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7~8일 답사차 경주에 다녀왔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가 온통 벚꽃천지더군요.
김유신 장군 묘 주변이나 보문단지 같은 곳은 물론이구요. 다른 곳도 온 길가에 벚꽃으로 터널을 이루고 있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비가 장관을 이루더라구요. 서울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국회 윤중로 벚꽃이 탐스럽게 피었더라구요.
제가 사는 파주의 길가 곳곳에도 막 꽃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했구요. 요즘 사람들은 반짝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시드는 벚꽃길을 따라 북상(혹은 등산)한다는군요. ‘벚꽃 엔딩’을 즐기며 흐드러지는 봄날을 만끽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벚꽃에 열광하는 요즘 세태에서 한가지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바로 ‘창경궁(원) 벚꽃놀이’ 였습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닙니다. 1980년대초까지 ‘창경궁’이 ‘벚꽃놀이의 성지’였으니까요. 여기서 한가지 걸리는 게 있죠. 창경궁이라면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데 왜 그곳이 ‘벚꽃놀이의 최대명소’가 되었을까요.
■진달래야말로 조선의 대표 명화
우선 전제해야 할 것이 있는데요. 벚꽃놀이가 한국 고유의 전통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수필가·시인인 차상찬(1887~1946)이 대중잡지인 <별건곤> 1929년 4월호에 기고한 글을 볼까요.
“무궁화를 조선의 명화(名花)라 하지만 실은 진달래(杜鵑花)가 조선을 대표하는 꽃이다…색태가 미려하고 향취가 좋으며, 조선 어느 곳에서도 핀다…조선인이 외국에서…진달래를 본다면…마치 고국에 돌아온 것과 같이 반가운 생각이 난다. 일본 사람의 사쿠라 애착심 못지않다.”
조선에서 벚나무는 화살제조용으로 쓰였지, 감상용으로 여기지 않았답니다. 때문에 일본처럼 많은 벚꽃 명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 국화인 벚꽃이 다른 곳도 아닌 조선의 궁궐에 대량으로 심어졌을까요.
원래 서울의 벚꽃놀이 원조 명소는 창경궁이 아니었답니다. 1910년대에는 우이동 계곡이었다는데요.
“4~5000명의 내선인(일본인·조선인)이…우이동 사쿠라꽃(벚꽃)을 보러 와서…춤 추는 일본 기생 옆에서 술판을 벌이고 맥주병으로 나발을 불고 있던 사람은 ‘좋다! 잘 춘다’고 한다…”.(매일신보 1913년 4월22일)
그런데 점차 벚꽃을 즐기는 상춘객들의 행렬이 창경궁으로 모여듭니다. 하필 조선의 궁궐이었던 창경궁이었을까요.
창경궁은 세종(1418~1450)이 상왕인 태종(1400~1418)을 위해 조성한 궁궐이었습니다. 성종(1469~1494) 때는 대비전의 세 어른, 즉 세조(1455~1468)의 정비인 정희왕후(1418~1483), 덕종 비인 소혜왕후(인수대비·1437~1504),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1445~1499)를 모시려고 수리했습니다. 이후에도 국왕과 왕가의 출입이 잦았는데요.
그런 신성한 궁궐이 벚꽃놀이터가 된 겁니다. 거기에는 망국의 슬픈 사연이 담겨있습니다.
■우이동에서 창경궁으로
1907년 고종(1863~1907)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 퇴위되고 순종(1907~1910)이 즉위하죠.
순종은 고종과 함께 머물고 있던 덕수궁에서 나와 홀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1908년 11월) 이 무렵 대한제국은 정미7조약에 따라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게 되는데요. 이때 궁내부 차관으로 임명된 자가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였습니다. 그런데 매국노 형제인 이완용(1858~1926·총리대신)·이윤용(1854~1939·궁내부 대신)가 고미야를 만납니다.
“순종이 부왕(고종)과 떨어져 살아야 할 운명이어서 매우 우울해 하고 있으니 소일거리를 찾아주면 어떠냐”고 운을 뗀 겁니다. 그러자 고미야는 “그럼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요. 이후 일사천리로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는 작업이 마무리 되구요. 순종은 “진기한 동식물과 문화유물들을 백성과 함께 즐기고 싶다”고 개방을 선언했구요(<순종실록> 1909년 11월1일). 1911년 4월 26일부터는 ‘창경궁’이 아니라 ‘창경원’으로 일컬어집니다.
■사쿠라가 너무 그리워서…
그 사이 일제가 한술 더 뜬 것이 있었는데요. 창경궁(원)에 벚꽃을 심은 거죠.(1907~9년)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 수가 급증했거든요. 1900년 1만6000명 선이던 것이 1910년에는 17만명을 넘겼습니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봄만 되면 일본에서 즐겼던 벚꽃놀이 생각이 간절했던 건데요. 1939년 4월 16일 매일신보의 기사를 볼까요.
