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 때만 되면 대학가가 몸살을 앓습니다. 이른바 신입생 환영회 때문이죠. 작년에도 어떤 대학에서 신입생들이 묶는 방 이름을 무슨 '아이 러브 유방'이니 '자아도 만져방'이니 짓고 이상한 춤을 추도록 강요한 일이 일어나더니 올해도 유사성행위를 묘사하는 몸동작을 제시하는 게임을 하고, 여학생을 암학생 무릎 위에 올려놓는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그 추태가 드러난 대학이 생겼습니다. 각 언론의 단골 제목은 '술에 찌든 대학' 뭐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새내기들에게 술을 강제로 먹이고, 성희롱을 자행하며, 군기를 잡는 행위는 도댜체 어디서 배운 버릇일까요. 뿌리가 깊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고려 우왕 때 처음 생긴 신입관리 신고식이 시간이 갈수록 추태로 변했답니다. 심지어 9번이나 장원을 했던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 율곡 이이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까지도 혹독한 신입생 환영회를 겼었다지요. 그래서 이번 주 팟캐스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72회 주제를 '율곡과 다산도 혹독하게 당했던 조선의 신입생 환영회'로 잡았습니다. 조선을 강타한 그 무자비한 신입생 환영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신입생 환영회의 신고식의 역사는 뿌리깊다. 처음 취지는 그래도 긍정적이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부모의 권세 덕분에 벼슬길에 오른 ‘음서’ 자제들의 콧대를 꺾으려 했다니 말이다.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 입학생들도 절도와 격식을 갖춘 입학식을 거쳐야 했다. 재회(齋會·학생회)의 간부들은 새내기들과 상읍례(팔꿈치를 구부려 가지런히 모은 손을 눈높이로 올리는 예절)를 나눴다. 상견례 후에는 비공식적인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사(기숙사)에 들어오는 신입생들은 자신의 재력에 걸맞은 음식을 차려놓고 선배들과 나눴다. 이것이 신방례(혹은 접방례)이다. 신방례는 처음엔 순수했을테지만 차츰 변질됐다. “재학생들이 신입생들에게 주악단(춤과 노래)까지 동원하여 술판을 벌이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가난한 유생들은 기숙사 입소를 포기합니다.”(1541년 예조의 상소문)
중종 임금은 신방례 때 술과 음식을 강요한 선배들에게 ‘과거응시 금지’의 엄벌을 내린다. 그러나 이같은 관행은 좀체 근절되지 않는다. 성균관에서 시작된 ‘갑질’이 대과 급제 후 관리로서 첫 부임할 때 ‘슈퍼 갑질’로 진화한 것이다. 지병으로 몸상태가 엉망인데도 술·안주를 잔뜩 준비하고 재롱을 떨다가 과음 때문에 죽고, 선배들의 집단 구타 때문에 죽고…. 온몸에 진흙과 오물을 칠하고…. 다산 정약용까지 신입생 환영회 경험담을 언급하며 “절뚝걸음으로 게 줍는 시늉하고, 수리부엉이 울음소리를 내고…. 시키는대로 다 해보았지만 안되는 걸 어쩌겠냐”고 토로했다.
‘다산의 흑역사’를 읽으니 요즘 선배들의 황당한 요구에 “어쩌면 좋을 지 모르겠다”고 당혹감을 표하는 대학 새내기들의 한숨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수백년 이어진 잘못된 관행의 뿌리를 뽑는 것은 당연하다. 그 중 예나 지금이나 공통으로 등장하는 원흉이 있으니 바로 ‘술’이다. 성균관대 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 때 재현한 전통의 신방례가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각종 문헌을 뒤져 조선시대 신방례를 따라 했다는데, 딱하나 다른게 ‘술판’이 없다는 것이다. 성대 뿐 아니라 이미 ‘술없는 OT(오리엔테이션)’을 표방한 학교들도 제법 된다. 지식의 전당인 대학에서 첫 걸음을 술로 시작해서야 되겠는가.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신래(新來·신입관원)를 침학(侵虐·집단 괴롭힘)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는데…. 그런데도 신래 정윤화(鄭允和)가 침학을 당해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를 탄핵하려 했으나 풍문공사(風聞工事)일 것 같아 주저했습니다. 이제는 국문해야 합니다.”
