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유산계를 뜨겁게 달구는 이슈가 있습니다. 바로 서산 부석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입니다. 1330년 시주자 32명이 불심을 모아 제작한 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상은 700년 가까이 부석사에 없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일본 대마도(쓰시마) 관음사(간논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이 한·일간 민감한 난제로 떠올랐습니다. 2012년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가 많으니 훔쳐와 팔면 큰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범행을 모의한 한국 절도범 일당이 감쪽같이 훔쳐서 국내로 반입한 것입니다. 그 때 훔쳐온 것이 관음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일본 지방 유형문화재)과 해신신사(가이진 진사)의 금동여래입상(일본 국가지정중요문화재)이었습니다. 이 중 통일신라시기의 걸작인 금동여래입상은 일본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서산 부석사측이 ‘1330년 고려국 서산 부석사에서 제작했다’는 불상 조성문이 존재하고, 왜구들이 불법반출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부석사 것’이라고 주장한겁니다. 이 문제는 법정소송에 휘말렸고, 법원은 일단 부석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측은 “절도범이 훔쳐간 것이 명백한 유물을 빼앗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사실 ‘왜구가 약탈해갔다’는 확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정황의 예는 차고 넘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부석사 불상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그리고 솔로몬의 지헤는 없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1회 주제는 ‘부석사 불상, 솔로몬의 지혜는 없는가’입니다.
1951년 5월이었다. 일본 대마도(對馬島·쓰시마) 관음사(觀音寺·간논지)의 안도(安藤良俊) 주지의 눈이 빛났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을 우연히 들어올렸는데, 그곳에서 복장유물이 보였던 것이다.
복장물(불상을 조성하면서 불상 속에 넣는 사리와 불경 등 각종 부장품) 가운데는 만다라(불화)와 삼베에 싸인 목합이 있었다.
목합의 내부에는 5가지색으로 된 오보병과 곡물·마노·수정단편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복장물 중에 단연 눈에 뜨는 것은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만든 사연을 기록해놓은 복장 조성문이었다. 그 내용을 판독해보니 흥미진진했다.
고려 서주(서산) 부석사에서 이 불상을 만들어 모셨으며, 그 연대는 1330년(충선왕 즉위년)이라는 것이었다. 발원목적과 함께 시주자 32명의 명단까지 기록해놓았다.
“모든 불보살이 큰 서원을 내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데는 너나없이 평등하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인연이 없는 중생은 교화하기 어렵다.…부처님의 말씀에 따라…관음존상을 주조하여 부석사에 봉안하고…영원토록 공양하고자 서원한다.…현세엔 재앙을 소멸하고 복받을 것이며, 후세엔 모두 함께 극락왕생하기를….”
즉 서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불상을 주조한다고 밝힌 것이다.
시주자 명단엔 스님인 계진, 심혜, 혜청, 법청, 도청, 환청, 달청 등의 법명이 보인다. 김성, 국응달, 난보, 소화이, 만대, 담회, 반이삼, 도자, 잉화팔, 국한, 시수 등의 장삼이사 이름도 빠짐없이 기록돼있다.
이두식인 석이(石伊·똘이)의 이름도 보인다. 부석사 승려와 재가 신도, 심지어는 똘이와 같은 하층민들까지 힘을 모아 제작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서로 인연이 있는 중생이 힘을 합쳐 조성함으로써 영원한 공양을 실현하고자 조성한 불상이었던 것이다.
■부석사의 선물인가
그런데 충남 서산 부석사에 모셔져 있어야 할 불상이 어인 일로 대마도까지 건너간 것일까.
왜, 언제부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불상을 모셔온 관음사의 벽에 걸린 사찰의 약사를 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관음사는 도쿄 남선사의 말사이며. 대영 6년(1526년) 창건하면서 관음상과 협시불인 석가모니를 봉안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1330~1526년 사이, 그 어느 때 서산 부석사에서 대마도 관음사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혹시 정상적인 경로를 거친 합법적인 이동은 아니었을까. 부석사가 관음사에 기증 또는 이안(移安)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조성문에서 보듯 관음보살좌상은 하층민까지 포함한 많은 승속들이 영원한 공양을 위해 만든 것이라 분명히 적혀있다.
