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필자는 경향신문 탐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동북방과 러시아 일대를 23박24일동안 탐사했습니다. 이름하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였습니다. 한국 언론사상 처음 있는 역사대탐험이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바이칼호-울란우데-훌룬부이르-하일라얼-오룬춘-건허-하얼빈-선양-츠펑-링위안-차오양까지. 까마득한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더듬어보았습니다. 한반도, 아니 한반도 남부에 갇혀있는 역사를 이제는 넓은 시야로 바라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우리 역사는 결코 한반도에서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녀와서 이미 단행본으로도 출간했습니다. 성안당에서 출간한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008년)입니다. 블로그를 보는 분들을 위해 당시의 연재물을 프롤로그서부터 소개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랴오허[요하ㆍ遼河]유역은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며 다민족ㆍ다문화의 교류지였다.”(랴오닝성박물관 랴오허문명전 전시실 입구 소개문)
“중국문명은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의 결합으로 완성됐다.”(궈다순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 연구원)
“유적과 유물이 어쩌면 이렇게 우리 것과 같은지 모르겠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1980년을 전후로 중국 고고학계는 한족 중심의 세계관을 뒤흔들 만큼 충격적인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면서 정신적 공황에 빠진다. 지금까지 ‘중국문명은 황허문명’이라는 중화주의를 고수해 왔지만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낱 오랑캐[동이·東夷]의 영역으로 폄훼했던 발해만(渤海灣) 일대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서는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으니 말이다.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소병기, 蘇秉琦] 쑤빙치(蘇秉琦ㆍ1909~1999년)는 중국고고학계 태두이다. 1952~1982년 베이징대 역사계 고고전업을 창설한 교수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중국고고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다민족 통합국가인 중국의 고민을 고고학의 측면에서 이른바 ‘중화문화 6대 지역’을 ‘고고학문화구계론(考古學文化區系論)’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지금까지 오랑캐의 영역으로 간주했던 지역에서 중원문명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문화적으로 앞서는 증거들이 잇따라 발굴되자, 그는 중원중심의 일원일체론을 탈피해 각각의 문화구에서 발전한 문화가 하나로 융합하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이른바 다원일체론을 주장했다. 얼핏 각각의 문화구가 이뤄낸 문화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뤄진 문명이나 문화를 중국 역사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며 통일된 중국의 단결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기존 중원문화보다 앞서는 이민족 색채의 훙산문화가 발굴되었을 때도, 중국 동북의 훙산문화와 중원의 양사오문화가 극적으로 만나 위대한 중화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는 “동이의 랴오허문명과 한족의 황허문명이 조화를 이뤘으며, 여기에 남방ㆍ서북문화가 중원으로 모여 오늘날의 중국문명이 완성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문명을 일원일체에서 다원일체의 문명으로 바꿔 해석한 것이다.
중국인들의 ‘용 신앙’이 중원이 아니라 다링허[대릉하 . 大凌河] 상류의 동이족 본거지에서, 그것도 BC5600년에 만들어진 차하이[사해, 査海]유적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 형태로 확인된 것도 충격이었다. 또한 차하이유적과 동시대(BC6200~BC5200년)인 싱룽와[흥륭와, 興隆窪]유적에서는 요즘의 전원주택단지와 같은 취락유적이 발견되었다. 이에 중국인들은 차하이유적과 싱룽와유적을 각각 ‘중화(中華) 제1촌(차하이)’ 및 ‘중화시조의 취락(싱룽와)’이라고 명명했다.
