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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미토콘드리아 이브'와 중국문명

 ‘중국문명의 시원(始原)을 랴오허문명[발해연안문명]으로 간주하는 선양[심양ㆍ瀋陽] 랴오닝성박물관 첫 번째 전시실에는 “도전하와학설(挑戰夏娃學說)”이라는 흥미로운 글이 내걸려 있다. 그렇다면 “도전 하와학설”이란 무엇인가? 우선 중국인들의 호기 있는 도전에 관해 들여다보기 전에 우선 “하와학설”에 관해 알아보자. 

흑인 아담과 이브의 출현을 그린 <뉴스위크>의 표지

■이브 학설

  “하와(夏娃)”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이브(Eve)”와 같은 인물로서, “하와학설”은 미토콘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구 학계의 “이브학설(The Eve of Theory)”을 말한다.
1987년 버클리의 유전학자 앨런 윌슨과 레베카 칸, 마크 스톤킹은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60억 인류의 조상은 지금부터 약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어느 여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현생인류의 조상을 “15만 년 전(처음에는 20만 년 전이었으나 나중에 교정되었다.) 아프리카에 살던 자매인 두 여성”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이 여인의 후손 가운데 일부가 약 10만 년 전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학설이다. 이 연구결과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학계를 비롯해 지식인층에서는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흑인 이브가 흑인 아담에게 사과를 주는 다소 냉소적인 그림을 싣기도 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상황은 변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학설’을 뒷받침하는 결과가 계속 나오면서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정설로 굳어졌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인은 원시 호모사피엔스(아프리카)에서, 아시아인은 호모에렉투스(아시아)에서, 유럽인은 네안데르탈인(유럽)에서 진화했다는 “다지역기원론(多地域起源論)”은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중화주의를 신주 모시듯 하는 중국으로서는 “하와학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학계에서는 1923년 베이징 남쪽 저우커우뎬[주구점ㆍ周口店]에서 발견된 베이징원인[북경원인 . 北京原人] 즉, 50만 년 전의 호모에렉투스가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중국학계의 주장이 힘을 잃어갈 즈음에 랴오둥반도에서 진뉴산인[금우산인ㆍ金牛山人]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진뉴산은 1984년 랴오닝성 잉커우셴[영구현ㆍ營口縣] 서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발해만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섬 같은 산(해발 69.3미터)이다. 

 28만 년 전 젊은 여성의 인골이 확인된 랴오닝성 잉커우셴 진뉴산 유적 현장. 

원래 이 동굴은 1940년대에 일본인 학자 시카마 도키오(鹿間時夫)가 처음 조사했고 1974년부터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와 베이징대 고고학계, 그리고 랴오닝성박물관 등이 지속적으로 발굴에 나섰다.

  그러던 1984년 진뉴산 동굴 A지점(높이 13.21미터, 폭 8.8미터)을 발굴하던 베이징대 발굴단이 8번째 층에서 동물화석편과 구석기시대 유물을 비롯해 완전한 형태의 인골화석을 발굴한다. 학자들은 이 인골을 분석한 끝에 28만 년 전에 살았던 20~22세의 젊은 여인이라고 추정했다. 이 진뉴산인이 살았던 시기는 베이징원인시기의 저우커우뎬 제1지점문화와 비슷하다.

 
   ■진뉴산인의 출현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1993년부터 1994년 사이에 진뉴산에서는 중국학계를 더욱 흥분시키는 발굴결과가 나왔다. 원시적 형태의 아궁이와 그 주변에서 불에 탄 것으로 보이는 동물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공기가 잘 통해야 불이 잘 일어나잖아요. 공기가 잘 통하도록 돌을 이용해 아궁이를 만든 것 같고 동물을 불에 익혀 먹은 흔적이 보입니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 
   궈다순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진뉴산인의 두개골과 상지골, 그리고 불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등을 종합해 진뉴산인이 같은 시기의 베이징원인보다 발달한 인류였다고 보았다. 중국학계는 더 나아가 진뉴산인의 존재를 인류 진화의 큰 과정으로 설명했다. 진뉴산인을 호모에렉투스와 호모사피엔스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이끈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학계가 “도전 하와학설”이라는 문구를 걸어 놓고 “미토콘드리아 이브”라는 세계학계의 정설에 도전한 이유는 명확하다. 중국문명의 원류는 발해만에서 탄생한 랴오허문명[발해연안문명]이며, 그 랴오허문명의 기원은 28만 년 전 아시아 동북지역에 살았던 진뉴산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뉴산인 복원화석이 전시된 랴오닝성 박물관

 중국의 저명한 고인류학자인 자란포[가란파ㆍ賈蘭坡]는 “베이징원인이 살고 있을 당시에 베이징원인보다 진보적인 특징을 가진, 즉 원시 부엌까지 갖춘 진뉴산인이 있었다.”고 하면서 “진뉴산인을 호모에렉투스(直立人ㆍ200만 년 전)와 호모사피엔스(智人ㆍ20만~5만 년 전)의 사이, 즉 초기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이끌었다.”고 평가해 놓고 있다
   한마디로 ‘중화민족’의 원류를 28만 년 전 발해만에서 찾은 것이다.
 「랴오허 문명전」은 또한 약 25만 년 전 인류화석인 먀오허우산인(묘후산인ㆍ廟後山人)에도 주목하고 있다. 먀오허우산은 랴오둥 산간지역인 번시스(본계시ㆍ本溪市)에 있다.  

