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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대왕

지난 6월18일 필자는 경향신문 70주년 기획인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이라는 답사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답사단원은 35명이었는데, 매우 즐거운 여정이었습니다. 답사단을 이끈 분은 저의 스승님이자 저명한 고고학자인 조유전 선생이었습니다. 조유전 선생은 서울대 고고학과 2기 졸업생으로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으로 경주 감은사 황룡사지 안압지 월성과 백제 무령왕릉을 발굴하신 고고학자입니다. 이번 경주여행은 감은사-대왕암-장항리사지-월성-황룡사지-분황사지를 돌았습니다. 공통점은 '터'이자 '흔적'입니다. 하고많은 경주의 수많은 볼거리중에 왜 하필 터이고 흔적일까요. 저명한 고고학자와 떠나는 신라 1000년의 여행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는 2회에 걸쳐 고고학여행으로 듣는 신라 1000년의 여정입니다. 밑의 도움 글은 예전에 제가 조유전 선생과 다녀와서 쓴 '감은사 이야기'입니다.  신라 문무왕의 나라사랑이 '옛터'에 오롯이 남아있는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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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탑을 바라보던 김재원(당시 국립박물관장)의 절망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3층 석탑 해체를 위해 높이 12m, 사방 160㎝의 3층 탑신 위에서 일하고 있던 연구관 김정기(현 문화재보호재단 발굴조사단장)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3층 지붕받침돌을 연결한 나비장이음이 김정기의 무게 때문에 떨어지면서 옥개석이 기우뚱, 무너져 내렸다. 김정기 역시 추락사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순간 김정기는 기지를 발휘하여 탑 옆에 세워둔 비계목으로 건너뛰었다.
“살았다.” 김재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명횡사할 뻔했던 김정기는 일본 메이지(明治大) 건축과를 졸업하고 도쿄대(東京大) 건축학 연구실에서 한국건축사를 연구하면서 일본의 사찰 터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재원이 일제시대 때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 반환회담에 참석한 황수영(전 동국대 총장)을 통해 “조국을 위해서 일해 달라”는 간곡한 뜻을 전했다. 김정기는 그 말에 미련 없이 보따리를 사서 귀국했다. 조국의 스카우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염원을 담은 감은사 터. 아들 신문왕은 감은사 금당 바닥 밑에 구멍을 뚫어 지하공간을 만들어 용이 된 아버지가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감은사 금당터엔 지하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는 유구가 남아있다. 경주|강윤중 기자 

◇찬란한 사리 장엄구

김정기는 귀국하자마자 감은사 석탑 해체 복원공사 책임 감독관으로 일했는데, 하마터면 이 29살의 촉망받던 연구자가 죽을 뻔 한 것이었다.
이것은 1959년 12월31일, 경주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 절터 서 3층탑 발굴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위험천만한 순간은 결국 미증유의 발굴성과 대미를 장식하는 통과의례였을까. 고 김정기의 증언.
“하루 종일 진눈깨비가 내렸어요. 3층 탑신 위에서 혼자 쪼그리고 작업하고 있었죠. 그러다 위험천만한 일을 겪고는 다시 올라가 땅을 파다가 사리공(가로 28㎝, 세로 15㎝)을 발견했어요. 1,300년 동안 탑사이로 스며든 미세먼지가 쌓여 진흙처럼 굳어져 있었는데 얼마나 딱딱한지…. 자칫 사리공 안에 있을 사리 장치가 다치지 않을까 대나무로 만든 꼬챙이로만 조심스럽게 팠어요. 마침내 손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을 확보한 뒤 사리장치를 들어냈습니다.”
김정기의 말이 이어진다.
“흠뻑 젖은 옷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고 손발은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8시간 동안 어떻게 작업했는지 저 자신도 몰라요.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요. 그토록 기나긴 세월을 탑과 함께 자리를 지켜온 사리를 혼자의 힘으로 발굴했다는 기쁨. 저런 좁디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하루 종일 버텼는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신들린 것 같았어요. 1,300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무아의 경지 속에서 나 자신을 잊어버린 것인지 모르죠.”
연대가 확실한(682년)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석탑에서 처음으로 완벽한 상태의 사리를 발굴하는 순간이었다. 탑 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김재원이 ‘따끈따끈한 사리장치’를 신주 모시듯 서울 국립박물관으로 운반했다.
정밀조사가 벌어졌다. 4면에 사천왕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한 사리함 속에는 신장상(神將像)과 주악상(奏樂像) 등을 따로 만들어 장식한 사리기가 담겨있었다. 사리기 안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넣은 사리병(舍利甁)이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리유물은 한국의 고대 조각공예와 미술사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이 사리장치가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완벽한 상태로 발굴됐고 탑의 조성시기 또한 682년으로 분명하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 사리장치는 이른바 7세기 후반 신라 문화를 복원하는데 표준유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9년 조유전 선생이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 감은사 정비를 위한 전면발굴이 벌어졌다. 그 때 절의 가람배치를 밝혀냈다.
그리고 또 18년이 흐른 1997년 쌍둥이 탑인 감은사 동3층 석탑에 대한 해체복원공사 때 다시 사리장치가 발견됐다.
동·서 탑에서 나온 사리장치를 분석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01년 서탑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동탑에는 문무왕의 사리를 각각 안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충격적인 추론을 발표하게 된다.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은 무쇠로 만든 2m가 넘는 찰주(마치 거대한 피뢰침 같다)가 쌍탑 맨 꼭대기에 뾰족하게 솟아있는데 그 찰주를 장식하는 장식품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다는 점. 금동제품이라 누가 가져갔는지 모른다.
문제는 벌판에 엄청난 길이의 무쇠 찰주가 박힌 채 우뚝 선 쌍탑이 1,300년이 흐르는 동안 벼락을 맞아도 몇 십 번은 맞았을 텐데도 끄덕 없이 버텼다는 점이다.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은사 금당에 조성된 지하공간.

