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교에 낭자한 핏자국을 보고(善竹橋頭血) 사람들은 슬퍼하지만 난 슬퍼하지 않으리.(人悲我不悲) 충신이 나라의 위기를 맞아(忠臣當國危) 죽지않고 또 무엇을 하겠는가.(不死更何爲)”
1947년 백범 김구 선생은 개성 선죽교를 탐방한 뒤 비분강개했다. 만 35년 간의 일제강점기가 끝났지만 외세에 의해 두 갈래로 찢긴 나라의 처지를 생각하면 울컥했을 것이다. 특히나 선죽교 다리 위에 지금도 남아있는 듯한 포은 정몽주의 핏자국을 보고 시 한 수 떠올리지 않는다면 어찌 의리와 충절의 후손이라 하겠는가.
■"포은의 피로 진혼가를 쓰겠다"
150년 전 인물인 18세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 역시 그랬다.(<청장관전서> ‘아정유고·선죽교’)
“울리는 철추 소리에 붉은 피 솟구쳐 물 속으로 흐르니(血激轟椎走水中) 고기들도 성내어 지느러미가 모두 붉었다오.(群魚拂鬱경皆紅) 붓을 선죽교 붉은 흔적에 푹 담가(持毫滿잠橋痕紫) 슬픈 노래 써서 귀신 울려 보련다.(寫出悲詞泣鬼雄)”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일파가 휘두른 철퇴를 맞고 쓰러졌으며, 그가 흘린 피가 물에 흘러 고기들도 성을 내고 지느러미에 붉은 물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덕무의 시적 상상력은 포은의 충절을 무한한 존경심으로 승화한다. 선죽교 위에 지금도 홍건한 피 흔적에 붓을 적셔 진혼가를 써서 정몽주에게 바친다는 것이다. 참으로 멋들어진 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덕무의 기행문인 ‘서해여언’을 보면 자못 흥미로운 대목이 엿보인다.
“초 5일, 개성부에 가서 선죽교를 찾아 돌 위를 맴돌았으나 충신이 흘린 피 흔적이 보이지 않기에 혼자 석표(石標)만 어루만지다가 돌아왔다.”
무슨 말인가. ‘선죽교’라는 시엔 선죽교 위에 홍건한 포은의 피로 붓을 찍어 포은을 위한 진혼가를 쓰겠다고 잔뜩 변죽을 올렸던 이덕무가 아닌가. 그런데 직접 현장을 가보니 선죽교 위에서 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애꿎은 석비만 만지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선죽교가 맞는가
이덕무가 만졌다는 비문은 무엇인가.
1740년(영조 16년) 9월 3일 개성을 방문했던 영조가 서울로 돌아가다가 선죽교에 들러 새겼던 비였다.
영조는 선죽교에 이르자 가마에서 내려 직접 14자의 글을 써서 개성유수에게 전하면서 ‘이 글씨를 새겨 비문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내용은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어갈 것이니(道德精忠亘萬古) 포은공의 곧은 절개는 태산처럼 높구나(泰山高節圃隱公)’였다. 영조는 또 대제학 오원에게 “포은의 공적을 비문의 뒷면에 새기라”고 명했고, 어가행렬을 이끄는 북소리를 멈추라고 했다. 어진 이, 즉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린 것이다. 사실 이덕무의 ‘선죽교 시’와 ‘서해여언’ 기행문은 좀체 풀리지 않는 ‘선죽교 논쟁’의 핵심을 모두 담고 있다.
사실 선죽교는 만고의 충신 정몽주의 순절처로 각인되고 있다. 이덕무와 백범은 물론 수많은 이들이 ‘충절의 성역’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원래는 선지교였는데, 정몽주의 붉은 혈흔이 흘렀고, 그의 충성의 상징인 혈죽(血竹)이 다리 위에 올라오는 이적에 생겨 선죽교(善竹橋)란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을 믿지 않은 이가 없었다. 북한에서도 역시 국보(159호)로 존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신성불가침한 역사적인 사실일까, 혹은 그저 믿고 싶어 하는 신화일 뿐일까.
철옹성 같은 선죽교설에 의문을 제기한 이가 있었다. 1877년(헌종 13년)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을 찬술한 한재렴(1775~1818)이다. 한재렴은 “선죽이란 지명은 포은이 순절하기 전의 기록인 목은 이색의 <목은집>에도 보이며, 무엇보다 조선 전기의 인물인 채수(1449~1515)의 기행문인 ‘유송도록’에도 증장하지 않는다”며 선죽교설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그러다가 1939년 개성박물관장을 지내던 고유섭이 <조광> 9월호에 선죽교 순교설에 의문을 제기했고, 다시 1979년 문경현이 논문 ‘정몽주 순절처의 신고찰’에서 재차 부정적인 논증을 펴서 선죽교 순절설을 부인했다.