1453년(단종 2년)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관직) 유성원이 상소를 올린다. 심상치 않은 사건을 반드시 국문하라는 직소였다. 사연은 이렇다. 정윤화는 동기생 9명과 함께 과거에 막 급제한 새내기 관원이었다.
■어느 신입관리의 죽음
그는 정식관원이 되기 전에 일단 승문원에 배속됐다. 신입생들은 관례에 따라 술과 안주를 잔뜩 준비한 뒤 선배들을 대접해야 했다. 반드시 거쳐야 할 신고식이었다. 하지만 정윤화의 컨디션은 만성적인 종기병 때문에 최악이었다. <단종실록>을 보자.
“(선배들의) 희롱과 핍박이 심했다. 본디 종기병이 있던 정윤화는 피곤함이 극에 달해 죽기에 이르렀다.”
선배들이 회식자리에서 신입생들을‘너무 세게 돌렸던 것‘ 같다. 정윤화는 와병 중인 데다 선배들의 강권으로 술을 억지로 마셔야 했다. 그러다 참지못하고 쓰러졌다. 그는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유성원은 이 사건의 풍문을 듣고 철저히 감찰한 뒤 이를 주상에게 고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에 연루된 선배관원 3명이 태(笞) 50대를 맞고 파직됐다. 다만 2명은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파직을 면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1526년(중종 21년)‘신래’ 조한정이 선배들의 집단 ‘매찜질’에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사색이 된 선배들이 급히 그를 떠메고 갔지만 끝내 죽고 말았다. 임금은 “병 때문인지, 선배들의 구타 때문인지 철저히 조사하라”고 사헌부에 명령했다. 사헌부는 10일간의 조사결과 “선배들의 괴롭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조한정이 만약 병이 있었다면 어떻게 시험을 보고 급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필시 도가 지나친 집단괴롭힘 때문에 집으로 떠메어 가다가 죽은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급제한 생떼같은 아들을 신고식으로 허망하게 잃은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보라.‘신입‘을 죽음으로 내몬 이 사건은 어쩌면 그렇게 요즘의‘신입생 신고식’과 같은 지 모르겠다.
■신입생 환영회, 집단괴롭힘의 역사
조선시대 때는 이를‘허참(許參)·면신례(免新禮)‘라 했다. 허참례는 출사하는 관원이 전입고참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자리를 뜻했다. 선·후배간 인사를 허락하는 예라 하여‘허참례’라 했다. 면신례는 허참례를 끝내고 10여 일이 지난 뒤 치러야 했던‘신래(新來·신입생) 신고식‘이었다.
이 통과의례는 고려 말 우왕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음서, 즉 부모의 권세를 배경으로 벼슬하는 자제들의 기를 꺾고 질서를 잡으려는 선배들의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기특한 취지는 어디간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가학’ 혹은 ‘집단괴롭힘‘ 같은 역기능만 남게 됐다. 선배 대접을 위한 경제적인 부담도 엄청났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신고식이었기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지경까지 치달았을까.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는 곧바로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다. 일정기간 수습기간을 거쳐야 했다.
문과급제자는 예문관(역사 담당기관)·성균관(최고교육기관)·교서관(서적간행)·승무원(외교문서 관장)에 배속됐다. 무과급제자는 훈련원(국방 담당) 등에 알단 배속됐다. 배속된‘신래’는 허참·면신례 같은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그 신고식이라는 게 혹독했다.
토지박물관이 수집한 이른바 면신첩을 보면 선배들의 집단괴롭힘을 짐작할 수 있다.
“신귀(新鬼) 양정(暘鄭)은 듣거라! 넌 별 볼일 없는 재주로 외람되게 귀한 벼슬길에 올랐겠다. ~거위, 담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즉각 내어와 바쳐라. 선배(先進)들이 쓴다.”
18세기 면신례를 치르던 선배들이 새내기 관료인 정양(鄭暘)에게 쓴 것이다. 새내기를‘신귀‘, 즉‘새로운 귀신’이라 하고, 이름도 거꾸로‘양정‘이라 했다. 정양 역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뒤 이같은 면신첩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양의 케이스는 약과였다.