무슨 다른 사찰에 기증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는 얘기다. 더구나 대마도 관음사에 주려고 주조한 불상이라면 응당 “부석사에서 조성해서 관음사로 이안한다”는 기록이 반드시 존재해야 맞다.
그렇다면 후대라면 어떤가. 부석사가 기증·이안한게 아니라면 조선 조정이 일본에 합법적인 경로로 건넸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외교적인 선물, 뭐 이런 형식으로….
■대장경(판)까지 퍼준 조선의 선물이다?
조선의 숭유억불책을 눈여겨본 이같은 주장은 그럴듯 해보이기도 하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의 건국세력은 불교를 혹세무민의 허황된 종교라 비판했다. 우선 출가를 장려하는 불교는 충효를 바탕으로 한 유교사회의 근간을 허무는 독초라 여겼다.
또 비대한 사찰의 사치행사와 승려의 무위도식은 국가재정을 파탄시킨 주범으로 여겼다.
이렇게 백해무익한 불교를 정리하는 작업에 나섰다.
태종은 사찰의 혁파에 나섰다. 11종파와 3000개의 사찰에 이르던 종파를 7종으로 추리고 그 아래 242개의 사찰만 남겼다. 뒤를 이은 세종은 다시 선교 양종 아래 356개 사찰에 3770명의 승려만 공인했다.
사찰이 혁파되고 승려의 수가 사정없이 줄어든 분위기였다면 어떤가.
태종은 ‘대장경을 달라’고 요청하는 일본 사신의 요청에 ‘여주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일본 정부에 보냈다.(1414년) 태종은 “아예 불경을 찍어낼 대경판을 주면 어떻겠느냐”고 한술 더뜨기도 했다.
세종 때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1424년(세종 6년) 일본 사신 규주와 법령이 “대장경판을 달라”며 단식투쟁까지 벌인 것이다.
“오로지 대장경판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저희가 일본을 떠날 때 ‘경판을 들고 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만약 받지 못하고 돌아가면 반드시 추궁받을 겁니다. 차라리 먹지 않고 죽겠습니다.”
이 뿐이 아니었다. 일본 국왕이 대마도주에게 명을 내려 “대장경판을 얻지못하면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말까지 퍼뜨렸다.
처음부터 대장경판을 ‘무용지물’로 여겼던 세종은 사태가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군말없이 건네주고 말았다. 1556년(명종 11년)에도 조선은 일본 사신에게 대장경 인본을 준 일도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대장경에 그렇게 목을 멨을까.
일본은 1336년부터 60년 가량 남북조 내란이라는 격변기를 겪었다. 1392년 무렵 가까스로 끝난 이 전란으로 황폐해진 사찰을 재건하고 호국불교를 내세워 막부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대장경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부석사의 금동보살좌상 역시 조선의 억불 정책 와중에 일본의 요청에 따라 선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대장경 뿐 아니라 대장경판까지 내주는 판에 뭔들 못주겠는가. 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연산군도 불상 훼손만큼은 엄벌로 다스렸다
그러나 조선 임금들이 불교 관련 유물을 다 퍼주었으리라는 것은 착각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찰 혁파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불상만은 보호를 받
았다는 것이다.
1406년(태종 6년) 태종이 242개만 남겨두고 전국의 사찰을 혁파했을 때도 혁파된 사찰의 불상을 없애지 않았다.
일시에 관아(군기감)로 옮겼다가 남은 사찰로 옮겨 보관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다.
1415년(태종 15년)에는 혁파된 사찰의 청동불을 바친 개성부유후와 밀양부사를 파직하기도 했다.
