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기 인도 동부 벵골인들은 찐 사탕수수에서 채취한 당즙을 조려내어 결정체를 만들었다. 이 정제 설탕은 삽시간에 세계각지로 퍼졌다.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1788~1856)까지 ‘점입가경의 맛’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였다. 설탕은 만병통치약으로도 여겨졌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식 중에 설탕을 먹는 것이 율법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벌어지자 “설탕은 식품이 아니라 소화촉진용 약품”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차와 커피, 담배 같은 유럽 대륙에 유입된 다른 식품들은 건강상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설탕만큼은 아퀴나스의 ‘보증’ 덕분에 아무 걸림돌없이 세계상품으로 발돋움했다.
설탕은 값비싸고 맛좋은 건강식품으로서 왕후장상의 신분과시용 상품이 됐다.
11세기 이집트 술탄은 7만㎏의 설탕으로 거대한 나무 장식물을 세웠다. 결혼피로연에 등장하는 웨딩케이크가 설탕 장식의 유물이다.
하지만 설탕의 달콤한 유혹 속에 어두운 역사가 숨어 있다. 사실 사탕수수는 금방 쉽게 자라는 작물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한번 심으면 토질을 금방 황폐화 시킨다.
따라서 새로운 경작지를 계속 찾아 옮겨야 한다. 또 사탕수수의 재배와 가공, 제당 등의 공정은 일사분란해야 한다. 그러므로 엄청난 노동력이 소요된다.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닌 사탕수수농장의 최종 행선지는 카리브해의 여러 섬들이었다. 그러나 노동력은 금방 동났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옮겨온 천연두와 가혹한 노동 등에 의해 절멸하다시피 했다.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아프리카인들이었다. 결국 설탕에 열광한 유럽인들의 입맛을 충족시키려고 대대적인 아프리카 노예사냥이 벌어진 것이다.
16~19세기 사이 카리브해와 브라질, 미국 남부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노예는 자그만치 1300만명에 달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아프리카 대륙은 성장의 동력을 잃었다. 아프리카에서 지금까지 굶주림이 대물림되는 근본 원인이다.
풍토병과 중노동으로 죽어간 노예도 부지기수였다.
1791년 영국의 윌리엄 폭스는 “설탕 1온스(28그램)는 인간의 살 2온스와 같다”면서 카리브산 설탕 불매운동을 펼친다. ‘공정무역 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이 운동으로 카리브산 설탕소비량이 3분의 1로 줄었다. 그러나 이미 중독된 설탕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역불급이었다.
폭스 이후 200년이 지난 지금은 우리 정부까지 나서 ‘설탕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무슨 노예해방을 앞세운 거창한 운동도 아니다. 비만과 당뇨 같은 만성질환의 주범인 설탕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당뇨병 혹은 당뇨 고위험군에 속한 이가 무려 940만명, 즉 3명중 1명꼴이라니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정부가 ‘단맛을 줄이세요, 인생이 달콤해집니다’는 등의 슬로건을 내긴 모양인데 다소 약한 감이 있다.
200년전 설탕섭취를 식인행위에 비유한 폭스였다면 어땠을까. ‘설탕은 바로 당신의 생명을 잡아먹는 행위’라 돌직구를 날렸을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글을 위해 ‘가와기타 미노루의 <설탕의 세계사> 장미화 옮김, 좋은 책 만들기, 2003’와 ‘케네스 포메란츠·스티븐 토픽의 <설탕, 커피, 폭력>, 박광식 옮김, 2003, 심산’, ‘고영·전병길의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꿈꾸는 터, 2009’ 등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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