■“선죽교설은 근거가 없다”
왜 이들은 ‘근거없음’을 주장했던 것일까.
한재렴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포은 정몽주의 피살을 다룬 당대의 기록(<고려사>, <용비어천가>, <고려사절요> 등)에는 ‘선죽교’가 보이지 않는다. 이들 정사를 종합하여 정몽주의 최후 순간을 더듬어보자.
“정몽주가 말을 타고 귀가길에 올랐을 때 길목에 조영규의 암살단 일당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몽주가 지나가자 조영규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병기로 쳤으나 맞지 않았다. 놀란 정몽주가 돌아보며 노도와 같이 화를 냈다. 그는 필사의 탈주를 감행했다. 조영규가 추격해와서 말의 목을 내리치니 포은이 땅에 떨어졌다. 암살단의 일원인 고여 등이 포은의 목을 쳐서 쓰러졌다.”
선죽교란 이름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 조선정부가 편찬한 이른바 관찬서는 그렇다치고 성현의 <용재총화>와 심광세의 <해동악부> 등도 ‘선죽교’는 보이지 않는다.
“매헌 권우(1363~1419, 포은의 제자)가 길에서 포은을 만났는데 무사 몇 명이 포은의 말 앞을 가로질러 갔다. 비키라는 고함에도 불온하게 굴었다. 공기가 매우 험악했다. 포은은 죽음의 그림자를 예견한 것 같았다. 권우에게 ‘나를 따르지 말라’고 소리쳤다. 권우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나중에 정시중(몽주)이 살해당했다는 소리를 들었다.”(<용재총화>)
“귀로길에 무장한 무사들이 불손하게 지나치자 포은은 녹사(錄事·수행한 하급관리)에게 ‘너는 떨어져가는게 좋겠다’고 했다. 녹사가 ‘소생이 재상을 버리고 어디 가겠냐’고 따라왔다. 포은은 매섭게 꾸짖어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충직한 녹사는 포온을 수행했고, 결국 함께 부둥켜 안고 죽었다.”(<해동악부>)
여기서도 ‘선죽교’의 표현이 없다. 조선 전기의 편찬물인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통감>, <동국사략> 등에도 마찬가지다.
정몽주의 집에 세운 숭양서원. 개국초 ‘간신’으로 폄훼된 정몽주는 곧 만고의 충신으로 존숭됐다.
■갑자기 나타난 선죽교의 피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부터 슬그머니 ‘선죽교 순절설’이 등장한다.
윤두수(1533~1601)의 1581년 작인 <성인록>을 보라.
“오호라, 시시(柴市)와 선죽교(善竹橋)에는 이미 천년의 푸른 피가 남아 있거니와(嗚呼柴市竹橋留千年之碧血) 높은 산, 큰길과 같은 덕행에 어찌 후세를 위한 표적(標的)을 남기지 않을 수 있으랴.”(<오음유고> ‘성인록 발’)
윤두수가 쓴 성인록은 송나라 문천상과 고려 정몽주의 충절을 비교한 책이다. 문천상(1236~1282)은 남송의 충신으로 원나라 포로가 되어 연경(북경)에 3년간이나 인질로 잡혔지만 끝내 항복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가 죽은 인물이다. 윤두수의 시에 등장하는 시시(柴市)는 문천상이 순절한 지명이다.
즉 윤두수는 문천상이 죽은 시시와 정몽주가 순절한 선죽교에 지워지지 않는 충절의 피가 남아있다고 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선죽교설이 계속 제기된다. 차천로(1556~1615)는 포은 정몽주를 중국 고대 상나라 제후국(고죽국)의 충신 백이·숙제와 비교하는 시를 남긴다.
“선죽이 고죽의 뒤를 이으니(善竹連孤竹) 청풍이 시원하게 고금에 불었네.(淸風灑古今) 포은의 절개는 늠름한 서리 같고(凜霜圃隱節) 백이의 마음은 열렬한 태양 같네(烈日伯夷心) 석재가 오래되어 다리에 틈 생기고(石老危橋하) 산그늘이 져 가자 모색이 짙어졌지(山陰暮色沈)”(<오산집> ‘선죽교’)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주나라에 의해 멸망 당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는 희대의 충신이다. 포은 정몽주를 백이·숙제와 견준다는 것은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차천로는 포은을 모신 ‘숭양서원’을 주제로 읊은 시에서도 “상심해라. 선죽교 앞 흘러가는 시냇물이(傷心善竹橋前水) 울먹이며 그대보고 시 한 수 지으라네(嗚咽煩君賦一詩)”라고 했다.
