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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의 서원'…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이유다

(이 기사는 문화유산 채널 프로그램임 '문롸유산 알려줌'을 위해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안향의 옛집터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가을에 제사지내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이라 했다.” 1541년(중종 36년) 5월 22일 <중종실록>에 사관의 평을 빌려 언급된 ‘서원의 효시’ 기사이다. 

주세붕이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안향의 집터에 서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중종실록>은 “서원 좌우에 유생들이 거처하며 배우는 학교를 세웠고,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자를 받아 운영했고, 고을 백성 중에 준수한 자가 모여 먹고 배우게 했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뿐이 아니라 터를 닦다가 우연히 발견한 구리 300근으로 서울에서 유교 경전 뿐 아니라 정주(程朱·송나라 유학자인 정호·정이 형제와 주자를 일컬음)의 서적까지 죄다 구입해서 장서각(도서관)에 두었다.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서원 유사들과 관계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9년 뒤인 1550년(명종 5년) 2월 11일 명종 임금은 역시 풍기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1501~1570)의 상주에 따라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손수 짓고 편액(액자)과 서적, 노비까지 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계승(紹)하여 닦는다(修)는 뜻이다. 소수서원(백운동서원)처럼 ‘국가의 공인’을 받은 서원을, 임금이 액자(額)를 내린(賜) 서원이라 해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한다. 


■서원은 중국에서 시작됐지만… 

한데 서원은 주세붕이 창안한 것은 아니었다. <명종실록>은 “주세붕은 주문공의 백록동 서원을 모방해서 서원을 만든 것”이라 했다. 주문공은 남송의 유학자 주자(1130~1200)를 지칭한다. 서원은 원래 중국 남당(937∼975) 연간의 인물인 이발(李渤)이 은거했던 강서성(江西省) 노산(廬山)의 백록동이라는 곳에 학궁(백록서원)을 창건하고 스승과 생도를 가르친 데서 유래됐다. 그러나 북송 시대(960~1127)까지도 성행하지 않아 오직 4곳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남송(1127∼1279) 연간에 남강태수가 된 주자가 남송 효종(재위 1162~1189)의 사액을 받아 병란으로 폐허가 된 백록서원을 중수하고, 강학에 힘썼다. 주자는 이곳에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1017~1173)를 제사 지냈다.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은 바로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벤치마킹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든다. 지난해 7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왜 서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서원을 제치고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을까. 그렇지않아도 지난해 5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한국의 서원’에 대해 ‘등재 권고’를 결정하자 일부 언론은 중국내 민감한 여론을 전하기도 했다. 즉 “서원은 중국인이 가장 익숙한 곳이라며 중국 고대의 독특한 문화교육기구였다”(환구시보)는 것이다. 환구시보는 특히 “악록·백록동·숭양·응천 서원 등 중국에는 4대 서원이 있었으며 특히 청나라 말의 증국번(曾國藩·1811~1871), 좌종당(左宗棠·1812~1885) 등이 악록서원에서 공부했으니, 중국 근대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고 전했다. 환구시보는 “서원은 당대 중엽에서 시작해 청나라 말까지 1000여 년 동안 이어지며 중국 사대부를 키운 곳”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005년 11월에도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을 때도 중국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단오절을 빼앗아갔다”는 식의 여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문화재. 문화 13건, 자연 1건 등 모두 14건이다.

■서원의 교육목표는 과거합격이 아니었다

물론 한국의 서원이 중국의 서원을 벤치마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서원은 중국과 현저한 차별성을 지닌다. 단적인 예로 중국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관료양성을 위한 준비기구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절차탁마하는 곳인 동시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겸했다. 이것을 ‘존현양사(尊賢養士)’라 한다.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 달리 서원은 그곳에 배향된 선현의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였다. 

1550년(중종 5년) 백운동 서원(소수서원)의 사액을 처음 요청한 퇴계 이황의 상소를 보면 ‘한국 서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황은 “은거하며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를 강론하며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세상보다 한적인 들판이나 고요한 물가에서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천하의 의리를 살피면서 덕과 인을 쌓고 익혔기 때문에 서원에서 공부하는 것”이라 했다.

“국학(성균관·학당)이나 향교 등은 사람이 많은 곳에 있어서 법령에 구애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일(과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런 점에서 선비가 학문을 도모하고자 할 때와 어진 이를 구할 때도 서원이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 것입니다.”

