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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부산 시내 한복판에서 찾은 처녀분의 실체

ㆍ가야고분 속 신라 금동관의 사연을 더듬다

피란민의 애환이 담긴 무허가 판자촌. 지상의 가난한 이들의 삶터 밑엔 부유하고 강력했던 1500년전 선인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지만 말머리장식 뿔잔·철덩어리·금관은 그들이 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터전을 잡았던 부산 동래 복천동 구릉. 그러나 이곳은 자연구릉이 아니라 AD 2~AD 7세기 사이 500년간이나 조성된 옛 선인들의 공동묘지였다. <복천박물관 제공>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 부두에~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한국전쟁으로 피란길에 오른 이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다. 노래가사에서 절절이 담겨있듯 부산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갈곳없던 피란민들은 1평의 땅이라도 빈곳이라면 무작정 터를 잡고 판잣집을 지었다. 당시엔 그것을 일본말로 ‘하꼬방’이라 했다. 동래 중심지 북쪽에 반달모양으로 뻗어있던, 수풀로 무성한 야트막한 구릉도 금세 피란민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피란민들의 애환이 담긴 바로 그곳이 AD 2~AD 7세기 사이 500년 동안 터전을 잡고 살았던 선인들의 공동묘지일 줄이야. 

1969년, 부산시는 동래구 복천동 구릉에 조성돼있던 이 무허가 판자촌을 민간인들에게 불하했다. 택지개발공사가 시작됐다.

무허가 판자촌 땅밑은 거대한 고분군이었다

그러던 9월 중순. 불도저와 포클레인으로 터파기를 하던 공사관계자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자꾸 토기편들이 보인 것이다. 급기야는 경사면에 구멍이 뻥 뚫어지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들은 사태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공사를 강행했다. 어이없게도 구멍(무덤방) 안에 있던 유물들이 무단으로 반출되기 시작했다. 

“새마을 지도자가 동래구청에 신고하지 않았다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될 뻔했어요.”

당시 동아대박물관에 근무했던 이용현씨의 회고다. 공사는 뒤늦게나마 중단되었다. 

“현장에 급파된 부산시 공무원이 오후 7시가 되어서 무단 반출된 유물들을 급히 수습해서 구청으로 이관했어요.”

이튿날 마을사람들이 한 두 점씩 가져간 유물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일단 구청에서 자진신고를 권유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가져간 유물들이 모두 회수되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4일 뒤인 22일,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은 김병모 학예사(현 고려문화재연구원장)를 급파, 상황을 정리하도록 한다. 긴급발굴 결정이 내려지고 동아대박물관이 발굴을 맡기로 한다.

“복천동에서 일어난 불상사는 당시 경남 문화재전문위원이자 동아대 전임강사였던 김동호씨(작고)가 처음부터 간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아대박물관이 발굴을 맡았어요.”(고고학자 조유전 선생)

발굴비용은 동아대가 부담하기로 했다.

“요즘엔 수익자부담의 원칙에 따라 사업시행자가 발굴비용을 부담하는데, 당시엔 그런 개념이 없었어요. 문화재관리국이 당연히 담당해야 했는데, 이미 그해 8월부터 동삼동패총을 발굴하느라 복천동에 돈과 인력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지. 그런 상황에서 비용을 동아대 측에서 담당해준다니 얼마나 고마웠겠어요.”(조유전 선생)

다행히도 당시 동아대 정재환 총장은 문화유산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정 총장은 사재를 털어 일본으로 유출되려던 숱한 문화재를 구입했고, 동아대박물관에 이를 모두 기증했다. 

“동아대박물관에는 국보 2점, 보물 10점을 포함해 수많은 유물들이 소장돼있는데, 복천동 출토 말머리 모양 뿔잔(마두식각배·馬頭式角杯·보물 598호)을 뺀 나머지 국보·보물은 정 총장이 구입한 거예요. 엔화가 없으면 외상으로라도 구입해서 해외유출을 막았거든. 그런 분이었기에 선뜻 복천동 발굴비용을 부담한 것이죠.”(조유전 선생)

이용현씨가 덧붙인다.


