 공간을 배경으로 개, 돼지, 곰이 뛰노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방영하고 있답니다. 그런 영상을 만들어내기까지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1㎜ 씨앗도 물체질과 현미경으로 걸러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활약하는 고고학자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발굴구간(가로 155m×세로 34)에 쌓인 점토흙 1.1m를 파내 일일이 물체질하는 고달픈 작업이었습니다. 이중 물체질한 흙의 양이 25t 덤프트럭 100대분(2200㎥)에 달했다네요.
스릴감 넘치고, 또 낭만적이기까지 한 고고학자(인디아나 존스)가 아니라 실망하셨나요. 그러나 이렇게 앉아 잘 보이지도 않는 유물 조각 한 점 한 점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는 것 또한 고고학도의 몫입니다.
그래도 다행이었습니다. 발굴구간이 해자였던 덕분에 수분이 많아 유기물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거든요. 산소가 일정하게 접촉되는 환경이어서 쉽게 썩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나 점토 퇴적층이라 작은 씨앗 등 그 속의 미세한 유기체를 구별하기가 어려웠죠. 그래서 그물 간격이 0.5㎜에 불과한 체로 걸려내는 작업을 반복해서 미세유기물을 찾아낸거고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점토를 물에 풀어 놓은 다음 가라앉는 것은 골라내고 물에 뜨는 것은 일일이 핀셋으로 찝어냈습니다.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는 유기물은 현미경으로 골라냈죠. 크기가 1㎜도 안되는 오동나무 씨앗도 찾았고요. 1600년전의 규조물(식물성 플랑크톤) 등도 걸러냈습니다. 성질 급한 저같은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씨앗 및 열매 70여종과 규조물(식물성 플랑크톤) 및 꽃가루 등과, 그때까지 확인된 해자 구조물을 토대로 1600년전 월성해자와 그 주변의 식생과 경관을 복원한 겁니다. 복원결과를 볼까요.
■1600년전 월성의 사계
우선 1600년전 해자는 나무기둥을 1.5m 간격으로 세우고 그 사이를 판재로 연결한 형태로 조성됐습니다.
찾아낸 씨앗 및 열매는 2만여점이 출토된 가시연꽃씨를 비롯해 머루, 버찌, 자두, 복숭아, 가래 등이었습니다. 또 느티나무, 느릅나무, 참나무, 소나무 꽃가루도 확인했죠.
이런 유기물을 토대로 1600년전 신라 수도 ‘경주의 사계’를 돌아볼까요.
봄은 분홍색, 흰색으로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 복사나무, 자두나무, 벚나무류로 수놓았을 겁니다. 또 요즘 경주가 봄철만 되면 벚꽃으로 물드는데요. 해자에서 ‘버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경주 벚나무는 1600년 전에도 꽃을 피었던 것 같네요.
여름철은 어떨까요. 해자의 물속~물가에 푸른 잎을 띄우고, 꽃을 피우는 여러 수생식물이 무성하게 자랐을 겁니다.
가시연꽃이 가장 큰 군락을 이뤘을 거구요. 개연꽃, 마름, 붕어마름 등이 자생했을 겁니다.
가을에는 붉은 빛과 노란 빛으로 물든 느티나무·느릅나무 숲이 눈에 띄었을 것 같습니다.
겨울철은 어떨까요. 소나무와 같은 사철나무가 눈에 덮여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해자에서 출토된 미세한 규조류와 꽃가루 분석을 통해 주변의 풍경도 어렴풋 그릴 수 있습니다.
해자에서 떨어진 주변 구릉이나 산지는 소나무와 참나무류의 숲으로 이루어졌을 겁니다.
■아기돼지, 곰, 터번 쓴 흙인형
1600년전 월성 해자 주변의 ‘사계’를 복원했다면 당시 사람들의 삶도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있습니다. 해자에서는 궁궐 사람들이 식용 혹은 관상용으로 키웠거나 길렀던 동식물의 흔적이 다수 확인됐거든요.
식물로는 벼·밀·조·콩 등의 곡식류, 박·외류 등의 채소류, 가래·개암 같은 견과류, 복숭아·자두·머루와 같은 과실류 등이 나왔어요. 또 맷돼지류·말·개·소·사슴류 등 동물뼈가 다량 나왔는데요. 바다사자뼈와 상어척추뼈, 곰뼈도 보였습니다.
이중 30% 정도가 맷돼지류였고, 또 그중에서도 6개월에서 1년 정도 키운 돼지가 40%(26개체)였습니다.
어린 돼지의 경우 골절된 후 뼈가 붙어가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사람의 치료를 받았다는 얘기죠. 신라인들이 5세기부터 안정적으로 돼지를 사육하고 관리했다는 증거겠죠. 동물뼈 가운데는 고기를 얻기 위해 해체한 부위가 보였습니다.