■혹독한 신입생 환영회
1541년(중중 36년) 사헌부의 구구절절한 상소를 보자. 상소는 먼저 급제자의 모델을 제시했다.
“급제하여 출신하는 것은 곧 선비가 벼슬길에 들어가는 처음입니다. 마땅히 예모(禮貌)를 삼가고 기개를 양성하여 임용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중종실록>)
그런데 그 다음 문장부터가 반전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을 신래(新來)라 하여 집단으로 괴롭힙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차리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없이 합니다. 조금이라도 뜻이 맞지 않으면 신입의 몸을 학대하는 등 온갖 추태를 벌이고, 아랫사람을 매질하여 그 맷독(楚毒)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상소는 이어진다.
“겨울철에는 물에 집어넣고, 한더위에 볕을 쐬게 하고~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생명을 잃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는 이도 있으니 폐해가 참혹합니다. ~‘신래‘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는 명목아래….”
이뿐이 아니었다.
상소를 읽으면 조선시대‘죽음의 신입생 환영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바로 요즘 언론에서 접하는 대학생 신입생환영회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일까. 급기야 상소는 “오랑캐 풍습에도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탄식한다.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는 신진선비들을 총애했습니다. 좌절시키거나 모욕을 주는 일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오랑캐인 원(元)나라의 미개한 풍속에서도 이같은 행태는 없었습니다.”
■“구타 소리가 대궐 안을 진동하고…”
물론 상소를 읽은 중종은 “백번 옳다”면서 “면신례 등의 폐단을 없애라”고 지시했다. 하기야 중종 뿐이 아니었다. 태조 1년(1392년)과 연산군 6년(1500년)도 이런 신고식의 폐단을 누누히 지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악습의 폐해는 임금의 추상 같은 명령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도리어 하위직까지 신고식이 퍼져갔으며 급기야는 군졸들 사이에서도 만연했다. 1535년 4월 의정부에서 불이 났는데, 그 원인이 어이없었다.
“녹사(錄事·서리직)가 신래(신입)을 닥달하여 소를 잡아 삶다가 의정부에 불을 냈습니다.”(<중종실록>)
이제는 하급관원까지 신입관원들 괴롭혀 소를 잡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때문에 어이없이 불까지 났다. 또 하나 있다. 고참들이 신입들을 구타하는 소리가 대궐 안에까지 퍼져 임금의 귀에 들렸다는 것이다. <중종실록>을 보면 정말 웃긴다.
“대궐 내에 들리는 고함 소리를 듣고서 지극히 해괴하여 물었다. 그랬더니 선전관(宣傳官)이 신래(新來)를 묶어서 때린 것이었다. (내막은 이랬다.) 선전관 변한정·박지화 등이 신래(신입) 박양준으로부터 술을 얻어먹었다. 이때 부장(部將) 김극달(金克達)도 합류했다. 그러다 취하게 되자 박지화가 김극달도‘너도 앞으로 신래가 될 것’이라면서 김극달의 발을 거꾸로 달고 때렸다.”
임금이 전교를 내렸다.
“대궐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스스로 신중해야 하는데 서로 술을 마시고 마구 때려 아프다고 외치는 소리가 대내에까지 들리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우두머리가 된 변한정 등은 파직하고….”
신고식에서 나는 비명소리가 임금의 귀에 들렸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은…. 술에 흠뻑 취해 신참도 아닌 김극달에게 “너도 앞으로 신참이 될 것이니 맞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거꾸로 매달아 발바닥을 때렸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지….
■수습관리, 신임장관마저 군기잡다
지금 기준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사례가 하나 있었다. 1494년(성종 25년)의 일이었다. 막 도총관(무관·장관급)으로 부임한 변종인이 씩씩거리면서 임금을 찾았다. 분해서 못견디겠다는 듯….
“제가 훈련원에 앉아 있는데, 권지(權知) 등이 신에게‘허참례를 아직 올리지 않았다‘면서 예를 올리지 않고 이름을 불러대 욕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변종인은 참판을 지낸 재상이었다. 반면 변종인을 희롱한‘권지’는 지금의 시보(試補) 혹은 수습(修習)을 뜻한다. 과거에 급제한 뒤 정식벼슬을 받기 전에 실무를 배우고 있던 수습관원이었다.
