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등장하는 설화다. 서동이 경주 시내에 동요를 퍼뜨려 평소 연모했던 공주를 얻은 뒤 익산에 공주를 위한 절(미륵사)를 지었다는 설화를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2009년 1월 이 철석같은 믿음이 깨졌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절을 세운 이는 좌평(16관등 중 첫번째)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라고 새긴 사리봉안기를 발견한 것이다.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가 절의 주인공이라면 <삼국유사> 내용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얘기다. 역사고고학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안타깝지만 ‘선화공주=가공인물’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미륵사가 3개의 절을 합친 구조라는 점을 착안한 색다른 주장도 제기됐다. 동·서의 절은 백제 출신인 사택왕후가, 가운데 절은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것이다. 요컨대 선화공주와 사택왕후는 무왕의 두 부인이었다는 주장이었다. 관심의 초점은 지금까지 무왕과 선화공주의 부부묘로 알려진 익산 쌍릉으로 옮겨갔다.
이 쌍릉에서 최근 또 한 번 학계를 ‘멘붕’에 빠뜨릴 발굴결과가 나왔다. 쌍릉 중에서도 무왕묘로 추정된 대왕묘에서 20~40대 성인 여성의 치아 4점이 확인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이 “정확히 7년 전 ‘가공인물’로 폄훼되어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던 선화공주가 부활한 것이 아니냐”며 흥분할 법도 하다.
그러나 낙관은 금물이다. 선화공주가 쌍릉 가운데 대왕묘의 주인공이라면 소왕묘에 묻인 이는 누구인가. 다시 한 번 치열한 토론의 장터가 열려야 할 것 같다. 학계는 애간장이 녹는다. 선화공주는 허구인가, 실재인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가 묻는다. '선화공주님 대체 어디 계십니까.' 이기환 기자가 예전에 썼던 두 꼭지의 글을 참고로 올린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서동은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다~”고 시작되는 설화는 누구나 다 아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다.
그리고 전북 익산시 금마면은 오래 전부터 서동(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의 신(新)수도 구상에 따른 천도였거나 혹은 별도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던 곳이다.
해체 복원되기 전의 미륵사 서탑 광경.
쌍릉은 무왕부부의 무덤?
반경 5㎞ 이내에 그걸 뒷받침할 만한 유적들이 집중돼 있다. 무왕 때 조성된 미륵사(彌勒寺)는 비록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삼국 최대의 가람을 갖추었던 곳.
또한 주변의 익산토성과 제석사지는 물론 무왕과 선화공주의 부부묘로 전해지는 익산쌍릉(益山雙陵) 등 많은 백제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지명이 왕궁리(王宮里)라는 점도 심상치 않은 대목.
우선 익산쌍릉이 무왕부부의 묘일 가능성은 1915년 도굴된 이 무덤이 일본인에 의해 조사됨으로써 제기됐다. 즉 무덤내부의 구조가 부여 능산리에 있는 백제왕들의 무덤구조와 같고, 따라서 무덤은 왕릉급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즉 판석을 다듬어 만든 널길까지 갖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내부에는 목제 관을 안치했다.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내에 있던 목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훗날 무령왕릉의 목관은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졌는데, 익산 쌍릉의 목관 역시 일본산 고야마키(コウヤマキ·일본에서만 사는 침엽수)이다.
이렇게 쌍릉의 목관이 백제의 왕실에서 행해진 장례전통(일본산 목재를 쓴 것)을 따랐다고 볼 때 왕릉급일 수밖에 없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사실 옛부터 왕궁리 유적은 고조선의 준왕이 해로를 따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설, 후백제 견훤 도읍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고구려 왕족인 안승과 그 유민들을 위해 세운 보덕국(報德國)의 수도라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그러나 백제무왕의 별도(別都)이나 천도설을 능가할만한 견해는 없었다.
