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눈과 귀만 보이고(태조), 왼쪽 뺨과 귀 부분이 없어지고(원종), 귀밑머리와 귀만 보이고(순조), 왼쪽 뺨과 코, 눈이 싹 다 날아가고(순종)…. 불에 타 흠결 투성이인 어진(임금 초상화)인지라 전통적인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이러한 어진들을 다름 아닌 ‘전쟁유산’으로 평가해 이른바 ‘근대적 문화유산’의 개념으로 문화재 등록을 추진한단다. 무슨 연유가 있는 것일까.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갔다가 불에 탄 원종(인조의 아버지·추존왕)어진. 그나마 원종어진은 얼굴의 반쯤은 남아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조선 임금의 어진 48점 중 영조 어진과 연잉군 어진 등 극히 일부만 살아남고 나머지 절대다수는 불에 탔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인 1954년 겨울로 돌아가보자. 그해 12월26일 아침 6시20분쯤, 부산 동광동 용두산 일대에서 큰 불이 났다. 당시 신문은 “불은 용두산 남쪽 동광동에서 전기공사 청부업을 하고 있는 정모(33)씨의 ‘식모’ 안모양(22)이 판자집 2층 마루바닥에 촛불을 켜놓고 잠자다가 옮겨붙는 바람에 삽시간에 번졌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해가 바뀐 1955년 1월6일 경향신문은 청천 벽력같은 후속기사를 쓴다.
“지난 26일 새벽에 부산 동광동 화재로 6·25 당시 부산으로 소개(疏開)했던 구황실 어용(御用)의 국보 중 12대 임금의 초상화(어진영·御眞影)와 <궁중일기> 등 약 4000점 중 3500점이 잿더미로 변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원래 조선 임금들의 어진(초상화·48점)은 창덕궁 선원전에 비장되어 있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 어진과 임금들의 친필인 어필, 역대 재상들을 그린 초상화, 궁중일기 등 4000여점을 동광동 부산 국악원 창고으로 피란시킨 바 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하려고 부산으로 피란시켰는데, 한 순간의 실수로 그만 불에 탄 것이다. 유물 중 반만 탔거나 재활용할 수 있는 물품 546점만 겨우 구해내어 광복동에 있던 국립박물관 창고에 보관했다.
순조(재위 1800~1834년)어진. 불에 타 귀밑머리와 귀 부분만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경향신문 기사는 “영조대왕과 철종대왕의 어진을 비롯해 2점의 임금 초상화와 34점의 역대 재상 초상화, 그리고 어필과 제기 등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마무리했다. 그에따라 지금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 어진 1점과 영조 어진(연잉군 시절 1점 포함) 2점, 철종 어진 1점, 익종(순조의 세자) 어진 1점, 초본 상태인 고종 어진 몇 점과 순종 어진 2점 정도 뿐이다. 겨우 살아남은 태조와 원종(인조의 아버지·추존왕), 순조, 순종 어진의 경우 불에 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 중 영조 어진(보물 제932호)와 연잉군 초상(보물 제1491호), 철종 어진(보물 제1492호)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된 어진 외에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여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어진 몇 점이 등록문화재(근대문화유산)로 등록추진된다. 어진이라고 해서 전통적인 문화유산 개념으로 등록되는게 아니라 한국전쟁(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11일 2020년 문화재청의 주요업무계획을 발표하면서 “6·25 70주년과 4·19 60주년을 맞아 6·25 전쟁 당시 사건·참전용사 유품 등과 4·19혁명의 생생한 기억을 문화유산을 집중발굴하여 등록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대상 유물은 1954년 화재로 불에 탄 것들 가운데 가까스로 살아남은 어진 중 일부인 태조·원종·순조·순종 어진 등 4점(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이다. 그나마 반쪽이나마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원종 어진 외 나머지 3점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도 훼손이 심하다.
태조어진. 조선의 창업주인 태조의 어진은 다수 제작됐다. 전신상과 반신상, 승마상 등 다양한 형식의 영정이 있었다. 명종 때인 1548년(명종 3년)까지만 해도 경복궁 선원전에 태조 영정이 무려 26축에 달할 정도였다. 현재 국보 제317호인 태조어진은 전북 전주의 경기전에 소장돼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태조어진은 1954년 부산 피란 도중 화재로 불에 탔다.그래도 눈과 귀는 보인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김동하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장은 “불에 탄 어진들은 6·25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참화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라는 판단 아래 등록문화재로 등록 추진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관련 국립고궁박물관은 ‘전쟁 시 불에 탄 특별전’(6월)을 개최한다.
이번에 등록 추진되는 6·25관련 유물 중에는 ‘유엔군 제1 거제도 포로수용소 잔재’(중계소와 통신시설물)와 ‘육군 전투상보’, ‘공군 작전기록물’, ‘보병과 더불어’ 악보(이상조 작곡), 박수헌 중위의 참전일기인 ‘혈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발굴대상으로 포함된 6·25 관련 유물은 39건이다. 올해 60주년을 맞는 4·19 관련 문화유산 중 등록문화재 대상에 오른 것은 ‘부상자 학생 명단’과 ‘계엄당국포고문’ 등 179건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순종어진.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은 남아있지만 디테일은 불에 탔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문화재청은 “4·19혁명 주역인 청년층의 자긍심을 유도하고 시민의 성숙한 민주주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유진 근대문화재과 사무관은 “지자체와 관련 기관의 정식추천을 받은 뒤 목록화 조사와 대국민 공모 등의 과정을 거쳐 등록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문화재청은 이와함께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지휘소와 철원 노동당사,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고성 합축교 등 기존 전쟁유산을 역사문화공간으로 복원정비할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또 파주(구 장단면사무소)~고성(합축교)~철원(노동당사·승일교 등) 구간을 DMZ(비무장지대) 평화의 길 사업과 연계한 전쟁체험장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이어 총탄으로 멈춰진 증기기관차 등 전쟁유산을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과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로 재현하고 4·19 시위광장 등을 동영상으로 제작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정재숙 청장은 “한국전쟁 70주년과 4·19 60주년을 맞아 관련 문화재를 발굴·복원·정비하고, 전쟁 관련 기록물 등 200여건을 목록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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