“근자에 각 지방에서 무쇠(주철)을 실어 바치려고 폐망한 사찰의 청동불을 싹쓸이 한다는 구나. 심하기 이를데 없다. 사찰의 중들의 고발을 받아 이런 수령들을 처벌하라.”(<태종실록>)
1433년(세종 15년)에는 철거된 창덕궁 문소전 불당(태종이 아버지 태조를 위해 만든 원찰)에서 나온 불상을 흥천사로 옮길 것을 명하기도 했다.
“그 불상의 먼지와 때가 많이 끼었다. 조종(태조와 태종)이 전하신 바를 허술하게 할 수 없다. 잘 정비해라.”(<세종실록>)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은 창의문 너머를 꽃밭과 정자(탕춘정), 이궁 등을 겸한 쉼터로 만들고자 그 주변을 다 철거시켰다. 그렇지만 장의사(세검정 초등학교 터)의 불상들만큼은 다른 사찰로 모조리 옮겼다.(1504년) 이밖에도 경복궁 내 내불당과 향림사의 부처도 흥천사와 회암사로 각각 이안했다.
1500년(연산군 6년)에는 절(연굴사)에 난입하여 불상을 내던져 파괴한 유생 6명에게 장형 100대씩의 중형을 내렸다. 특히 주모자에게는 도형(강제노역형) 3년이 추가됐다.
연산군은 형을 내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관과 사헌부 검열 등 2명을 형조로 보내 제대로 형을 받는지 감독하게 했다.
아무리 무도한 연산군이었어도 불상을 훼손하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중벌로 다스린 것이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도 다르지 않았다.
“1510년(중종 5년) 유생들이 정릉사(흥천사)를 드나들며 불경과 보물을 훔쳐갔다. 그래도 젊은 아이들의 치기(狂童) 쯤으로 여겨 문책하지 않았는데 급기야 화재까지 났구나. 비록 절집이라도 불까지 내다니….
특히 정릉사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절이다.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중종실록>)
중종이 펄펄 뛰면서 “엄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중종실록>을 쓴 사관은 “절의 화재 때문에 유생을 심문하다니 이것은 이단을 두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중종을 꼬집는다.
어쨌거나 아무리 척불을 외친 유교사회였다고 해도 조선시대 임금은 절에 대한 무도한 파괴행위만큼은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구의 약탈은 아닐까
전문가 다수는 고려말 왜구에 의한 약탈설에 의심을 보낸다.
왜구가 처음 출몰하기 시작한 초기(1223년 이후)엔 규모가 매우 작았다.
하지만 14세기 중엽(1350년)부터는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 당시 격변기 동북아시아 정세가 왜구의 출몰을 부추겼다.
일본에서는 남북조의 동란이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고려 왕조가 동요했으며, 중국에서도 원나라가 붕괴 직전이었다.
이윽고 명나라(1368년)와 조선(1392년)이 건국하고, 일본도 무로마치 막부에 의한 국내 통일(1392년)이 이뤄지던 변혁기였다.
혼란기를 틈탄 왜구는 1391년까지 41년간 294번이나 한반도를 침략했다. 10회 이상은 15개년이고, 30회 이상도 3개년에 이른다. 1377년엔 무려 42회의 침략회수를 기록했다.
선단의 규모도 최소 20척에서 최대 500척에 이르렀다. 1379년 5월 진주를 침략한 왜구의 규모는 기병 700명에 보병 2000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왜구의 대대적인 침략 앞에 고려는 너무도 무기력했다. 왜구는 경상도, 전라도 등 남부지역 뿐 아니라 충청도 해안까지 밀고 올라왔다.
심지어는 내륙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왔다. 이때 왜구는 민가는 물론 사찰의 재보까지 털어갔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중요한 시사점을 짚을 수 있다.
“1357년(공민왕 6년) 왜적이 승천부의 흥천사에 쳐들어와 충선왕과 왕의 부인인 한국공주(계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들고 갔다.”
“1365년(공민왕 14년) 왜적이 창릉에 침입해서 세조(태조 왕건의 아버지)의 진영(초상화)를 훔쳐갔다.”