5층 석탑을 두고 벌어진 논쟁
무왕의 천도·별도설과 관련, 또 하나 주목을 끈 건 왕궁리 5층 석탑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탑은 백제시대의 탑인 익산 미륵사탑과 부여 정림사 5층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한국미술사학의 태두 고유섭이 “이 탑은 백제양식을 고려적(的)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석탑”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고려의 탑’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1965년. 이 왕궁리 5층 석탑(보물 44호)의 해체 복원을 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2월5일 기대하지 않았던 탑의 사리장치(舍利藏置)와 그에 따른 장엄구(莊嚴具)들이 발견됐다.
사리공은 모두 2개였다. 한 곳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사리내함 안에 녹색유리제품의 완벽한 사리병이 들어있었다. 특히 다른 사리공에서 금동제의 내함 속에 글자판 19개에 금강경을 새긴 순금의 경판이 순금 띠로 묶인 채 발견됐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발굴유물이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계속 터졌다. 5일 뒤인 10일에는 건축물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심초석(心礎石)에서도 사리장엄구가 확인됐다.
더구나 심초석에 마련된 사리공은 ‘품(品)자’형으로 3개의 사리공을 갖췄다. 그 중 하나의 사리공에서 광배(光背)와 대좌를 갖춘 금동여래입상 1점과 금동방울 1점이 확인됐다.
이 사리장엄구가 어느 시대의 것이며, 과연 석탑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느냐는 것이 새삼스럽게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탑을 해체 보수했던 발굴단은 사리장엄구 가운데 금동여래입상의 양식이나 사리병 등의 유물은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석했다.
물론 탑 자체는 고려시대보다 앞서는 시기에 있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한 것으로 정리했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서기 639년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
그러던 1970년. 일본 교토대 교수인 마키타 다이료가 10세기쯤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를 발견했다.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적힌 자료였다.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즉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 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지’는 백제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9주의 하나인 노산주(魯山州)에 속한 지모현(枳牟縣)의 지모와 연결되고, 또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그곳이 금마(金馬)라는 것이다. ‘관세음음험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포착된다.
제석정사가 재난을 당할 때의 피해사례를 언급하면서 “탑 아래 초석 속에 넣어두었던 귀중품 가운데 佛舍利甁과 金剛波若經만이 기적적으로 무사했다”고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밝혔듯 65년 왕궁리 석탑 해체수리 때 사리보(舍利寶)는 물론, 금판 금강반야바라밀경 19매가 발견됐다. 이는 이 관세음응험기 기록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주는 것.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 황수영(전 동국대총장)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역사학 대회에서 ‘익산 천도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는 도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역사학계의 거두(巨頭)였던 이가 “문헌적인 근거 없이 무슨 소리냐”는 요지로 일축했다. 그 거두의 말은 전공자도 아닌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모를 당한 황수영이었기에 이를 악물고 더욱 연구에 매진했으며 그런 가운데 ‘관세음응험기’가 발견되자 누구보다도 애착을 갖고 학술지(백제연구)에 소개한 것이다.
사실 ‘관세음응험기’를 뒷받침할만한 사료는 있었다. 백제멸망 직후로 부흥운동이 드세게 일어났던 661년 6월, 신라 태종무열왕이 사망했을 때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대관사(大官寺)의 우물물이 피가 되었고(大官寺井水爲血), 금마군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가 되었다(金馬郡地流血廣五步). 왕이 죽었다.”
이상하다. ‘물이 변해 피가 되었다’는 것은 유교의 재이설(災異說)과 관련 있으며 이는 군주의 부덕한 정치행위를 꾸짖기 위한 조짐. 그런데 왜 하필, 태종무열왕의 죽음을 유교의 재이설과 결부시켰을까. 더 이상한 것은 왜 하필 대관사와 금마면 땅에 피가 흘렀을까.