서원이 입시(과거)준비나 하는 곳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서원에서는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고 이끌어가는 교두보가 되었고, 지침을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과 둔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이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6월 4일 항일의병을 일으킨 곳이 바로 무성서원(전북 태인)이었다.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북 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 9년 뒤인 1550년(명종 5년) 명종 임금이  ‘소수서원’이라 이름짓고 서적, 노비까지 하사한 사액서원이 되었다. 국내 최초의 서원이다.|문화재청 제공

■유네스코가 꼽은 ‘한국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을 평가하면서 꼽은 등재기준, 즉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는 무엇일까. 유네스코는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즉 대상 유산인 9곳의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이 세운 대표적인 사립 성리학 학교이다. 등재 기준 중 첫손으로 꼽히는 ‘OUV’는 대상 서원들이 성리학 가치에 부합되는 지식인을 양성했고, 지역의 대표 성리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향(제사를 지냄)했으며,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와 관련, “성리학자들은 서원에서 강학을 통해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세계를 이해했고, 정기적인 제향으로 학파의 결집을 도모했으며 교류를 통해 성리학에 부합한 향촌 교화활동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신청유산이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을 등재이유로 꼽았다. 즉 16세기 서원들이 처음 생길 때부터 정형화한 건축유형은 후대의 서원 건축에 모델이 되었다. 즉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안향의 옛 집터에 건립됐듯 서원은 제향인물의 연고지역에 자리잡았고, 성리학자의 전인교육에 적합한 환경을 선택했다. 

여기에 제향과 강학, 휴식 공간으로 나뉜다. 제향공간은 사당을 중심으로 하며, 선현들을 위한 제사가 베풀어진다. 강학공간은 학습의 전당인 강당과 동·서재(기숙사)를 포함한 구역이다. 휴식 공간은 잠시 책상을 떠나 머리를 식히고 심신을 고요히 유지하는 수신의 영역이다. 

각 공간은 지형과 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뚜렷한 건축전형을 완성했다. 입지를 고를 때부터 무척 신경썼다. 도산·병산·옥산서원 등의 경우 앞쪽에 맑고 깨끗한 계류와 긴 여울이 감싸고,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언제라도 누각에 오르거나 창문만 열어도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입지 선정에 심신 수양의 환경을 첫손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각 서원의 기본골격은 비슷했다. 사당과 강당, 동·소재와 내·외삼문, 전사청(제수를 준비하던 곳), 장서각(도서관) 등의 부속건물로 구성됐다. 강당이나 누각, 정자, 연못, 계류의 이름도 반드시 지었다. 그러나 허투루 짓지 않았다. 강당의 경우 성(誠), 중(中), 경(敬), 의(義), 인(仁), 예(禮), 덕(德), 도(道), 교(敎) 등 성리학의 핵심개념을 표방했고, 누각이나 정자는 연(蓮)이나 매(梅) 등 옛 성현이 사랑한 꽃이름이나 풍(風), 월(月), 산(山), 수(水)자 등이 포함된 이름이 많았다. 이것은 서원이 학문과 덕성의 터전인 동시에 본성을 보존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장수(藏修)의 공간임을 일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원은 교육과 제향 외에도 장판각을 통해 책을 펴내고,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 역할을 했으며. 각 지방의 향약을 기준으로 미풍양속을 장려하고 윤리에 어긋나게 행동한 자를 교화하는 기능도 겸했다. 향풍(鄕風)이 문란한 자에게는 ‘훼가출향(毁家黜鄕)’의 벌칙을 가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의 의례. 이황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사액을 주장하면서 “서원은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 달리 인격을 은둔선비들이 학문을 도야하는 곳”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 제공 

■순기능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순기능만 발휘된게 아니었다.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소수서원)을 연 이후 명종 연간(1545~1567)에만 17~18곳의 서원이 등장했고, 그중 사액서원은 4곳이나 됐다. 

이후 정치주도권이 사림으로 넘어간 선조 연간(1567~1608)에만 60곳 이상이 생겼고, 그 중 22곳이 사액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붕당의 당파형성은 학연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서원은 바로 그런 학연의 매개체였다. 

각 당파는 당세의 확장을 위해 지방별로 서원을 세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향촌사림으로서도 서원을 통해 중앙관료와 연결을 맺어 입신출세를 도모하고자 했다. 양자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으므로 서원이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1659~1674) 때까지 106년간 193곳이 설립되었고 숙종(1674~1720) 때는 무려 130곳이 넘는 사액서원이 등장했다. 서원철폐론이 등장한 1741년(영조 17년) 당시에는 서원과, 서원의 역할까지 한 사우 등을 합해 1000곳(정확히 909곳)에 이르게 됐다.  