왜구의 물불 가리지않은 약탈이 얼마나 심했던지 1380년(우왕 6년) ‘왜구의 침입을 피하려고 가은현(경북 문경) 양산사에 있던 태조(왕건)의 진영을 순흥 용천사로 옮겼다’(<고려사>)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일본학자도 시사한 약탈설
부석사가 있던 충남 서산도 왜구의 사냥터였다.
<고려사>에는 1352년부터 1381년 사이(1352·1375·1378·1380·1381년) 왜구가 서산(서주) 일대를 침략했다는 기사가 5차례나 보인다.
특히 1380년 7월엔 “왜적이 서주를 침략하고 부여·정산(청양)·유성 등의 일대를 침입해서 계룡산까지 이르렀다”는 기사가 있다.
서산의 승려와 재가 신도, 하층민까지 뜻을 모아 불상을 주조한 때는 1330년이다.
이것은 불상을 만든 다음 기록한 조성문에 분명히 나오니 빼도박도 못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왜구가 서산 일대를 침탈했다는 1352~1381년 사이 약탈해간 것은 아닐까.
그것이 합리적인 추론이 아닐까.
중요한 단서가 1970년대 일본 학자 기쿠다케 준이치(菊竹淳一)의 논평에 있다.
기쿠다케는 이 불상을 다룬 <대마의 미술>(1978년)에서 “관음사는 왜구의 한 집단인 것으로 여겨지는 고노씨가 창건했으며, 1330년 제작된 고려불상이 존재하는 것은 일방적인 청구가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고 했다.
‘일방적인 청구’가 약탈해서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떼를 써서 받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교역이나 기증을 통한 정상적인 교류가 아니었음을 일본 학자도 인정한 것이다.
■약탈품을 빼앗았으니 범죄가 아니다?
지난 2012년 한국의 절도범 일당이 대마도(쓰시마)로 가서 관음사(觀音寺·간논지)의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해신신사(海神神社·가이진 진사)의 금동여래입상을 순식간에 훔쳤다.
단 1시간 반 만에 고려후기(관음보살좌상)과 통일신라(금동여래입상) 시대의 문화재를 훔친 것이다.
아무도 지키지 않은 일본 신사와 사찰의 허점을 악용한 것이다.
이 두 문화재는 X-레이 탐지기가 없는 후쿠오카 하카다(博多) 항을 거쳐 부산세관을 무사통과했다.
물론 절도범 일당이 체포되고, 문화재 2점이 회수되었지만 한·일간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그래도 한국 내에서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바람에 2015년 7월 가이진 사로 보냈다. 문제는 관음사에서 훔쳐온 관세음보살좌상이었다.
충남 서산 부석사가 “원래 부석사에서 제작된 불상이고, 왜구가 약탈한 게 분명하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한·일 양국 간 뜨거운 여론전이 이어졌다.
얼마전 대전지법은 “불상은 부석사의 소유로 넉넉히 인정된다고 추정된다”며 부석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1330년 서산 부석사에서 제작된 기록이 분명히 존재하고, 1352~1381년 사이 왜구의 약탈로 불법 반출되었음에 틀림없다는 부석사측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 불상은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소용돌이에 놓여있다. 법원의 판결대로 이 불상은 왜구의 약탈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대마도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국의 생떼인가
불상은 사실 빙산의 일각이 아닌가. 왜구의 침탈과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갔는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집계한 해외소재 문화재는 총 20개국 16만7968점(2016년 9월 현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일본에 있는 한국 문화재는 7만1422점이다. 전체 해외소재 문화재의 42.52%에 달한다.
상당수는 무덤에서 금닭이 운다는 등의 헛소문을 퍼뜨리고 총칼을 겨눈채 생무덤을 파헤쳐 가져간 문화재들이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일이 아닌가.
이런 분통터지는 역사를 경험했는데, 한국 절도범이 7만점이 넘는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 중 2점을 훔쳐온 것이 무슨 대수인가.
일본이 약탈해간 문화재를 훔쳐온게 무슨 큰 죄냐는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다.