대관사는 왕궁리 5층 석탑 부근에서 출토된 기와조각의 명문에 보이는 ‘上部大官(宮?)’ 혹은 ‘官宮寺’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삼국을 통일한 ‘영걸(英傑)’ 태종무열왕이 금마지방의 재이설과 관계가 있다는 점, 더구나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위한 보덕국의 근거지로 금마지방을 제공한 것 등은 예사로운 기록이 아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군에게 국왕으로 추대된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익산)에 안치시키며 정식 고구려왕으로 삼았으며(670년) 다시 보덕국을 급조, 보덕왕으로 세웠던 것이다(674년). 이는 이 시대 익산이 어마어마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근거이다.
◇왕성임을 알리는 고고학적 조짐들
사실 여부를 증명하기 위한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조사도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진행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무왕의 익산 천도설, 혹은 행궁설, 행정수도 경영설을 뒷받침할 만한 실마리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우선 왕궁리 유적은 백제 말기에서 통일 말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수습된 목탄에 대한 탄소측정연대(서울대 AMS 연구실) 측정 결과 서기 535~630년이었다. 무엇보다도 백제 말기에서 통일 초기에 해당되는 유구는 석탑이 있는 지역의 성벽 유구와 부속된 많은 건물터가 해당된다.
출토된 백제토기와 기와류의 질은 공주 공산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 도성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같다. 또한 중국에서도 사례가 많지 않고, 한반도에서는 한번도 확인되지 않은 연화판문청자병(蓮花瓣紋靑瓷甁) 조각과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의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다.
또 ‘5부명’ 인장와 와 ‘수부(首府·일국의 군주 거소 및 중앙정부가 있는 도회·수도) 명문 인장와’는 이곳이 도성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
이는 문헌에서 확인되는 행정지명을 실제적인 근거자료로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백제의 행정제도는 ‘삼국사기’나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 및 수서(隋書)에서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에 따르면 “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 七十六萬戶…(옛날에 오부를 두어 37군, 76만호로 나누어 통치했다)”라고 했다.
주서의 이역전(異域傳) 백제조는 “都下有萬家 分爲五部曰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수도에 1만가가 있어 이를 나누어 5부를 만들었다. 오부는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다”라 했다. 수서의 동이전 백제조에도 “畿內爲五部~”하는 말이 나온다.
왕궁리에서는 앞서의 5부 가운데 후부(後部)를 제외한 4부의 명칭이 모두 발견됐다.
이 5부 명칭 인장와는 부소산성, 부소산 앞자락의 관북리 유적, 미륵사지 등에서만 한정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사비시대(538~660년) 백제왕궁위 위치는 부소산성이나 그 앞 평지가 유일무이한 후보지이다. 앞서의 ‘수부명’의 인장와는 바로 이 부소산성과 이곳 왕궁리에서만 확인되는 유물이라는 점도 주목거리이다.
왕궁리에서는 또 부소산성(사비성)에서 출토 예를 볼 수 있는 ‘귀달린 토기(耳杯)’가 출토됐다. 그 희귀성과 정교한 제작방식으로 보아 국가가 관장하는 가마에서 구운 이런 토기들을 부여를 비롯한 왕궁으로 공급하지는 않았을까.
특히 서북쪽 성벽 안쪽에서는 공방지로 추정되는 유적이 조사됐고, 여기에서 다량의 도가니와 도가니에 부착된 금(金) 슬래그가 확인됐다. 이 유적의 격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익산은 백제말의 행정수도=그리고 관심의 초점인 5층 석탑은 이 석탑이 통일신라 후기에 마련되었음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에 앞서 석탑 이전에 목탑이 존재한 것도 밝혀지게 되었다.
목탑이 마련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백제 말기에 성벽과 같이 마련되었던 건물들이 없어지고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이곳이 사찰구역으로 바뀐 것 같다. 그러면서 애초에 마련된 목탑이 통일신라기 후대에 들어와 석탑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토층조사 결과, 통일신라 기층에서 목탑의 제일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에 품(品)자형의 사리공이 발견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심초석은 목탑에서만 쓰이는 초석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같은 발굴 성과는 이곳 익산 금마 일대에 존재하고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이 무왕의 천도설(遷都說)이나 별도설(別都說)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로 충분히 평가되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추론을 해보자. 백제가 공주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538년) 서기 600년 무왕이 집권하면서 자기의 출생과 관련 있는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바로 창건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왕궁리에 궁궐과 부속건물을 세웠을 것이다. 이 유적에 보이는 성벽과 건물터,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되는 갖가지 유물들이 그걸 입증시킨다.