 

◇지하공간에 담긴 문무왕의 염원
사실 이 감은사가 국가안위를 걱정한 문무왕의 염원이 담긴 사찰이라는 문헌기록을 고고학적으로 처음 확인한 것은 서탑 사리기를 발견하기 한 달 반 전 쯤인 59년 11월 9일이었다.
당시 감은사 금당터를 조사하던 발굴 팀이 늘어선 석상(石床·돌 덮개)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건 죽 늘어선 돌 덮개들과 흙바닥 사이에 높이 60㎝ 정도의 지하공간이 마련돼 있다는 것이었다. 돌 덮개는 먼저 초석이 놓일 자리에 거칠게 다듬은 일변 90㎝, 두게 45㎝ 안팎의 정사각형 형태의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놓아 정면 5칸, 측면 3칸이 되도록 배열했다.
이 돌엔 ㄷ자형으로 홈을 파서 1.7m 안팎의 장대석을 남북으로 걸쳐 끼우도록 했다. 이 장대석은 모두 여섯 줄이다. 장대석들을 잇대어 마룻널처럼 올려놓았으니 그 밑은 밀폐된 지하공간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특이한 유구는 출토예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 구조상 필요에 의해 이 공간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건물의 기초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같은 시설은 거추장스럽고, 도리어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 뻔했다. 아니면 그 공간을 다른 건축적인 목적으로 썼을까. 그 또한 2척도 안되는, 그 정도의 공간이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련다.”

이때 발굴단이 생각해낸 것이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하(條下)의 주(註)에 인용된 ‘감은사 사중기(寺中記)’였다. 
“문무왕이 왜병진압을 위해 이 절을 창건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開耀·682년) 공사를 끝냈다. ‘금당 밑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는데(東向開一穴)‘ 이 구멍으로 용(문무왕)이 금당으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였다(乃龍之入寺施繞之備). 왕이 내린 유조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하였고,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만파식적조에는 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에 있는 작은 산이 물에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왕래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에게 명하여 점을 치니 ‘대왕의 아버지께서 지금 해룡이 되어 삼한을 진호(鎭護·난리를 진압하여 나라를 지킨다는 뜻)하고 계십니다’ 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에도 “문무왕이 동해구(東海口)의 대석 위에 장사지냈으며 속전(俗傳)에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감은사 터 금당 밑에 마련된 이 지하공간은 용이 된 문무왕이 국가안위를 걱정하며 출입했던 성스러운 곳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문무왕은 평소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내가 죽으면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 하겠다”고 다짐했다.
신라는 통일국가를 이뤘지만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끈질기게 괴롭혔던 왜의 위협에 당면했다.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감은사는 대왕암 바닷가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토함산 동쪽계곡에서 시작되는 대종천은 동해에서 경주까지 가장 가까운 뱃길 지름길이었다. 왜구침략이 빈번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을 안고 재위기간동안 이 감은사를 조영했으나 공사도중에 붕어한 것으로 보인다. 그 유업을 아들인 신문왕이 이어받아 완성한 뒤 부왕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문무왕의 유해를 뿌렸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는 대왕암. 국가차원에서 발굴조사를 벌이려 했다가 포기했다.

◇용이 된 문무왕의 출입통로

그렇다면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출입했다’는 통로, 즉 ‘섬돌아래’는 어디일까.
59년 발굴단은 “아마도 동쪽 기단 측면의 일부나 그렇지 않으면 중앙에 자리 잡은 돌계단 정면에 구멍 한군데를 열어놓았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고 얼버무렸다.
발굴결과 ‘용혈(龍穴)’로 지목된 동쪽 기단측면과 돌계단 정면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국립문화재연구소는 59년 1차 발굴과 79년부터 연구소가 실시한 2차 발굴 조사결과 등을 토대로 ‘섬돌아래 용혈’임을 가늠할 수 있는 유구를 조심스럽게 지목했다.
즉 지하 공간 유구의 동북모서리와 서남모서리 바닥에 남아있는 부석유구(敷石·돌 깔린 유구)이다. 조사단은 이 부석 유구의 양측 면에 측벽을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어 지하공간과 건물외부를 연결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했다.
이 유구는 전혀 비실용적인 것만은 아니다. 건축적인 측면에서 밀폐 지하공간이 지니는 약점을 보완하는, 즉 공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환기통로의 몫을 담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 실용적인 측면도 고려대상이지만 특히 동쪽모서리의 부석유구는 삼국유사 기록의 ‘東向開一穴’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구는 환기시설을 겸한 상징적인 의미의 용혈이 아닐까. 말하자면 용이 진짜 존재했다든가 금당으로 드나들었다든가 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하지만 문무왕의 얼이 용으로 변하여 출입하던 사찰이라는 상징적인 뜻을 지닌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삼국사기 ‘잡지’에는 감은사 성전(成典)이란 말이 나온다. 감은사에 사천왕사, 봉성사, 봉덕사, 봉은사처럼 중요사찰을 관리하는 직관을 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던 사찰’이니 왕실에서 특별 대우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