■1000곳이 난립한 서원

그러니 서원의 순기능은 사라지고 역기능만 부각되었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서원이 각각 색깔을 정해 구별하고 당파를 모으고 다른 당을 공격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부역을 회피하는 자들이 서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그 폐단이 이루 말 할 수 없다”고 고발하고 있다.(‘인사문·서원’)

“조금만 명성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서원을 세웠다. 벼슬이 높고 자손이 번성한 자는 그 유람한 곳과 부임했던 고을마다 향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익은 특히 “한 사람을 위해 여러 곳의 서원을 세우는 것을 금했지만 권문세가의 집은 금하지 못했다”면서 법령의 문란함을 고발했다. 단적인 예로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배향하는 전국의 서원(사우 포함)이 무려 44곳에 이르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00리 쯤 되는 작은 고을에 서원(사당 포함)이 수십곳에 이른다”면서 사원의 폐해를 낱낱이 고한다.

“한 가문의 부자와 형제를 효행이라 칭송하고 나라를 위한 전쟁에서 죽었다고 창찬한다. 이에따라 서원(사당 포함) 1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인물이 12~13명에 이르기도 한다.”

정약용은 “심지어 자손이 번창하지 않는 개국 당시의 명신(名臣)을 자기 조상이라고 위조한 뒤 자랑스럽게 그 허위 조상을 기리는 서원(사당 포함)을 세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한탄했다.(<목민심서> ‘예전·제사’)

이 무슨 뜻인가. 원래 서원에 배향되는 인물은 뛰어난 유학자여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에서 벗어나 당쟁 중에 희생된 인물이라든가, 선정을 베푼 수령이라든가, 의리있는 유생이라든가, 자손이 귀해졌다는 이유로 배향되기도 했다. 


■서원철폐령의 철퇴

우후죽순 남설(濫設)된 서원은 학문과 인격 도야의 전당이 아니라 당쟁논의의 소굴이 되었고,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의 일도 가문과 학파의 성세를 자랑하는 짓에 지나지 않게 됐다.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 민폐의 본산이 됐으며, 세금과 부역 등을 면제하는 국가의 지원은 국가재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다보니 학문의 기능은 약화됐고, 이런저런 이유로 배향된 인물을 위헤 제사지내는 사우(사당)의 기능이 주로 강조됐다. 결국 서원과 사우가 혼동되었다. 이로써 서원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기에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가면갈수록 서원무용론을 넘어 서원철폐론이 대두되었다. 1741년(영조 17년) 4월8일 ‘갑오년(1714년·숙종 40년) 이후에 건립된 서원과 사우·영당 등 모든 제향 사원을 철폐하는 조치’를 내린 데 이어 급기야 1871년(고종 8년) 3월20일(음력) “백세토록 받들어야 할 충절 대의 제현을 기리는 47개 사액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의 현판을 떼라”(<고종실록>)는 명을 하달한다. 이것이 유명한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령이다.


■‘완전성과 진정성’을 갖춘 세계유산핟

물론 한국의 서원이 남긴 폐해 역시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역사이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의 된서리 속에서도 살아남은 한국의 서원은 누가 뭐라해도 조선을 지탱해온 성리학 교육기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16세기 중반~17세기까지 설립된 9개 서원은 성리학이 만개했던 조선 성리학 교육과 사회적 확산을 주도한 교육기관이자 유무형적이고 역사적인 톡특성의 탁월한 증거이다. 성리학자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지역의 인물을 제향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롤모델을 제시했고, 강학을 통해 학문을 계승했다. 그들은 교육에 필요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육시스템과 물리적 시설을 완성했다. 또한 사회교화와 정치활동 등 각종 활동의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성리학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유네스코 세계위는 “신청유산은 한국의 성리학 발전과 서원유형의 정립과정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하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서원 9개로 구성됐다”면서 “각각의 유산이 하나의 온전한 서원으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향·강학·유식(휴식) 및 교류 공간과 주변경관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또 16~17세기 건립된 신청유산들이 지금까지 원형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보존·계승되었음을 인정했다. 특히 서원을 거쳐간 인물들이 남긴 전적이나 문집, 기문, 목판도 잘 보호·관리되고 있고, 제향의식도 창건당시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유네스코 세계위원회는 “세계유산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인 완전성(integrity)과 진정성(authenticity)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연합뉴스 그래픽

■종합관리방안 마련이 필요, 

‘한국의 서원’은 2015년 제출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가 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ICOMOS)의 반려의견으로 철회되고, 이번에 재수 끝에 등재가 결정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반려 당시의 지적사항인 ‘주변 경관’의 관리 및 보존방안은 등재결정 이후에도 가장 중요한 숙제로 부각될 전망이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이번에 서원,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서원을 둘러싼 자연경관도 세계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밝혔다. 주변 경관의 보존없는 ‘한국의 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가치를 상실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9곳의 서원과 관련된 지자체가 14곳에 달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도 등재 이후 9개 서원의 통합 보존 관리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만큼 법적인 보호를 받는 기구의 출범도 고려해야 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