결국 당시 금마 일대는 수도인 부여와 함께 별도, 즉 요즘 말하는 일종의 행정수도로서 기능을 하지 않았을까.
서동과 선화공주 러브스토리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서울의 남쪽 못가에서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서동이다(삼국유사).” “서동이 마를 캐어 어머니를 모실 때 금 다섯을 얻어 산 이름이 오금산(익산토성이 있는 산?)이 되었다(익산군지).”
무왕이 용(龍)과 관계있으며, 고향이 익산이라는 걸 알려주는 기록이다. 만약 무왕이 익산천도 혹은 행정수도 건립을 결행했다면 그 이유는 무얼까. 왜 불구대천의 원수인 진평왕의 딸과 결혼했을까.
먼저 6~7세기의 정세를 살펴보자. 백제는 성왕 29년(551년) 한강 회복을 위해 신라 진흥왕과 연합, 고구려를 치고 한강유역을 양분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2년 뒤 백제를 배신하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 땅 6개군을 점령했다. 분노한 성왕은 신라를 치다가(554년) 살해된다. 백제로서는 과거의 동맹이던 신라 진흥왕과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백제는 전통의 주적(主敵)인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까지 원수로 삼을 수는 없었다. 고구려가 계속 괴롭히자 전선을 확대할 수 없었던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는다. 이것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 내막이다. 이 치욕적인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제는 진평왕에게 많은 황금을 준 것이 아닌가.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니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동요가 퍼져~공주를 먼 곳에 귀양 보내게 하여~서동과 비밀리에 정을 통하고~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꺼내놓고 살아날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하자 공주가 크게 놀랐다. 공주는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자’고 했다.”(삼국유사 무왕조)
이 직후 “서동은 금을 모아 산처럼 쌓아놓고는 용화사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려 하루사이에 신라왕실에 옮겨놓았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굴욕적인 결혼동맹의 뒷얘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에 따르면 무왕은 즉위 전반기에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익산을 왕도로 삼았다. 그렇다고 사비(부여)를 구도(舊都)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익산과 부여 사비성 등 2개의 도회(都會)를 모두 왕도로 썼다는 것이다.
‘용(龍)의 아들’로 신성시된 무왕은 미륵사탑을 세워 익산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다.
“무왕이 부인(선화공주)의 말을 듣고 용화산 밑에서 지명법사를 통해 미륵사를 지었다”(삼국유사)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지방은 당대 고유의 용신앙과 대중신앙인 미륵하생신앙(미륵불이 내려와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원하는 신앙)을 믿었다. 하생신앙과 상생신앙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상생신앙은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것을 신앙의 요체로 삼고 있다. 반면 하생신앙에 따르면 먼 장래에 미륵불이 출현하며 이 세상은 낙토(樂土)로 변하고 사람의 수명은 8만여 세가 된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3회에 걸친 용화법회로 모두 구제한다. 그러니 상생신앙은 귀족, 하생신앙은 대중신앙으로 각광을 받았다. 당대사비의 귀족들은 상생신앙을, 익산의 토착세력들은 하생신앙을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터전을 잡은 무왕은 백제 8대 성씨(沙·燕·協·解·眞·木·國·백)로 알려진 귀족들이 강력한 세력을 떨친 사비에서 이런 마륵하생신앙을 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나종우(원광대 교수)는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법사는 익산지역 불교의 대표자이고 익산의 여론몰이를 담당하는 자문역이 아니었을까”하고 추정하고 있다. 결국 무왕은 고구려·신라의 계속된 침략에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익산을 국가 중흥의 땅으로 삼아 불국토로 탈바꿈하려 했던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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