이 차하이ㆍ싱룽와문화는 BC4500부터 시작해 BC3000년까지 이어진 훙산[紅山]문화의 원형이었다. 랴오닝성 차오양[조양ㆍ朝陽] 젠핑[건평ㆍ建平]과 링위엔[능원ㆍ凌源] 양 현의 경계에 걸쳐있는 뉴허량[우하량, 牛河梁]유적은 무덤과 제단, 신전(여신묘) 등 고대사회의 3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츠펑[적봉ㆍ赤峰] 싼줘뎬[삼좌점ㆍ三座店]을 비롯해, BC2000부터 BC1200년까지 ‘샤자뎬[하가점ㆍ夏家店]하층문화’를 꽃피웠던 청쯔산[성자산ㆍ城子山]에서는 대규모 석성과 돌무덤떼, 제단,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이는 싼줘뎬과 청쯔산문화를 이끌었던
집단이 고국(古國)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쑤빙치는 “훙산문화와 샤자뎬하층문화, 진(秦)ㆍ연(燕)의 문화는 고국(古國ㆍ훙산문화)-방국(邦國ㆍ샤자뎬하층문화)-제국(帝國ㆍ진나라 및 연나라)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것은 중국문명과 국가형성의 기원형태를 단적으로 알려준다.”고 보았다.
지금은 중국의 영토에 속해 있지만 동이족의 문명의 흔적이 분명한 발굴 성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되자 발해연안문명권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국내 학계에서도 관심이 고조되었다. 국경이 없던 시절 꽃피었던 찬란한 문명의 흔적들을 현재의 영토에 근거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중국의 한족 중심 세계관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봇물 터지듯 솟아 나왔다. 이에 이형구 교수를 비롯해 전문가들로 구성된 탐사단이 다링허ㆍ랴오허 일대와 싼줘뎬 석성을 본격적으로 탐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여정에서 탐사단은 청쯔산, 싱룽와유적, 차오마오산[초모산ㆍ草帽山] 제사유적 등 전문가들의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궁벽한 곳에 놓여 있는 유적들까지 만났다. 비록 지금은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만 탐사단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차하이ㆍ싱룽와유적에서 고개를 내민 ‘갈지(之)자ㆍ사람인(人)자 빗살무늬토기’는 우리 신석기시대 문화의 전형적인 유물이 아닌가. 또한 영생불멸의 상징인 옥결(玉玦ㆍ한 쪽이 트인 옥 귀고리)은 차하이ㆍ싱룽와 유적부터 훙산문화까지 도배하다시피 등장했다. 이런 옥결은 한반도 동해안 고성 문암리(BC6000년)에서도 나왔으며,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석관묘, 석실분, 적석총 등의 돌무덤은 우리 민족의 고유 묘제다.
훙산문화의 대표유적인 뉴허량에서는 수장(首長)의 것으로 보이는 큰 적석총과 27개의 석관묘가 발굴되었다. 이 양식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로, 그리고 고구려·백제의 적석총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뉴허량유적 바로 곁에 있는 지름 100미터나 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도 이번에 직접 보았다.
또한 뉴허량유적에는 조상신과 하늘에 제사지낸 원형 제단이 있었고, 인근 구릉에서는 지모신 신앙의 상징인 여신묘와 여신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여신상은 랴오허를 거쳐 랴오둥[요동ㆍ遼東]반도와 한반도에서도 두루 나타난다.
싼줘뎬에서 확인된 대규모 석성. 확인된 치(稚)만 13개나 된다. 샤자뎬 하층문화(고조선 시기)의 석성으로 관심을 모은다.