곰뼈(반달가슴곰 추정)가 15점 이상 나왔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각급 군대의 지휘관 깃대에 ‘곰의 뺨가죽과 가슴가죽, 팔가죽 등으로 만든 장식’을 단다”(‘잡지·무관조’)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추정이 가능합니다. 곰가죽으로 각급 지휘관들의 장식을 제작하는 공방이 월성 근처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갖가지 유물 가운데 “유의미한 한가지를 골라보라”고 하면 역시 터번을 쓴 토우(흙인형)입니다.
눈이 유난히 깊은 이 토우는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습니다. 팔 부분의 소매가 좁은 카프탄을 입고 있는데요. 당나라에서 호복(胡服)으로 통하던 소그드인(중앙아시아 페르시아계 유목민)의 복장 같습니다.
소그드인은 일찍이 동서교역에 종사하여 상술에 능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데요. 경주에서는 상당수 페르시아계 유물들이 보입니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인 경주까지 동서양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주는 지표 유물이죠.
■사람제사의 살풍경
그러나 2014년 이후 세인의 이목을 독차지한 월성의 발굴성과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제사(인신공희·人身供犧)’의 흔적이었습니다. 본격발굴이 진행되던 2017년 서성문터 인접한 지점에서 나란히 누운 남녀 인골 2구가 노출되었습니다.
이게 심상치 않았습니다. 왜냐면 인골 노출지점이 성벽을 쌓기 위해 단단히 다진 맨밑바닥층(기초부)이었거든요.
남성은 정면을 향해 가지런히 누웠고요. 여성은 얼굴을 돌려 남성 인골을 바라본 채 바르게 누운 자세를 각각 취하고 있었습니다. 여성은 왜 이 남성을 바라보았을까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남성은 신장 166cm, 여성은 신장 153.6cm 정도로 측정됐습니다. 두 분 다 50대로 추정됐고요.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출토 유물의 위계도 높지 않았고요.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4년 뒤인 2021년 남녀 인골에서 북동쪽으로 50㎝ 정도 떨어진 곳에서 또 1구의 인골이 노출됐습니다.
왜소한 체구(키 135㎝ 정도)의 주인공은 10살 전후의 어린아이로 추정됐습니다. 발굴단이 하나하나 검토해나갔는데요. 50대 남녀와 10살 전후 어린이의 묻힌 양상이 흡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착안점이 있었습니다. 노출된 인골들이 성벽을 높이 쌓기 전에 땅을 다진 바닥층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인골들은 성벽의 진행 방향을 따라 중심토루의 가장자리에 맞춰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시굴·발굴 자료를 들춰보던 발굴단원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1984~85년(3구)과 1990년(최소 20구)에도 이 부근에서 23구 가량의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는 겁니다. 불과 5~10m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즉 이 부근의 성벽을 쌓을 때 최소한 26명의 사람제사가 자행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축성 과정에서 안전을 기원하고, 견고한 성의 완성을 바라면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월성벽은 통곡의 현장?
제가 이번에 ‘실감:월성 해자’ 전시회 기사 준비하면서 잠깐 섬뜩해졌는데요.
즉 1600년전 월성 해자 주변의 사계를 상상하면서 약간은 감상에 빠져있었거든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싸’해졌습니다. 그렇게 감상에 젖을 때인가, 바로 곁에서 성벽을 쌓을 때 죄없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오히려 희생자들의 통곡이 울려퍼진 참상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뭐 이런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발굴자에게 물어봤더니 그래도 동시대는 아니라는군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대략 5세기(1600년 전)를 중심 연대로 삼아 복원·재현한거고요. 사람제사가 자행된 시대는 4세기 중엽(35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는군요.
50~150년 정도의 시차가 나는거죠. 시대가 겹치지 않는게 그나마 위안거리는 되는데요.
물론 지금의 잣대로 1600~1700년 전을 평가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죄없는 생목숨을 줄줄이 죽여 묻는 풍습은 지극히 야만적이라는 딱지를 붙일만 합니다.
■사기행각으로 일본인 귀화자의 집을 빼앗은 탈해
2014년부터 시작된 월성 발굴은 크게 세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요.
월성 내부는 2050년 이후까지 장기 조사가 진행되고 있고요. 성벽은 서성벽(2015~2021)에 이어 남성벽(2021~2024)까지 조사중입니다. 해자는 발굴은 물론 복원 정비까지 다 끝나서(2015~2022) 이번에 전시회를 하게 된 거고요.
이 기회에 제가 ‘월성’과, ‘월성발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요점만 간단히 일별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무엇보다 월성의 주인을 두고 분쟁을 벌인 일화가 흥미롭습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종합해볼까요.
