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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발해문명은 고대 동방의 중심이었다

‘코리안 루트’ 1만km 대장정
넓은 의미의 발해연안은 산동·요동·한반도를 포함한 동양의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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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리안루트 탐사취재단의 일원으로 요하·대릉하 일대를 탐사하게 된 것은 필자로서는 매우 연원이 깊은 것 같다. 사실 필자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1987년 들어 ‘88올림픽’을 앞두고 경색된 냉전체계가 다소 완화되어가는 분위기여서 1960년 후반부터 준비해온 북한 고고학 자료를 국내에 소개하려고 했는데, 당시 언론은 쉽게 수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 해 여름 ‘신동아’ 김종심 부장에게 먼저 부탁했으나 이를 소개하지 못했다. 이듬해 여름 중앙일보 이근성 부장에게 다시 부탁했다. 그래서 ‘월간중앙’ 1988년 10월호에 ‘첫 공개 북한 문화재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흑백 화보로 실었다.

고대문화 중요한 유적·유물의 보고
  아래_요년성 영구현 금우산 동굴 유적 전경. <이형구 교수>'>
그런데 그해 11월 북한의 학술·문화 자료를 일부 수용하도록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자 이제는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북한 자료를 소개하려고 들었다. 마침 경향신문과 인연이 닿아서 북한의 문화재 유산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경향신문과 협의해 북한뿐 아니라 중국 만주지방까지 아울러서 ‘한민족의 뿌리―남북한·만주 문화재 탐사―’라는 제목으로 1989년 신년호부터 매주 1회씩 전면으로 30회 연재했다.

1990년 이후에는 중국 경내 우리 역사와 관련한 문화 유적을 수십 차례 탐방하고, 2000년 이후에는 북한 역사와 관련한 문화 유적을 여러 차례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어찌 보면 중국의 요하·대릉하 일대와 한반도 고대 문화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연구에 뛰어든 계기를 제공한 것이 경향신문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 만에 경향신문이 다시 코리안루트 탐사에 필자를 초청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어떤 필연적인 인연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감회가 새로웠다.

중국에서는 요하·대릉하 유역의 고대 문화를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표현했는데, 필자는 일찍이 ‘발해문명(渤海文明)’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유럽에서 지중해(地中海)를 중심으로 서양 문명이 탄생한 것처럼 동양 문명의 중심은 발해연안(渤海沿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문명, 즉 이집트 문명, 그리스 문명, 로마 문명이 일어나 서양 문명의 요람이 되었듯이 발해(渤海)를 중심으로 발해 연안의 산동, 요동, 한반도를 동양 문명을 탄생시킨 하나의 문명권으로 보고자 한다.

예전에 동양 문명의 중심을 황하 문명으로 보았는데, 황하도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발해를 동양의 지중해라는 개념으로 보았다. 여기서 발해연안이라 함은 넓은 의미로 발해를 중심으로 남부의 중국 산동(山東)반도, 서부의 하북(河北)성 일대, 북부의 요녕(遼寧)성 지방, 북동부의 요동(遼東)반도와 동부의 길림(吉林)성 중남부, 그리고 한반도를 포함해서 일컫는다.

한국문화 원류 밝힐 자료 다수 발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까지 60여 년간 중국의 동북지방―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이른바 동삼성(東三省)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 성과는 시기적으로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에 이르고 있고, 각 시기마다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수없이 발굴 조사되었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발해연안 동북부, 중국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내몽골자치주 동남지역 포함), 길림성, 흑룡강성 지방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다.

발해연안은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 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하던 지역으로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시작되는 곳이다. 필자는 일찍이 ‘발해연안 문명’, 즉 발해문명을 탐색하기 위해, 발해연안의 요서·요동지역, 만주지방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신석기시대 유적, 청동기시대 유적 등 고고학적 자료(문헌)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이를 토대로 1982년 6월 25일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원장 이종영 교수)에서 논문 초고를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은 ‘발해연안 북·동부지구(만주) 구석기 문화’라는 제목으로 1986년 ‘동방학지’ 52호에 게재되었다.

발해연안의 요서·요녕 지방과 요동반도, 그리고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는 한국 문화의 원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다. 1950년대 이후 30여 곳에서 많은 구석기시대의 문화 유적과 인류 화석(人類化石)이 발견되었다.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요동반도 영구현(營口縣, 지금의 大石橋市) 금우산(金牛山) 동굴 유적, 본계시(本溪市) 묘후산(廟後山) 동굴 유적이 있다. 이들 두 유적에서는 북경원인(北京猿人, 혹칭 北京原人)과 비교되는 곧선 사람(直立猿人)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동북아시아 구석기시대 고인류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금우산 유적에서는 전기 구석기시대(28만 년 전)의 인류 화석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금우산 인류 화석은 직립인(直立人)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를 ‘금우산 직립인’ 혹은 ‘금우산인’이라고 명명했다. 또 금우산 동굴에서는 불탄 목질과 불탄 재가 발견되었다. 금우산인 화석은 몽골 인종(蒙古人種; Mongoloid)의 고유 특징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 인종을 이른바 아프리카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베이징대 뤼쭌어 교수, 1989).

1978년 압록강으로부터 100㎞ 정도 북쪽에 위치한 본계시 산성자촌 묘후산 동굴에서 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과 구석기가 발견되었다. 보고자(장전훙 교수)에 따르면 묘후산 유적에서 출토된 구석기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발견된 돌도끼(석부), 찍개, 긁개 등의 제작 기법과 유사하다고 한다(이형구 역, ‘묘후산’, ‘동방학지’ 64, 연세대, 1989).

발해연안의 중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릉하(大凌河) 유역의 요녕성 객좌현(喀左縣) 합자동 동굴 유적, 요동반도 묘후산 동굴 7·8층 유적, 그리고 해성현(海城縣) 선인동(仙人洞, 지금의 小孤山 동굴) 유적이 있다.

발해연안 인류화석 한민족과 밀접
 

요녕성 본계시 묘후산 유적에서.

합자동 유적에서는 저부 4층에서 약 10만 년 전의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그 위 3층에서는 불탄 층이, 그 위 2층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각각 발견되었으며, 맨 위 1층에서는 신석기시대(홍산문화) 이래 청동기시대(하가점 하층문화), 서주·춘추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한 동굴 안에서 계속 인류가 생활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예를 평양 부근의 룡곡 동굴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룡곡 유적의 아래층에서 신인 단계의 후기 구석기시대 인류화석 ‘룡곡인(龍谷人)’이, 위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이 각각 발견되어 우리나라 고대 인류의 진화·발전 단계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만주지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현생인류(現生人類)의 신인 단계의 인류 화석은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발해연안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은 대릉하·요하·압록강·송화강·두만강(豆滿江, 圖們江)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는데, 그중 6개소에서 인류 화석이 출토되었다. 요동반도에서는 금우산 유적(위층)과 묘후산의 동동(東洞) 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1978년에 발굴된 압록강 하구의 요녕성 동구현(東溝縣) 전양동(前陽洞) 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전양인(前陽人)의 연대는 1만8000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인류가 곧 오늘날의 인류와 같은 이른바 현생인류다.

일설에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퍼져나왔다고 하지만 고대 인류의 진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진화 과정을 원인(猿人) 단계부터 고인(古人) 단계를 거쳐 현생인류로 진화한 신인 단계, 그리고 신석기시대인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동방 인류, 즉 동이족(東夷族)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여 발해문명을 창조한다.

<이형구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
<후원 : 대순진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