■포은은 백이·숙제이고, 문천상이다.
풍운아 허균(1569~1604)은 포은의 옛집을 지나가면서 ‘선죽교에 뿌려진 피’를 노래했다.(<성소부부고> ‘무술서행록’)
“포은이라 정 선생은 고려 말 그 시절에(圃隱先生在麗末) 충절이 늠름하다 어느 누가 빼앗으랴.(忠節凜然不可奪)~선죽교라 다리 위 뿌려진 한 줄기 피(善竹橋頭一腔血) 이름은 우뚝 솟아 서산과 나란하니(名與西山병추줄산)…”
허균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최립(1539~1612)과 신흠(1566~1628)도 정몽주의 충절과 선죽교를 연결시키고 있다.
“선죽교를 마음 아프게만 생각할게 아니다.(不用傷心善竹橋) 망하는 나라 위해 충신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忠臣自合死前朝)”(최립의 <간이집>)
“예로부터 영웅들이 성쇠를 반복한 곳(從古英雄遞盛衰)~처량해라 선죽교의 언저리를 가는 몸(凄량善竹橋邊路)…”(신흠의 <상촌집>)
이들보다 약간 후대의 인물인 김창협(1651~1708)은 포은을 또다른 역사적인 인물과 견주며 칭송한다.(<농암집>)
“…시냇가 작은 비석 고려 왕조 기록일세.(溪邊短碣記麗朝) 지금까지 장홍의 피 남아 있는 듯한데( 至今疑有장弘血) 만고토록 예양 다리 그 슬픔과 마찬가지(終古悲同豫讓橋)”
(<농암집>)
시에 등장하는 장홍은 춘추시대 주나라 영왕 때의 충신이다. 모함을 받아 촉나라로 쫓겨가자 할복자살했는데 그 때 흘린 피가 3년 뒤에 푸른 옥으로 변했다고 한다.(<장자> ‘외물’) 또 등장하는 예양은 춘추전국시대 진(晋)나라 인물이다. 자신이 모시던 주인(지백)의 원수를 갚으려고 비수를 품고 다리 밑에 숨었다가 발각됐다. 변함없는 충절을 상징하는 또다른 인물이다.
결국 포은은 역사에 등장하는 불멸의 충신들, 즉 백이·숙제, 문천상, 장홍, 예양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로 평가됐고, 선죽교는 충절의 성소로 함께 부각됐던 것이다.
■역적의 수괴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다 알다시피 포은 정몽주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포은을 죽인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걸림돌이자, 역적의 수괴였다.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은 “간신 정몽주가 전하(태조 이성계)를 죽이려다가 1392년 4월4일 참형을 당했다”(<태조실록>)고 했다. 정몽주는 ‘간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딱 9년 만인 1401년(태종 1년) 반전의 평가가 내려진다. 그것도 간신 정몽주를 처단한 태종이 정몽주에게 상반된 평가를 내린 것이다. 즉 당시 참찬문하부사 권근은 막 즉위한 태종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 즉 ‘치도(治道) 6조목’을 권고했는데 5번째 조항이 정몽주 이야기였다.
“임금이 의(義)를 받들어 창업할 때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불복하는 이는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창업을 이루고 수성(守成)할 때는 반드시 전대에 절의를 다한 신하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만세의 강상(綱常)을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다음 권근은 정몽주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정몽주가 천명과 인심이 태상왕(태조)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몰랐겠습니까. 그렇지만 자기 몸이 보전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섬기던 곳’(고려)에 마음을 주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대절(大節·죽음을 각오한 절개)을 빼앗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때 권근이 비교한 인물이 바로 앞서 거론한 윤두수가 인용한 남송의 문천상이었다. 권근은 남송을 위해 죽은 문천상을 원나라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추증했음을 인용, “바로 문천상을 추증한 원나라처럼 정몽주를 절개의 상징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창업 때와 수성 때는 다른 법이다
권근의 상언 가운데 ‘수성할 때는 절의있는 자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반을 잡은 만큼 이제는 그 조선을 지키는 절의있는 신하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나라를 세울 때는 걸림돌이었지만 창업한 다음에는 정몽주 같은 충신을 선양해야 했던 것이다.
태종은 권근의 상소를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문충(文忠)’의 시호와 ‘영의정 부사’의 직함을 추증했다.
정몽주는 이미 이때부터 ‘간신’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포은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존숭의 대상’이 됐다.
유학자들은 정몽주의 학문이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정몽주를 한국 도학(道學·주자학)의 시조로 꼽았다.
