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중국 역사에서 13개 왕조가 도읍지로 정한 낙양을 방문했습니다. 강남문화원 답사팀과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소림사도, 용문석굴도, 백양사도 아니었습니다. 북망산 인근의, 옥수수 수확을 막 끝낸 들판을 찾아 헤맸습니다.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제멋대로 자란 나무가 듬성듬성한 봉분 3개였습니다. 농가 가건물에 강아지까지 묶여서 짖어대던 곳에 있던 봉분 3개의 주인공은 바로 연남생, 연헌성, 연비 등 연개소문 후손들의 무덤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비석이 출토됐고, 지난 2005년에 정확한 무덤의 위치를 찾았지만 지금은 그냥 방치된 채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답사단은 왜 이 초라한 무덤, 아니 민족반역자 연남생 일가의 무덤을 찾았을까요, 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민족반역자 연남생의 무덤을 찾은 이유는’입니다.
“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거든 낙양성을 보라.(欲問古今興廢事 請君只看洛陽城)”
<자치통감>을 쓴 북송 사마광의 언급에서 읽을 수 있듯 뤄양(낙양·洛陽)은 ‘파란만장한’ 중국 역사의 축소판이다.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주나라(서주)가 기원전 770년 도읍을 옮겨옴으로써 뤄양의 우여곡절 역사가 시작된다. ‘동주(東周)’는 곧 제후들이 천자를 윽박지르며 다툰 춘추전국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출발이 심상치 않았던 탓일까. 13개 왕조의 도읍이 된 뤄양은 주로 격동기의 드라마틱한 역사를 웅변해준다. 동주-동한-위-서진-북위-후량-후당-후진 등 명멸한 왕조의 면면을 보라. 난세엔 영웅호걸이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삼국지>의 주인공들인 조조와 유비, 손권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묻혔는지를 ‘낙양엔 소가 누울 자리도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높아봐야 해발 300m에 불과한 북망산(北邙山)은 ‘망자의 천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살기좋은)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에 살다가 북망산에 묻히는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꼽았다. 북망산이 2000㎞나 떨어진 우리네 여염의 뒷산처럼 친숙하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민요 <성주풀이>를 보라. 왜 우리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은 몇몇이며 절세가인은 몇몇이냐…’를 구슬프게 읊조리게 되었을까.
■처음 찾은 배신자의 무덤
필자는 지난해 10월 갖가지 상념을 안고 강남문화원 답사단과 함께 뤄양의 한적한 농촌을 찾았다. 유명한 용문석굴도, 백마사도, 소림사도 아니었다. 옥수수 추수를 막 끝낸 북망산 인근 뤄양의 멍진현(孟津縣) 쑹좡진(送庄鎭) 둥산터우촌(東山頭村) 들판을 찾아 헤맸다. 한 30분간 긴 외줄을 그리며 헤매던 답사단의 시선 저편에 잡풀과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란 야트막한 지형이 걸렸다. 최병식 강남문화원장이 “봉분이 3개의 모양이니 이곳이 맞는 것 같다”고 소리쳤다.
그랬다. 2005년 발견된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634~679)과 남생의 둘째아들 헌성(650~692), 그리고 남생의 증손자인 비(708~729)의 무덤이었다. 이곳저곳 무너졌으니 깔끔한 ‘비주얼’은 아니었다. 오히려 흉물스러웠다. 변변한 팻말마저 없었다. 다 쓰러져가는 농가가 역시 다 쓰러져가는 무덤을 힘겹게 호위하고 있었다. 그대로 방치하면 시골 마을까지 불어닥친 개발붐에 언제 사라질지 모를 판이었다. 답사단 누군가가 “우리 정부라도 나서 무덤을 보존해야 하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누가 저 연남생을 위한 진혼가를 부를 수 있겠는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배신자의 가문 무덤 앞에서….
일찍이 연개소문은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목해야 한다. 절대 다투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연개소문은 아들 3형제의 반목을 예견했던 것이다.
665년(고구려 보장왕 24년)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인 남생이 대막지리 자리를 물려받아 국정을 총괄했다. 그러나 남생이 국정을 두 동생인 남건과 남산에게 맡기고 지방순찰에 나선 것이 파국을 불렀다. 형제 간 반목을 부추기던 불온 세력의 올가미에 걸렸다. 남생과 남건·남산이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반란을 일으킨 두 동생은 남생의 맏아들 헌충을 죽였다. 이때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남생은 국내성에서 재기를 노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둘째아들 헌성을 비롯해 3번이나 당나라에 항복사절을 보내 원군을 청한 것이다. 남생이 이끌던 국내성 등 6개성 10여 만 호가 투항하고 말았다.(666년)
■연남생의 죄
연남생은 고구려 멸망의 선봉에 섰다. 662년 사수대첩에서 고구려군에 대패한 뒤 고구려 정벌의 계획을 포기했던 당나라로서는 천군만마였다. 당나라의 가언충이 황제(고종)에게 “연남생 덕분에 이번 전쟁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예전에는 고구려에게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생 때문에 고구려의 내부사정을 다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삼국사기> 보장왕조)
실제로 남생은 668년 9월 평양성 전투에서 또 다른 배신자인 승려 신성과 내통함으로써 고구려 멸망을 촉진시켰다. 고구려의 숨통을 끊은 자가 바로 남생이었던 것이다.
