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1/29ㅣ뉴스메이커 760호
‘코리안 루트’ 1만km 대장정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서 돌널무덤 발견…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로 유입 추정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무덤은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신석기시대의 인류와 달리 주로 동굴 생활을 했는데, 동굴 가족의 일원이 죽으면 동굴 안의 방바닥을 파고 흙을 덮은 뒤 돌을 주워모아 주검을 덮었다. 어떤 경우에는 주검의 주위에 붉은 흙을 뿌리기도 했다. 이 같은 행위는 곧 영생을 바라는 산 자의 기도다.
우하량 제2지점 적석총 유적 전경. 한반도에서 흔히 볼수 있는 청동기시대의 석상식 석관묘가 있으며,
지(之) 자형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지(之) 자형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땅을 파서 매장한 다음 흙으로 덮는 흙무덤(토광묘)을 사용했으나 신석기시대 중기에 이르면 인간의 주검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돌을 둘러쌓아 축조했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고대 민족인 동이족(東夷族)에게는 돌을 사용해 인간의 주검을 보호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이 돌무덤(석묘)이다.
‘동이족’은 중국 측에서 보면 동방민족을 지칭하는 것이며, 항상 중국 민족과 대치했다. 동이족은 발해연안에 널리 퍼져 살았는데, 주로 산동반도를 비롯하여 만주지방과 한반도의 고대 민족을 일컬었다.
동이족은 시신을 매장할 때 다른 민족과 달리 주로 돌을 가지고 축조했는데, 이것이 돌무덤(석묘)이다. 돌무덤 중에는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넛널무덤(석곽묘), 돌널무덤(석관묘), 고인돌무덤(지석묘), 돌방무덤(석실묘) 등이 있다.
‘북방전래설’과 배치되는 고고학 성과
오른쪽_발해연안 돌무덤 분포도. <김문석 기자>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무덤 형식의 하나인 돌널무덤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땅을 파고 지하에 판자와 같은 널찍한 돌(판석)을 마치 상자 모양으로 널(관)을 짠 이른바 수립식(竪立式) 돌널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판석을 중첩하여 네 벽을 쌓고 뚜껑을 덮은 이른바 첩체식 돌널무덤이다.
돌무덤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오랫동안 만주지방과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남쪽으로는 일본의 구주지방과 유구열도에까지 분포되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멀리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돌무덤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반도의 돌무덤의 기원을 청동기시대에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왔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돌널무덤도 북방에서 전래되었다는 ‘북방전래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동북아와 인접한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적석총 계통인 이른바 열석묘(列石墓)와 돌널무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한·일 학계에서는 한반도 돌널무덤의 기원을 시베리아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룬 고고학적 성과는 재래의 기존 학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널무덤과 그 구조와 축조 방식이 동일한 돌널무덤 양식이 발해연안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이들 돌널무덤이 축조된 가장 이른 시기가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83~1985년에 중국 요녕성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紅山文化) 시기의 적석총 유적에서 돌널무덤을 발견하면서 비롯했다. 1908년 일본인 도리이 료죠가 처음으로 조사한 후 홍산문화는 1935년 일본 동아고고학회가 적봉시(赤峰市) 홍산후(紅山後)에서 발굴하면서 비롯했다. 발굴 당시에는 ‘적봉제Ⅰ기문화’라고 했다가 1954년에 윤달(尹達)의 ‘중국신석기시대’에서 홍산문화라고 고쳐 불렀다. 홍산문화는 돌무덤 이외에 채도를 비롯하여 갈 지(之) 자형 빗살무늬토기·세석기 및 농경 도구를 대표적인 문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분포 지역으로는 발해연안의 중국 내몽골 동남부, 요녕성 서부, 하남성 북부, 길림성 서북부 요동반도, 한반도 등이다. 홍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4500년~3000년으로, 그 후에는 부하문화·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진다.
이들 문화는 만리장성 이동 지역이다. 발해만 북쪽에 유입되는 대릉하(大凌河)는 발해연안 고대문화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강이다. 이는 곧 발해문명이 잉태한 곳이다. 또한 대릉하 유역은 고대 한국 문화는 물론 고조선 시대의 역사 전개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대릉하 유역을 탐방했다. 대릉하 유역 중·상류지역인 능원(凌源)·건평(建平)·객좌(喀左)현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홍산문화 시기의 돌무덤떼(石墓群)를 탐사하기로 했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건평현과 능원현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우하량(牛河梁) 적석총 유적이다.