4대 임금인 탈해왕(재위 57~80)이 어릴 적에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를 보고 흠뻑 빠졌답니다. 그 봉우리에 터를 잡고 산 이는 왜국 출신인 호공이라는 인물이었죠. 어린 탈해는 앙큼한 계략을 썼습니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옆에 묻어 두고 “조상 때부터 우리 집이었는데 (호공이) 빼앗았다”고 주장했어요. 날벼락을 맞은 호공이 “무슨 소리냐”고 기막혀 했는데요.
탈해가 생떼를 쓰자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재판관이 탈해에게 “당신 집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요. 탈해는 “우리는 대장장 가문인데, 땅을 파보면 그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죠. 호공은 꼼짝없이 집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탈해가 사기행각으로 일본인 출신(호공)으로부터 이 초승달 모양의 땅을 수중에 넣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101년 탈해왕의 뒤를 이은 파사왕(80~112)이 이곳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본기·파사왕’조)고 했습니다. 박씨(파사왕)가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에 석씨(탈해)의 ‘초승달 모양의 땅’, 즉 월성을 차지해버린 거죠.
즉 월성의 소유권을 두고 치열한 토지분쟁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월성이 ‘노른자 땅’이었다는 뜻이죠.
파사왕이 차지한 월성은 경주 시내 남쪽을 흐르는 ‘남천(문천)’을 끼고 축조됐는데요.
■금단의 땅이 된 월성
월성(둘레 2340m) 내부 조사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착안점이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조사결과 7개층의 문화층이 보였는데요. 그런데 유독 고려시대의 유구·유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우도 영조 연간(1735) 쌓은 석빙고만이 남아있죠. 신라 멸망 이후 장구한 세월동안 월성터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었다는 뜻이죠. 멸망 후 1000년 왕국의 궁성터는 금단의 땅으로 터부시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곳은 101년 초축 이후 834년간이나 신라의 궁성이었죠. 땅 밑에 무려 7개의 문화층이 존재할만큼….
지금까지의 월성 발굴에서는 17개동의 건물터와 11만 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출토 유물 중에 특히 한 건물터에서 120여점이나 쏟아져나온 벼루가 주목을 끕니다. 공을 상당히 들여 제작한 것도 더러 보이지만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실용적인 벼루가 대다수입니다. 또 내부에 먹이 묻어있거나 장기간 사용으로 인하여 면이 매끈하게 닳은 사례도 확인됩니다. 이 건물은 궁궐 내에서도 공무를 수행한 관청이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벼루와 만파식적
향후 월성 내부 발굴에서 왕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외국 사신을 맞이한 정전(조원전) 같은 중심 건물이 확인되면 대박이겠죠. 그중에서도 조사단원들의 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천존고’의 발굴입니다.
‘천존고’는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등장하는데요. 신라의 보물인 만파식적을 보관한 창고입니다.
만파식적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데요. 신문왕(681~692)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했다고 했는데요.
<삼국유사>는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고 했습니다. ‘모든 풍파가 사라지는 피리’라 해서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하고 국보로 삼았는데요.
만약 천존고가 발굴되고 더욱이 ‘만파식적’이 나온다면 세상이 뒤집어지겠죠.
월성 내부의 발굴은 ‘2050년+α’로 예정되어 있어요. 장기발굴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신라’라는 국호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이라는 구절(<삼국사기> ‘신라본기·지증왕’조)에서 따왔죠.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국가의 기틀을 쌓았지만 마침내 ‘삼한일통’의 위업을 쌓았죠. <삼국사기>는 “880년(헌강왕 6) 왕이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자 서울 백성의 기와집이 서로 이어져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했죠.
그런 신라 천년 역사(정확하게는 834년)를 담당했던 궁성(월성)을 발굴한다는데 쉽게 끝나겠습니다. 불과 80여년간(710~794년) 도성이었던 일본 헤이조쿄(平城京) 유적도 50~100년을 목표로 장기발굴을 벌이고 있거든요.
물론 발굴자체가 유적 파괴라는 말이 있어요. 하지만 이미 손을 댄 이상 50년이 아니라 100년, 아니 200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신라 천년 역사의 전모를 구명해나가기 바랍니다.(이 기사를 위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권택장 학예연구실장, 장기명 학예연구사, 전경효 주무관, 안소현 특별연구원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한성백제박물관, <한성에서 만나는 신라 월성>(특별전 도록), 2019
국립경주박물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신라왕궁 월성>(특별전 도록), 2017
장기명, ‘월성해자의 조사성과와 고환경 연구와의 접점’, <신라문화> 58호, 동국대신라문화연구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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