“남생은 계략을 꾸며 승려 신성과 평양성 안팎에서 내통했다. 이로써 평양성이 저절로 함락되자 보장왕과 남건은 포로가 됐으며….”(<천남생 묘지문>)
마지막 순간까지 평양성을 지키다 포로로 잡힌 남건은 전향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아 형을 배신자로 만든 죄인이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겠냐”고 형제간 골육상쟁을 후회했다. 남건은 결국 원지로 유배됐다. 하지만 남생은 떵떵거렸다. 그 덕분에 골치아픈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 고종은 대대적인 전승축하연을 베풀고 우위대장군 번국공이란 높은 벼슬을 내렸다. 식읍 3000호도 주었다. 당 고종은 황제 호위군으로 무기를 들고 황제를 보위할 수 있는 특권도 내렸다.
■연남생에서 천남생으로 창씨개명
남생의 더욱 씻을 수 없는 죄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앞장서서 막았다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가열찬 독립운동을 펼쳤다. 멸망 직후인 669년 ‘고려의 배반자들이 많아 황제의 칙명으로 3만8200호를 여러 주로 이주시켰다’(<자치통감>)는 기사가 보일 정도다. 당나라는 남생을 고구려인의 집단이주지역은 요서 지역에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조직적으로 진압했다. 그의 창씨개명도 주목거리다. 당나라 창업주인 고조(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해 연(淵)씨를 천(泉)씨로 개명한 것이다. 물이 솟는 못(淵)과 샘(泉)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679년 연남생이 46살로 죽자 당나라 조정은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황제가 친히 나서 곡(哭)을 했으며, 5품 이상의 관리들도 모두 곡을 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의 죽음을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이라 했다. 황제는 연남생의 묘를 북망산에 두도록 했고,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했다. 그것이 바로 1922년 이곳에서 발견된 천(연)남생의 묘지석이다. 아마 죽어서도 연남생, 아니 천남생은 황제의 배려심에 몸둘 바를 몰라 했을 것이다.
“공(남생)은 고구려를 떠나 태평한 나라(당)로 귀순했다. 668년 고구려 정벌을 책임지고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처럼 내쳐서 평양성에 다다라~높은 성벽의 성가퀴를 깨뜨렸다. 그 공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가 갑자기 죽으니 황제의 슬픔이 진실로 깊었다.”(<천남생 묘지문>)
■그래도 그들은 반역자였다
나라를 배반한 남생은 당나라의 충견이 되어 한평생 잘 먹고 잘 산 것이다. 1926년 발견된 아들 헌성의 묘지문도 마찬가지였다. “헌성은 돌궐 정벌의 선봉에 섰고, 또 모반사건을 진압한 공로로 측천무후로부터 비단 100단과 황제가 타던 말 1필을 하사 받았다”는 내용을 담았다. 남생·헌성 부자는 몰랐을 것이다. 한때는 가문의 자랑이었을 묘지문이 훗날 명명백백한 배신의 진술서로 영원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줄은…. 물론 남생에게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고구려 멸망의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 보장왕도, 둘째형 남건과 함께 평양성을 지키던 막내 남산도 휘하의 수령 88명과 함께 막판에 당나라에 투항했다. 남산의 무덤 또한 이곳 남생의 묘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역시 투항 이후 “금허리띠를 차고 황실의 번역관 일을 하면서 음악에 심취한채 호의호식했다”고 한다.
어디 고구려 뿐인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비롯해 대신·장군 88명과 백성 1만2807명도 이역만리 중국땅에 인질로 잡혔다.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던 흑치상지도 당나라에 투항한 뒤 돌궐·토번족 토벌의 선봉에 섰다. 의자왕은 두 달 만에 죽었지만 부여융은 당나라의 주구가 되어 백제부흥운동을 저지하는 악역을 맡았다. 의자왕과 부여융, 흑치상지 역시 북망산 인근 어디엔가 묻혀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연남생의 죄에는 미치지 못한다. 당나라에 투항한 것도 모자라 선봉에 서서 ‘바람처럼 달려 번개같이 내쳐’ 700년 고구려의 사직을 끝났으며, 또 그것도 모자라 부흥운동까지 철저하게 틀어막았으니 말이다.
남생은 아마도 천년 만년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 달콤한 꿈을 꿨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승승장구했던 아들 헌성은 측천무후 때의 간신 래준신의 모함에 걸려 죽고 말았다. 무엇보다 역사가의 엄정한 평가를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김부식은 이렇게 평했다.
“남생·헌성이 비록 당나라 황실에 알려진 신하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역자가 됨을 면할 수는 없다.”(<삼국사기> ‘연개소문전’)
하염없이 무너지고 방치된 연남생 일가의 무덤곁을 떠나 걸어나왔다. 새삼 들판의 흙을 만져본다. 못난 지도자를 만나 이역만리까지 끌려온 고구려·백제 백성의 백골도 뤄양의 진토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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