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1980년대 구 동독 여자투포환 선수인 하이디 크리거이다.
하이디는 소속클럽에서 지도자들이 주는 영양제를 정기적으로 복용했다. 그런데 하이디의 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근육이 늘어나고 온몸에 털이 나는 등 남자로 변해갔다.
1986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24살(1990년)에 은퇴했다. 결국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안드레아스 크리거)가 됐다. 하이디가 먹은 영양제는 실은 스테로이드제 계통의 금지약물이었다.
구 동독은 정권 차원에서 하이디와 같은 1만 여 명의 선수들에게 약물을 투여함으로써 스포츠강국이 됐다. 그러나 선수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여자 ‘하이디 크리거’와 남자 ‘안드레아스 크리거’의 일화는 약물복용이 전하는 서프라이즈 이야기다.
약물은 지금 이 순간도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를 추구하는 선수들에게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저 약을 먹고 저 주사를 맞기만 하면 승리를 챙기고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데….
이 대목에서 1960~70년대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 투수였던 짐 부튼의 말이 흔히 인용된다. 부튼은 선수들의 스테로이드 남용소식에 충격을 받았냐는 질문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충격은 무슨…. 1970년대 메이저리거 중 50%가 암페타민(각성제)을 먹었다.”
다음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요즘 투수들에게도 ‘이 약을 먹으면 20승은 너끈하지만 생명이 5년 단축된다는데 어떻게 할래?’하고 물어보라. 그럼 ‘당연히 먹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약물의 유혹은 이렇게 치명적이다.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그물망에 걸린 금지약물만 해도 200가지가 훌쩍 넘을 정도다. 국제스포츠계가 약물과의 ‘숨바꼭질’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이제 박태환 선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2014년 9월 금지약물 복용으로 18개월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던 박태환의 리우 올림픽 출전 여부를 두고 찬반논란이 뜨겁다. 최
근에는 ‘출전허용’ 쪽으로 여론이 기우는 듯하다.
국제수영연맹이 내린 징계는 지난 3월로 이미 끝났다. 그런데도 ‘금지약물복용의 경우 징계만료 후 3년간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대한체육회의 규정이 ‘이중처벌’이라는 주장이 있다. 박태환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법적으로 다툴 수 있는 사안이다.
필자도 사실은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래, 가만보면 우리 사회가 박태환 같은 스포츠스타나 연예인들에게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힘있는 정·재계 인사들은 나라를 뒤흔든 죄를 지어도 끄떡없이 복귀하는 모습을 일상사처럼 목도할 수 있는 뻔뻔한 사회가 아닌가. 그렇다면 불모지 수영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아들뻘 27살 청년에게 한번쯤은 기회를 줄 수도 있는게 아닌가. ‘죄없는 자여! 박태환에게 돌을 던져라!’는 냉소적인 외침이 어느새 필자의 가슴에까지 와닿는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다른 생각이 몰려온다.
최근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조직적인 약물복용혐의가 드러난 러시아 선수들의 리우 올림픽 출전을 원천봉쇄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만큼 금지약물과 관련해서는 무관용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 우선 스포츠 정신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다른 선수의 땀을 배신하는 행위니까….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선수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비정상으로 북돋아주는 약이라면 부작용도 클 수밖에 없다. 예컨대 힘이 폭발한다는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을 장기복용할 땐 심혈관계에 무리를 줘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
선수 본인이 복용사실을 몰랐든 알았든 상관없다. 금지약물 예방의 모든 책임은 선수에게 있다는 게 세계반도핑규정이다. 그렇기에 약물에 관한 한 이중 삼중의 처벌규정을 마련한다 해서 잘못됐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게다가 대한체육회 규정은 박태환 선수가 적발되기 전인 2014년 7월에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에 처벌규정을 바꾼다 치자. 그렇다면 제2, 제3의 약물파동이 일어나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때가서 또 들끓는 여론에 따라 처벌규정을 강화할 것인가. 또 정히 대한체육회의 규정을 폐지한다면 그 효력이 발생하는 시점은 ‘박태환부터’가 아니라 ‘박태환 다음부터’여야 하는게 옳다. 그래야 형평성에 맞다.
무엇보다 박태환 측의 행보를 보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박태환은 피해자가 아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약물에 관한한 ‘하고 싶어서 한게 아니니 억울하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진심을 담은 사과’로 읽혀져도 어떨지 모르는 판이 아닌가. 이것이 필자가 두 눈 질끈 감고 박태환의 편에 가담할 수 없는 이유들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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