복천동 고분에서 노출된 말머리 모양의 뿔잔. 보물로 지정됐다. 
“나중 얘기인데요. 복천동 발굴이 한창 진행중일 때 발굴단원들은 현장 옆에 있던 동래여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어요. 150원짜리 식사였던가.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그래서 발굴책임자인 김동호 선생이 총장실로 쫓아 올라갔어요. ‘총장님 낮에는 150원짜리 먹더라도 저녁에는 소주에 고기는 좀 먹어야겠습니다. 그래야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하고….”

전임강사 신분으로 총장실로 쫓아가서 그런 이야기까지 한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 하지만 정 총장은 ‘쿨’했다. “그래 일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야지”하며 군말없이 저녁식사 값 1000원씩을 책정했다. 

복천동 고분발굴은 이렇듯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기며 진행되었다. 추석을 보낸 뒤 29일부터 본격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발굴장은 동네주민들과, 소문을 듣고 구경나온 부산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발굴장에 서로 먼저 접근하려고 동네사람들끼리 싸우기도 했고, 때론 “신고한 X이 누구냐”며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어서 작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할 수 없이 경찰관들이 현장을 지키는 가운데 작업이 진행됐다. 또 하나의 해프닝.

천년수 소동

“공사 때문에 노출된 덮개석을 모두 들어내자 무덤방의 끝부분에서 엄청난 크기의 항아리가 확인됐어요. 높이가 109㎝, 입지름 53㎝였는데, 해방 이후 발굴된 항아리 가운데 최대 크기였지. 너무 무거워서 누구도 들고갈 수 없었던 거지요.”

항아리 안에는 파수고배(把手高杯·손잡이가 달린 긴 잔)가 9개나 들어있던 데다 물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할 수 없이 체인블록(chain block·사람의 힘으로 짐을 감아 올리는 도르래)이라는 재래방식으로 무덤의 덮개돌을 들어올린 뒤 항아리를 꺼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누군가가 입방정을 떤 것이다.

“항아리 물은 1000년간 정수를 거친 천년수(千年水)인데,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발굴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 사이에 큰 동요가 일어났다. 서로 그 물을 마시겠다고 아수라장이 된 것이었다.

겨우 뜯어 말려 소동은 진정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 현장에 와보니 항아리 안에 가득 있던 물은 단 한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범인도 잡지 못하고, 인부들은 오히려 발굴단원 짓이 아니냐고 의심까지 하고….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항아리 안의 물질에 대한 성분분석이 필수적이었을 텐데 예전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던 10월2일. 발굴단은 무덤방의 남쪽 부분을 조사중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좁은 공간이 있었는데, 언뜻 보니 뭔가 이상한 흔적이 보여요. 살살 다뤄보니 그것은 부식되어 있었지만 금동관이 바른 자세로 놓여져 있었어요.”

금동관은 도금한 엷은 동판으로 오려 만든 것이었는데, 출(出)자형 입화(立華)가 다섯개 붙어 있었다. 이 금동관은 옥류(玉類)와 매는 장식(繫飾)이 없는 단순한 형태였다. 

문제는 이 금동관의 형식, 즉 出자형 금동관은 전형적인 신라식이라는 것. 발굴단은 가야 무덤이 분명한 이 무덤에서 왜 신라 금동관이 나왔는지 의아해 했다. 또 하나 진귀한 유물은 철정(鐵鋌)이었다. 철정은 ㄷ자로 깔려 있었는데 10장을 1개조로 모두 10개조가 확인됐으니 100장에 이르렀다. 철정(금괴를 연상하면 좋다)과 관련된 기록은 일본서기 신공기 16년조(366년), 즉 백제왕(근초고왕)이 철정 40장을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내용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 철정은 어떻게 사용된 것일까.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弁辰)조를 보면 “(물건을) 사고 팔 때 철(鐵)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마치 중국에서 전폐(錢幣)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철정을 화폐처럼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1969년 확인된 금동관. 
재미있는 것은 이 무덤에서 확인된 철제 유물들을 분석해보면 모두 여기서 출토된 철정을 재료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요즘의 금괴처럼 화폐처럼 유통도 되고, 철기의 재료도 되었던 것이다. 그외 전장 78㎝에 검신만 해도 68㎝, 검신폭 6.5㎝에 이르는 태검(太劍)과, 철창, 철촉 등 무기류와 말재갈 같은 마구류 등 상당수의 철기류가 확인됐다. 