기대승(1527~1572)은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조종이 됐는데 불행히도 고려가 망하는 바람에 살신성인했다”고 평했다.
이황(1501~1570)은 “정몽주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가히 천지의 경위(經緯·씨줄과 날줄)가 되고 우주의 동량이 될만 하다.”고 추앙했다.
송시열(1607~1689)은 “포은 선생이 출생하심은 고려조의 행운이 아니라 조선의 행운”이라 했다.(<포은집> ‘중간서·重刊序’)
■숙종과 영조, 고종의 한목소리는 ‘선죽교의 피로…’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병란이 잇따르면서 충절의 대명사인 포은의 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전란으로 민심이 크게 흔들려 임금과 조정을 욕하고 신하들마저 임금 곁을 떠나는 등 참담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따라간 명망대신들은 단 17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조선이 망한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모두 임금 곁을 떠났다. 백성들은 임금이 지나가는 길에서 “나라님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사관들은 사초책까지 불에 태우고 줄행랑 쳤다. 가히 조선사회는 붕괴직전이었다.
이처럼 와해위기에 빠진 조선의 봉건사회 근간을 구축하려는 방책으로 꼽힌 것이 바로 충신·효자의 현창사업이었다. 당파싸움을 교묘히 이용하며 군주권을 행사한 숙종과, 친형 독살설의 와중에 즉위해 정통성이 떨어졌고, 무신난 등 정치적인 고비를 넘겼던 영조, 그리고 외세의 파고 속에서 헤맸던 고종까지 정몽주의 충절을 떠받들며 ‘선죽교’를 노래했다.
예컨대 숙종은 1693년 개성의 제릉과 후릉을 참배하는 길에 정몽주의 유허에 건립한 숭양서원에 ‘선죽의 맑은 바람(善竹淸風)’ 운운하는 치제문을 내렸다. 숙종은 포은을 찬양하는 시를 친히 짓고, 포은의 단심가를 읊으며 감격했으며 포은을 동국 제일의 충신으로 추존했다.
고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1882년(고종 9년) 제릉·후릉 참배 때 선죽교에 들러 다리 위에 혈흔을 보고 “선죽교 위의 혈흔이 마치 새 것인양 뚜렷하구나(善竹橋石上血痕 宛然如新)”라 감탄하는 시를 남겼다.
■포은의 순절처는 어디?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순절했는지 아닌지는 사실 누구도 모른다.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
1979년 ‘선죽교 순절처설’을 부인하는 논문을 쓴 문경현은 포은이 순절한 곳은 당시 포은이 거주했던 동네임 태묘동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문경현은 포은이 순절한 후 93년이 지난 1485년(성종 16년) 추강 남효온이 개성을 답사하면서 남긴 기행문을 근거로 제시한다.
즉 남효온은 포은이 죽은 지 20~30년 후에 태어난 한수라는 노인의 증언을 기록했다. 한수라는 노인이 “포은은 토령고개를 넘어 반리 쯤 가서 포은이 거주하던 동리인 태묘동 입구의 누초(樓礎)에서 격살됐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태묘동은 고려임금의 신위를 모신 태묘(太廟)가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당이 있던 지역이어서 후미지고 수풀이 울창해서 암살단이 잠복하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실제로 선죽교에서 죽었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겠다.
만약 선죽교의 이야기가 진짜였다면 더군다나 자세하게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포은이 간신의 너울을 벗고 충신으로 거듭났다 해도 선죽교설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길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임진왜란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충절의 현창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비로소 공론화됐을 가능성이 없지않다.
■정몽주의 충절에 대한 오해
그렇든 저렇든 간에 선죽교는 앞으로도 만고의 충신이 남긴 피가 서린 ‘천고충절의 성역’으로 숭상될 수밖에 없다.
하기야 어떤 나라, 어떤 정권이 ‘선죽교 순절처설’을 굳이 부인하겠는가. 나라와 정권을 위한 충절의 표상으로 삼아 대대적으로 현창해도 시원치않을 판에…. 북한 역시 선죽교를 국보로 삼아 성역화 작업에 힘써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다. 정몽주의 충절은 정권을 향한, 임금을 향한 무조건의 충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1478년(성종 9년) 6월 3일, 동부승지 김계창이 소동파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몽주·길재 충절의 요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송나라 임금이 소동파에게 ‘절의있는 선비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동파는 ‘평시에 할 말 다하고 극간을 하는 자는 절의있는 선비이고, 아부하며 순종하는 자는 간신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정몽주와 길재 두 사람뿐입니다. 임금은 절의있는 선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정말로 현창해야 할 정몽주의 충절이 바로 이것이다. ‘할 말을 다하고 극간을 하는’ 충절 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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