“이봐! 신래(新來·신참)!”
수습들은 허참례, 즉 “밥 한끼, 술 한 잔 사지 않았다”면서 막 부임한 도총관(정2품)의 이름을 부르며 희롱한 것이다. 도총관은 장관급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변종인으로서는 기막힌 일을 당한 것이다. 임금도 “재상에게 무슨 버르장머리냐”며 문제의 수습관원 14명을 불렀다.
“니 놈들이 과연 그랬느냐.”
금상의 앞이었지만 권지 이극달 등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며 당당하게 말했다.
“무과 출신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회식을 한 뒤에야 선생(先生·정식관원)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상관이라도‘신래‘라 합니다. 이것은 옛 풍습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래도 그렇지”하면서 13명을 파직했다.
“옛 풍습이라지만 변종인은 참판을 지낸 지체 높으신 재상이니라. 어디 감히 권지(수습) 따위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하지만 이 사건의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조정 내에서 이 사건은 두고두고 참새들의 입방앗거리가 됐던 것 같다. “그래도 재상한테 너무 했다”는 노장파와 “뭘 그것 갖고 줄줄이 파직시키냐”는 소장파가 쑥덕공론을 일으킨 것이다. 사건발생 두 달이 지나도 진정되지 않자 사간원 정원(正言·간쟁을 담당한 관원) 이의손이 나선다.
“변종인을‘신래’라 불렀다 하여 13명이 파직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신참과 고참들이 웃음거리가 될만한 일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비록 이들의 행동이 법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훈련원에서 면신례(신고식)를 행한 뒤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옛날의 풍속입니다. 그 때문에 파직까지 시키는 것은 심한 처사인줄 아옵니다.”<성종실록>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수습관원 13명을 복직시켜 주었다. 그만큼 신고식의 뿌리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율곡, 다산, 호된 신고식에 ‘폭발하다‘
훗날 정약용도 자신이 당한‘신입생 신고식’의 경험을 혀를 내두르며 생생하게 전한다.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를 줍는 시늉을 하고 수리부엉이 울음을 흉내내는 일 따위는 제가 직접 하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해보라고 애를 썼으나 말소리는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고 발걸음은 발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 어쩌겠습니까.”(판서 권엄에게 보내는 편지)
율곡 이이는 9번의 과거에서 9번 모두 수석(장원)을 차지함으로써,‘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별명을 얻은 천재였다. 그런 천하의 이이도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결국‘면신례’ 자리에서 선배들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배째라”며 신고식을 거부한 박이창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이른바 참판 박이창이‘자허면신(自許免新)‘한 경험을 전한다. 과거에 급제한 박이창(?~1451)이 예문관에 배속되면서 혹독한 면신례를 치러야 했다.
“예문관의 풍속은 신래(신참)가 술과 안주를 내기도 하고, 혹은 여러가지로 괴롭히다가 만 50일만이 되어야 자리에 앉게 허락하였는데, 이것을 면신이라 했다. 그런데 박이창은 행동이 조심스럽지 못해 여러번 선배에게 실수했다. 선배들은 그런 그에게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박이창은 선배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선배들이 눈총을 주었지만, 그는 도리어 옆에 앉은 선배들을 투명인간 대하듯 했다.”
사람들은 박이창의 이 사례를 두고‘스스로 허락한 면신례’라 하여‘자허면신‘이라 했다. 얼마나 집단괴롭힘을 당했으면 그랬을까. 박이창은 시쳇말로‘배 째고 등 딴 뒤에 소금 뿌려라’는 식으로 선배들의 집단 괴롭힘을 온몸으로 극복한 것이다.
이런 가학적인 신고식의 행태는 6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재현되고 있다. 통과의례일 뿐이며, 옛 풍습이라는 이유로…. “폐단을 없애라는 명령만 있을 뿐 신래(신입)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중종실록>)인가. 이 말이 지금도 통용되는 것인가. 이 말을 기억하자.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이같은 미개한 풍속은 없었습니다. 매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중종실록>)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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