 

한반도 구석기 유적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진 먀오허우산 유적

  ■진뉴산인의 후예들 
  먀오허우산에서는 직립원인 단계인 견치 화석과 이보다 한 단계 뒤인 고인류의 어금니 화석 등이 확인됐다.
  특히 전시실 설명서에는 먀오허우산인이 화베이(화북ㆍ華北)지구의 커허(암하ㆍ암河)-딩춘(정촌ㆍ丁村) 대석기(大石器) 문화는 물론,「한반도의 구석기 문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해놓고 있다. 한반도와 인접한 랴오둥 반도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런 해석을 했다.    또한 랴오시 카줘셴(객좌현ㆍ喀左縣) 다링허(대릉하ㆍ大凌河) 유역에서 확인된 7만 년 전의 거쯔둥(합자동ㆍ합子洞) 유적과, 랴오둥에서 발견된 4만~1만8000년 전의 샤오구산(소고산ㆍ小孤山) 유적도 소개했다. 특히나 샤오구산 유적은 고인류가 아닌 현생인류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끈다. 랴오닝성 박물관은 이렇게 진뉴산인(28만 년 전)과 먀오허우산인(25만 년 전), 거쯔둥인(7만 년 전), 샤오구산인(4만 년 전) 등을 이른바「랴오허 문명전」의 첫번째 전시실로 꾸몄다.
  궈다순은 랴오시 구릉과 랴오둥 산간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전기ㆍ중기ㆍ후기 유적이 두루 출토되고 있으므로 고인류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발굴자료를 근거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학설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탈출했다는 현생인류가 아닌, 28만 년 전 고인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만약 중국인들이 진뉴산인을 중국민족의 원류로 본다면 그것은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이며 지나친 중화주의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검토하면 고인류와 현생인류 간에는 어떤 유전자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배기동 한양대교수) 

발해연안문명권 주요구석기유적본포도.  

  ■고인류와 현생인류

  고인류는 요즘 사람들의 조상이 될 수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뉴산인이나 먀오허우산인 같은 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을 ‘민족의 원류이거나 뿌리’라고 여기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훗날 문명의 젖줄이 된 발해만 유역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구석기시대 유적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배기동 교수는 “국경이 없던 시절이던 구석기시대인 만큼 발해만을 비롯해 한반도와 만주까지 같은 구석기시대 문화영역이었다.”고 하면서 “우리 학계의 연구도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발해연안까지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랴오허문명전’ 전시실이 랴오둥 산간지역인 번시스에서 발굴된 직립원인 단계의 먀오허우산인을 설명하면서 “조선반도(한반도)의 구석기시대 문화와 관련성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표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먀오허우산 유적의 보고자는 “라오둥 반도와 한반도는 산수(山水)가 연결되었으며, 초기인류문화의 교류 또한 매우 밀접했을 것이므로 지대한 관심을 불어 모으고 있다”고 기록해놓았다. 이 유적에서 나온 석기들이 한반도 임진강변에서 확인된 전곡리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의 제작수법과 같은 계통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곡리 유적을 전기구석기 시대(약 27만 년 전)로 판정한 데스몬드 클라크 교수. 그 옆은 고(故) 김원룡 교수.  

 

 ■전곡리인의 출생 

 사실 베이징원인과 진뉴산인이 살았을 무렵, 한반도 전곡리전곡리 현무암지대와, 퇴적층에서 확인된 일본 기카이 투주라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에 대한 연대측정 결과 전곡리 유적이 처음 생성된 것은 35만 년 전으로 드러났다.
  같은 곳에서도 고인류는 살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 검은모루동굴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화석(룡곡인)이 나온 것을 비롯해, 이미 70곳이 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됐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봤듯이 발해만 유역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도 10곳이 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형구 교수는 “예컨대 룡곡 1호 동굴유적의 경우 구석기시대는 물론 신석기시대 인류화석도 나왔다.”고 하면서 “이것은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1만년 전쯤까지 한반도에 살다가 물러나고 북방에서 내려온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른바 ‘북방전래설’ 같은 학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