이 무덤은 복천동 1호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이 긴급수습 발굴은 그야말로 서막에 불과했다.

1970년에는 유명한 말머리 장식 뿔잔(馬頭式角杯)이 확인됐다. 

“살살 노출시켜보니 그것은 말머리 장식을 한 뿔잔이잖아. 한 점도 아닌 두 점이 쌍둥이처럼. 깜짝 놀랐어요. 이것은 동서교류의 흔적이 틀림없다고 봤거든.”(김병모 당시 문화재관리국 학예사) 

말머리 모양 뿔잔은 고대 그리스·페르시아 등에서 확인된 리톤(Rhyton·뿔잔)을 연상시켰다. 중국 한나라 무덤에서도 보이는데, 술 또는 음료를 마시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출토된 이 뿔잔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후 간헐적인 발굴이 이어졌고 발굴주체도 동아대에서 부산대로 넘어갔다. 복천동 발굴도 휴지기에 들어갔다.

공무원들이 수호해낸 문화유산 

그러나 1980년, 또 한 번의 택지개량사업이 복천동에서 잠자고 있던 옛 사람들의 혼을 깨웠다. 부산시는 남아있는 복천동의 구릉지대에 연립주택을 짓겠다는 주민들의 요청을 허가했다. 금세라도 420가구의 연립주택 공사가 시작될 판이었다.

당시 부산시 문화공보실 소속 문화재관리관이었던 박유성씨(전 부산시립박물관장)와 부산대 임효택 박물관 조교가 현장으로 뛰어갔다. 박유성씨의 회고.

“현장에 가보니 이미 불도저가 들어와 있고, 가설사무실까지 마련해놓고 있었어요. 그냥 밀어버릴 판이었어요.”

대학동기생인 박유성·임효택씨는 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으나 “택지를 조성하기 전에는 반드시 문화재조사를 해야 하고 먼저 시굴하는 것이 순리”라는 끈질긴 설득 끝에 주민들은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시 부산시 문화재과장인 김부환씨는 시장을 설득해서 예비비로 발굴비를 받아냈다. 

“그 당시에 시굴조사라는 개념도 서있지 않을 때였는데, 공무원들이 해낸 겁니다. 김부환·박유성씨 같은 공무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복천동 발굴은 없었을 겁니다.”(정징원 전 부산대 교수)

우여곡절 끝에 시굴은 발굴허가가 난 지 4개월 만인 9월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진행된다.

“땅밑 10~40㎝ 정도만 시굴했는데 어마어마한 집단고분군 흔적이 확인되었어요.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들이 보이니 정식발굴 조사가 불가피해진 것입니다.”

정식발굴 결과, 도저히 더는 연립주택을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주·부곽이 일렬로 배치된 대형 목곽묘가 사상 처음으로 확인됐는데, 지표에서 2~3m 밑에서 노출된 11호분과 22호분은 완전한 처녀분이었어요. 특히 두 고분의 덮개돌 1개의 무게가 3t이나 됐고….”

낌새를 챈 연립주택 조합원들이 크게 동요했다. 공사가 계속 지연되는 가운데 유적보존 이야기가 솔솔 피어났기 때문이었다. 분노한 조합원들은 연일 시청으로 몰려가 거칠게 항의했다. 조합과 부산시의 창구역이었던 박유성이 성난 조합원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멱살을 잡힌 것은 다반사였는데…. 

어느 날도 조합원들과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데, 흥분한 조합원 한사람이 갑자기 들고 있던 호미를 박유성에게 휘둘렀다.(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