이 유적은 북경-심양-단동-부산을 잇는 철도가 지나는 곳이고, 북경-심양 고속화 도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유적은 철도를 놓을 때 많이 훼손되었고, 고속화 도로를 놓을 때도 돌무지무덤의 뒷부분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1981년 처음으로 지표조사를 하고, 198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유적 부근에는 요녕성 고고문물연구소 우하량공작참(工作站)이 설치되어 유적 보존과 발굴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수립식 석관묘는 한반도 방식과 유사
우하량 적석총의 대표적 유적으로 제2지점 적석묘지가 있다. 이 제2지점 적석묘지 가운데에서도 제1호 적석총은 3단형 계단식 적석총(일종의 피라미드)을 만들어 중앙의 석곽 안에 석관이 놓여 있으며, 그 석관에서 용형옥결(일종의 곡옥)이 나왔다. 제1호 적석총 유적의 좌우로 여러 적석총이 있고, 서쪽에는 27기의 석관묘가 있다. 이들은 수립식과 첩체식이 함께 분포되어 있는데, 판석을 세워 쌓은 이른바 수립식 석관묘는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동기시대의 이른바 석상식(石箱式) 석관묘와 같은 묘제(墓制)다. 묘 안에는 주로 옥기가 수장되었으며, 묘 주위에서는 지(之) 자형 빗살무늬토기와 채도가 발견되고 있다. 이 주인공은 고국(古國)의 수장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단의 석축과 그 안에 돌곽(석곽)을 두고 다시 돌널을 묻은 석관묘는 고구려 적석총까지도 그대로 이어진다. 중국 길림성 집안 국내성 일대에도 계단식 적석총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우하량 제2지점 적석총의 석관묘를 조사하는 필자. <김문석 기자>
그뿐 아니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한성 백제 시기의 적석총도 마찬가지로 계단식 적석총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요서에서 요동을 지나 한반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도 시기와 과도 지점을 거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 1호 적석총의 동쪽에 있는 적석유구는 발견 당시 원형 적석총으로 추정했는데, 최근에는 제단(祭壇)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원형 적석유구는 최근 경남 진주시 남강유역 옥방(玉房)유적에서 발굴된 청동시대 원형 적석유구와 매우 유사하다.
1990년대, 우하량 제2지점에서 남쪽으로 1㎞ 떨어진 구릉에서 돌을 피라미드처럼 쌓은 금자탑(金字塔)이 발견되었다. 폭 60m의 사각형 기단에 7층까지 높이 10m 정도인 무덤과 전면에는 제단이 설치된 제사 유적이다. 바깥은 돌로 쌓았고, 안에는 흙으로 쌓았다. 이곳에서 통형도관을 발견했는데 아직 주요 부위는 발굴하지 않은 채로 있다.
1982년, 대릉하유역 동산취(東山嘴) 유적의 발굴은 요녕성 경내의 홍산문화 유적에 대해 진행된 첫 번째 정식 발굴이었고, 수확도 예상 밖으로 컸다. 이 유적은 객좌현 현성 소재지(大城子鎭)에서 동남쪽으로 4㎞ 지점의 대릉하 서안 산등성이의 정 중앙은 평평하게 돌출된 대지(臺地)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적의 남북 길이는 약 60m이고, 동서 너비는 약 40m이며, 강바닥에서 50여m 높이에 있으며, 앞으로는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돌무덤 기원은 발해연안’이 타당
우하량 제13지점 금자탑(피라미드) 전경 <이형구 교수>
최근 2001년에 내몽골자치구 동남쪽 적봉시 초모자(草帽子) 제사 유적에서 동산취 유적과 비슷한 유형의 제사 유적이 발굴되어 이번 기회에 답사해 확인하였다. 제사유적 안에는 적석총이 있고, 그 안에 석관묘가 있다. 이런 유형은 요동반도나 압록강 유역에서도 보이며, 고구려 초기무덤에도 방형 제단이 있다. 이 초모자 유적은 BC 3000년 전 유적이다.
대릉하 유역의 우하량 적석총이나 동산취 적석 제단의 연대가 기원전 3500쯤이고 적봉 초모자 석축 제단의 연대가 기원전 3000년쯤으로 추정되는데 이 연대는 한반도 안에서 발견되는 돌무덤이 기원전 700년쯤에 시베리아로부터 몽골·만주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퍼져 내려왔다고 하는 종래의 ‘한국고고학개설’류보다 훨씬 앞서는 시기다. 그뿐 아니라 다량의 돌무덤이 발견된 대릉하 유역 우하량 유적의 C¹⁴ 측정연대가 기원전 3500년쯤으로 나오는데 반해 시베리아의 돌무덤 연대는 기원전 2500~1200년쯤으로 추정된다. 대릉하 유역 우하량 원형 적석유구의 축조 연대는 시베리아 알타이지방의 페시체르킨 로크 Ⅰ(Peshcherkin LogⅠ) 원형 적석유구보다 무려 1500년 내지 1000년이나 빠르다. 그리고 대릉하 유역은 지리적으로도 시베리아보다 가깝다. 그러므로 돌무덤의 기원을 발해연안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장례를 주관하는 성소가 산상이나 사막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연해지구나 강 연안지역에 있다. 이것은 바로 고대 인류의 생활 터전이 물과 밀접한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 인류가 남긴 문화의 유산이 산악이나 사막, 한랭한 지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동방문명의 중심인 발해문명은 따뜻한 발해연안이지 추운 동토 지대인 시베리아가 아니다.
<이형구 :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
<후원 : 대순진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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