하기야 그렇게 중요한 문화재라면 제대로 지켰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는 신사와 사찰에서 훔쳤고, X레이 검색대도 설치하지 않은 항구를 무사통과했다?
그것이 과연 절도범만의 책임일까.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일본은 책임이 없는 것일까. 게다가 일본측의 과민반응도 한국내 민족감정을 한껏 자극했다.
예컨대 도난사건이 난 이후 관음사 주지를 지낸 사람은 “한국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라고 비난했다.
“불상은 조선의 불교탄압 와중에 불상의 몰수나 파괴의 참상을 보다못해 구출해낸 것이며…따라서 이 발상이 대마도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한국인들이 생떼를 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도 여러 차례 한국 정부에 도난문화재를 빨리 반환하라고 압박하면서 한국내 여론을 악화시켰다.
■‘괘씸한 일본이니까…애 좀 먹일까’
사실 이 금동근음보살좌상의 일본 반환과 관련해서 참고할 수 있는 법령은 두가지다.
1970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문화재불법 반출입 등에 대한 협약’은 ‘불법반출된 문화재는 본래 소장처가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해놓았다.
그러나 단서가 하나 있다. 협약이 채택된 1970년 이후 반출된 문화재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설혹 약탈품이라고 해도 이미 500~600년 지난 일이기에 유네스코 협약과는 관계없다.
그렇다면 국내법은 어떤가. ‘문화재보호법 20조’는 ‘국내에 반입된 외국문화재가 불법 반출된 문화재였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그 문화재를 회수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일본이 약탈해간 문화재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내용들은 정황에 따른 추정일 뿐이다. 정황은 확실한데 확증은 없는 것이다.
물론 적반하장식의 반응을 보이는 일본의 행태가 괘씸하고, 또 속이 무척 쓰린 일이다. 그 가운데는 괘씸한 일본이니만큼 돌려주더라도 애 좀 먹이고 돌려주자는 여론도 분명 존재한다.
이즈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소탐대실의 우려이다.
도난품이 분명한 이 한 점의 문화재를 고집하다보면 앞으로의 문화재 반환운동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앞서 밝혔듯 지금 16만점이 넘는 한국문화재가 해외에 있고, 그중 7만점을 웃도는 문화재가 일본에 있다.
‘훔쳐온’ 금동불상 한 점 때문에 나머지 문화재의 반환협상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명백한 장물인데 그것을 두고 ‘옛날에 너희들이 훔쳐간 것을 다시 훔쳐온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따라서 금동불상좌살이 약탈문화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더라도 ‘절도’가 아니라 ‘적법한 절차’에 의해 돌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들린다.
■나무관세음보살…
새삼 관음보살의 의미를 살펴본다. 관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법화경> 보문품에 나오는 ‘관음’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해탈시켜 준다”고 되어 있다.
불교를 믿는 이들이 무의식으로 하는 말이 바로 ‘나무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에게 ‘돌아가 의지(나무·南無)’한다는 뜻이다.
서산 부석사-대마도 관음사를 거쳐 다시 절도범의 가방에 들려 귀향한 관음보살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스님의 말처럼 불교란 무엇인가. 무소유 아닌가.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잠시 머물 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서슬퍼런 핏대를 풀고 이성을 찾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볼 때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정은우, ‘서일본지역의 고려불상과 부석사 동조관음보살좌상’, <동악미술사학> 제14호, 동악무실사학회. 2013년 6월
김경임, <서산 부석사 관음상의 눈물>, 곰시, 2015년
문명대,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역사적 의미’, <계간 한국의 고고학> 통권 24호, 주류성 출판사, 2013년 10월
‘대마도의 한국불상 고찰’. <불교미술> 8권, 동국대, 1978년
남기학, ‘중세 고려·일본 관계의 쟁점-몽골의 일본 침략과 왜구’, <일본역사연구> 제17집, 일본사학회, 2003년
혜문, ‘종교칼럼-대마도 불상과 부처님의 뜻’, 대전일보, 2014년 4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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