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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백제인이 백주대로에 '남근'을 세운 까닭

목간은 당대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목간에 쓰여진 기록을 읽으면 그 시대 사람들의 체취를 흠뻑 맡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확인된 목간은 500여점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백제시대 목간은 70여점 정도랍니다. 많지않은 숫자지요. 대부분이 사비백제 시기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리 많지않은 백제 목간 가운데는 유독 흥미로운 목간들이 눈에 띕니다. 이번 주는 그래서 백제 시대 ‘빅 3’ 목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구구단을 정교하게 써놓은 쌍북리 구구단 목간이 눈에 띕니다. 과연 어떤 패턴으로 만들어진 목간일까요. 옛 사람들은 왜 이이단이라 하지 않고 구구단이라 했을까요. 과연 구구단을 ‘9×9’부터 시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번째 흥미로운 목간이 바로 ‘남근형 목간’입니다. 능산리에서 발견된 이 야릇한 목간의 쓰임새는 무엇일까요. 백제인들은 왜 이 남근 형태의 목간을 지금으로 치면 세종로 사거리에 내걸었을까요. 그것도 모자라 목간에 ‘설 立’자를 3번이나 기록했습니다. ‘섰다~! 섰다! 섰다!’를 세번이나 외친 까닭은 무엇일까요. ‘빅3’ 가운데 남은 하나는 역시 능산리에서 수습한 ‘백제 가요 목간’입니다. 가장 오래된 백제시대의 가요라 합니다. 이름 또한 ‘숙세가’라 붙였습니다. 내용을 보면 지금의 충청도 사람을 뺨치 듯 너무도 여유롭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백제인의 여유가 지금의 충청인의 여유로 이어졌다는 것이…. 이 시간 백제시대 빅3 목간이 들려주는 역사이야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17회는 ‘구구단, 남근, 가요… 백제의 빅3 목간이 들려주는 역사’입니다.

 

 

2000년 4월 부여 능산리 절터 주변 웅덩이에서 이상야릇한 목간이 출토됐다. 295번의 번호가 붙은, 이름하여 ‘남근형’ 목간이다.

이 목간의 크기는 길이가 22.6㎝(두께 2.5㎝)나 됐다. 목간의 밑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다듬었고, 그것도 모자라 구멍까지 뚫었다.

한쪽 면에는 ‘천(天)’자와 ‘무봉(无奉)’자가 서로 방향을 거꾸로 해서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한면에는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확연했다.

땅을 향해 새겨진 ‘天’은 무엇인가. 또 남근 목간에 ‘설 립(立)’을 세 번이나 반복한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서라(立)! 서라(立·)! 서라(立·서라)!’라는 뜻이 아닌가.

이 무슨 망측한 소리인가. 목간이 발견된 곳은 백제 각 지방에서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웠다. 그야말로 백주대로에서 이상야릇한 목간이 발견된 것이다.

윤선태(동국대 교수)는 ‘道■立立立’의 도■에 주목했다. 적외선 사진으로 볼 때 ■을 제사를 나타내는 ‘示+陽의 오른쪽 자’로 해독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을 보면 ‘양’은 ‘도로의 제사’, 즉 도상제(道上祭)로 정의됐다. 또 북송시대의 발음자전인 <광운> ‘양운(陽韻)’을 보면 도신, 즉 길의 신이라 했다.

 

<예기> ‘교특생’은 “나쁜 귀신을 몰아내는 나례의식”이라 했다. 따라서 윤선태 교수는 “1면의 묵서인 ‘도양립립립’은 ’도로의 신인 양이 일어섰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풀었다. ‘서라!(立)’을 세번 강조한 것은 감탄을 위한 강조법이라는 것이다.   

또하나 남근형 목간을 보면 묵으로 쓴 글씨 말고, 음각으로 새겨넣은 ‘봉(奉) 의(義) 무(无) 천(天)자를 확인할 수 있다.

국어학자인 이승재 서울대 교수는 “이것이 부자연스럽다”고 한다. 같은 목간인데, 어느 부분은 묵서로 글씨를 쓰고, 또 어떤 부분은 칼로 글씨를 새겨넣었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이를 재활용의 뜻으로 풀었다. 먼저 칼로 글씨를 새겼던 나무를 다시 활용하면서 붓으로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추정은 갈수록 흥미롭다. 백제는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남근은 나라의 안녕, 그리고 악신·질병의 추·예방 등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다.

<삼국유사>는 “지증왕의 생식기가 1척5촌(약 45㎝)이나 됐다”고 기록했다. 또 가락국 김수로왕은 “거대한 남근을 낙동강 양쪽에 턱 걸쳐놓을 정도”였단다. 그걸 모르던 길손이 앉아 곰방대를 탁탁 터는 바람에 왕의 ‘그곳’에 커다란 흑점이 생겼단다.

여하간 ‘길 제사’ 때 ‘세워~세워~세웠던’ 이 남근목간은 조선의 ‘장승’ ‘남근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 전통은 도래인의 발자취가 닿은 일본까지 연결된다. 백제가 뿌린 ‘남근 신앙’이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일본의 헤이안시대 9세기대 율령 해설서인 <영의해>를 보면 “도향제(道饗祭)는 수도인 경성(京城) 사우(四隅)의 도로에서 제사지낸다”고 했다.

 

이것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鬼魅(도깨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노신에게 폐백을 들여 이들을 퇴치해주기를 바라는 제사의례였다. 여기서 ‘경성 사우’란 도읍지 사방의 외각을 의미한다.

남근형 목간이 출토된 능산리 절터가 바로 ‘경성 사우의 도로’라 할 수 있다. 각 지방에서 도성으로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사비나성의 대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사비나성 자체가 도성의 수호를 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닌가. 도성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기에 역병이나 온갖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려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따라서 남근 목간을 제사에 사용한 뒤에 나쁜 기운을 흘려보낸다는 의미에서 물웅덩이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남근형 목간에 길의 신인 양(남근)을 세웠다(立) 세웠다(立) 세웠다(立)도 세번이나 강조한 이유는 뭘까. 이 말일게다.

“이제 남근이 섰다! 섰다! 섰다! 그랬으니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

즉 남근이 일어섰으니 귀신과 도깨비는 두려워 근접할 수 없을 것임을 선포한 의미한 것이다.

 

가만히 남근 목간을 보면 하단을 다듬어 쐐기 형태로 만들고, 가운데 3㎜의 구멍을 뚫었다. 받침대나 어딘가에 꽂아두고 일어섰다는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윤선태,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주류성, 2007년
윤선태, ‘백제 구구단 목간과 술수학’, 제3회 국제학술대회 고대세계의 문자자료와 문자문화, 경북대, 2016년
정훈진, ‘부여 쌍북리 백제유적 출토 목간의 성격’, <목간과 문자> 제16호, 한국목간학회, 2016년
정훈진, ‘사비도성에서 발견된 구구단 백제 구구표 목간’, <한국의 고고학> 통권 32호, 2016년 6월
손환일, ‘백제 구구단의 기록체계와 서체-부여 쌍북리 출토 구구단목간과 전 대전월평동 산성 구구단 개와를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33집, 한국사학사회, 2016
김영욱, ‘백제 이두에 대하여’, <구결연구> 제11집, 태학사, 2003년
국립부여박물관, <백제목간>, 소장품조사자료집, 국립부여박물관, 2008년
도미야 이타루, <목간과 죽간으로 본 중국고대문화사>, 임병덕 옮김, 사계절,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