BC2000부터 BC120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츠펑 싼줘뎬 석성은 확인된 치(雉ㆍ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만 1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축조기법이 고구려 산성이나 백제 산성 등의 축성 양식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 석성은 고조선 시기의 산성과도 연계시킬 수 있지 않울까 추측된다. 이 석성유적은 지난해 발굴이 끝난 것으로 이번에 우리 학계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밖에 싼줘뎬과 청쯔산에서 확인한 석성과 제사유구, 주거지 등을 본 이형구 교수는 “어쩌면 이렇게 우리 고유의 축성술과 같은지 모르겠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싼줘뎬 석성은 확인된 치(雉 .성의 돌출 부분)만 13개나 되는 견고한 석성이었다. 청쯔산 역시 ‘고국(古國)이 존재했던 곳’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그렇다면 샤자뎬하층문화에 속하는 이 유적들을 경영하며 그 영역을 지배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형구 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을 운반할 동원력이라면 권력을 갖춘 국가단계의 큰 사회였을 것”이라면서 중원 하나라와 같은 시기에 동이족 국가단계의 큰 사회조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아예 “고조선 유적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이렇게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랴오허문명을 어떻게 요리하고 있을까? 훙산문화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쉬쯔펑[서자봉ㆍ徐子峰] 츠펑대 교수는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문화였고, 랴오허문명은 신권 중심의 복합문화였다.”라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확실하게 정리했다. 다만 랴오허문명과 황허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쉬쯔펑 교수는 “동이계의 대표인 치우(蚩尤)와 중원의 황제(黃帝)가 싸웠다는 기록이 있지 않느냐.”면서 “이것이 바로 문명의 충돌이자 문명의 습합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학계는 결국 문명의 서곡을 연 주체는 동이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랴오허문명 역시 (중국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한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못 박고 있다. 선양박물관의 ‘랴오허문명’ 특별전을 보면 그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실 입구엔 ‘랴오허유역은 고대문명 발상지’라는 서문을 걸어놓고 있으며, 전시실 한 쪽에는 ‘훙산문화와 오제(五帝)전설’을 설명하는 도표와 그래픽을 전시했다. 훙산문화와 양사오[앙소ㆍ仰韶]문화, 그리고 다원커우[대문구ㆍ大汶口]문화, 량주[량저ㆍ良渚]문화의 상호연관성을 관람객들이 알아보기 쉽게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훙산문화의 주체를 중국인들이 중화민족의 시조로 떠받드는 ‘황제집단’이라고 못 박아 둔 것이다. 도표에는 “훙산문화로 대표되는 황제집단의 활동범위는 연산남북지구”라고 적혀있다. 그래픽에는 훙산문화가 중원의 양사오문화를 대표하는 신농씨의 화족집단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학계는 훙산문화를 포함한 랴오허문명을 동이족의 문명이라고 하고, 관람객들에게는 훙산문화의 주체를 ‘황제집단’이라고 ‘교육홍보’하는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다.
“랴오허문명이 중국문명의 기원”인 이상 중국의 목표는 확실하다. 중국은 1990년대 이후 ‘하 상 주 단대공정’을 실시해 하나라의 건국연대를 BC2070년으로 확정함으로써 전설상의 왕조를 역사시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4대 인류문명의 발상지에 속하는 황허문명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BC3000년)에 비해 여전히 1,000년가량 뒤쳐져 있었다. 5,000년 중국 역사라고 선전해 왔지만 1,000년이 부족했던 것이다. 중국은 이제 ‘랴오허문명’으로 ‘전설상의 5제시대’를 역사시대로 끌어 올린 것이다. 쉬쯔펑 교수의 말은 중국의 향후 과제를 대변해 주고 있다.
뉴허량 유적에서 확인된 무인상(巫人) 옥제품(맨 위)과 여신상(두번째), 곰형 옥제품(3번째), 마지막 사진은 은(상)나라 시대 갑골.
중국정부와 학계는 “이 1,000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올해부터 ‘중화문명 탐원공정’을 시작했다. 우리는 철학, 문학, 과학, 종교 등 모든 학문을 동원해서 이 ‘잃어버린 1,000년’을 복원하는 작업을 벌일 것이다. 훙산문화 연구가 그 가운데 하나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궈다순[곽대순ㆍ郭大順]의 말처럼 ‘랴오허문명’은 고대문화의 생장점이자 다민족문화의 거대한 멜팅포트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등 우리 민족은 물론 선비, 거란, 말갈 등 서로 피를 나눴거나 이웃으로 지냈던 동이족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무대였다. 그리고 그 무대는 랴오허유역뿐만 아니라 중국의 산둥반도와 허베이성[河北省], 네이멍구[내몽고ㆍ內蒙古]자치구 동남부,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남부, 지린성은 물론 한반도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랴오허문명’이라는 이름은 너무 한정적이고 중국 중심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교수는 “지중해문명이 서양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여명(黎明)을 연 문명은 중국문명은 물론 만주 지방과 한반도,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랴오허문명은 발해연안문명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학계도 “상나라 이전의 문화는 발해만에 있다(先商文化在渤海灣).”(궈다순)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따라서 중국 중심의 ‘랴오허문명’이라는 용어의 폐기와 함께 ‘발해연안문명’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사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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