“30여 년 전(1908~9년) 구한국(대한제국)에 머물던 내지인(일본인)들이 일본 국화(國花)인 사쿠라(벚꽃)를 그리워했다. 이때 창경원, 창덕궁, 경복궁 등에 5~6년 된 사꾸라 나무를 내지(일본)에서 갖다가 심은 것이 조선 사쿠라의 시초이다.”
이때 일본에서 가져온 벚꽃나무가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300그루였습니다. 이후 매년 보·증식을 계속해 2000 그루 이상이 되었다네요. 창경궁은 1908~09년 사이에 심은 벚꽃이 10년 정도 자란 1918년부터 ‘놀이동산’으로 전락하게 된 겁니다.
1924년 봄부터는 ‘창경원 밤벚꽃놀이’(야앵·夜櫻)가 시작됩니다.
“창경원 동물원의 울타리를 이룬 벚꽃가지에…꽃봉오리가 맺기 시작…해마다 꽃이 필 때마다 밤에도 열어달라는 여론이 많았다…금년 봄 벚꽃이 만발하는 2~3주일간 야간개장하고 수천개의 전등을 장식할 계획….”(동아일보 1924년 3월11일)
특히 요즘의 국회 윤중로 조명발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답니다.
“경기도 수원의 전체 수요전등이 18만와트라는데…창경원에 20만와트 조명이 불야성을 이뤘다…춘당지 연못가의 네온탑은 오색찬란한데 연못 가운데 장치한 분수는 하늘높이…네온 위로 안개같이 내려 몽환경을 이뤄…”(매일신보 1936년 4월29일)
■밤벚꽃놀이가 일탈의 장으로
그러나 야간개장을 허용하자 숱한 부작용이 연출됩니다.
“사람처럼 생긴 사람은…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 걸에게 장난을 걸 때 양복 친구들의 시선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꽂혔다.”(<별건곤> 1930년 5월)
“창경원의 ‘밤벚꽃’은 꽃구경보다도 사람구경이요…창경원을 휩쓸고 다니다가 좀 인적이 드문 데서 여자만 만나면 그저 ‘히야까시’(희롱)이다.”(동아일보 1935년 4월 20일)
밤벚꽃놀이가 일탈의 무대로 전락하고 만겁니다.
“밤벚꽃의 짧은 시간을 흥에 겨워 뛰놀자는 풍류객(?)들이 삐루(맥주)와 월계관(정종)을 몰래 들여와 ‘부어라 먹자’하며 창경원이 좁다 하고 떠든다…”(동아일보 1935년 4월 12일)
창경원 벚꽃놀이를 즐기는 자들의 반 이상이 일본인들이라는 기사도 보이네요.
“…이게 웬일인가? 창경원이면 조선 창경원일텐데…아무리 봐도 조선 같지 않아! 그도 그렇겠지. 입장자의 반 이상은 게다(일본인) 친구요, 나머지 반 중 반은 조선사람, 그 나머지는 양복 신사인가.”(<별건곤> 1930년 5월)
“술에 취한 게다(ゲタ·일본인) 친구들이 ‘꽃은 사쿠라, 사람은 무사(花は櫻 人は武士)’를 외치며 돌아다닌다. 칼이 없어서 그렇지 혹여 ‘기리스테(キリステ·무사에게 무례한 짓을 한 평민을 칼로 쳐 죽이던 일)’가 나오지 않을지….”(<별건곤> 1930년 5월)
■벚꽃잎처럼 떨어지는
창경원 야간 벚꽃놀이는 만주사변(1931년)-중일전쟁(1937년)-태평양전쟁(1941년)을 거치며 전시체제에 돌입한 와중에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일제는 오히려 ‘한송이 두송이 연연하게 피는 벚꽃은…우리 일선의 용사”(매일신보 1942년 4월19일)이라고 선전했는데요. 벚꽃잎처럼 화려하게 폈다가 후드득 떨어지는 벚꽃잎을 일왕과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상징화한 겁니다.
10대 자살 특공대원들이 가미카제(神風)의 출격 직전에 벚꽃가지를 꽂고 찍은 마지막 사진이나, 죽으러 가는 특공대원들을 전송하는 여학생들이 벚꽃가지를 흔드는 모습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밤벚꽃 놀이가 전쟁 부상병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펼쳐지는데요. “용산 육군병원에서 입원중인 용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원(창덕궁 후원)에서 다과를 베푼 뒤 창경원 밤벚꽃 놀이 행사를 벌였다”(매일신보 1941년 4월23일)고 했습니다.
더욱이 이런 행사는 “잠시나마 위안할 기회를 만들어주라 하시는 이왕 전하(영친왕)의 황송하신 분부를 받자와 해마다 진행됐다”(조선일보 1939년 4월 21일)고 했습니다.
이왕가가 이 태평양전쟁을 지지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선전한 겁니다.
심지어는 “(전쟁 동맹국인) 이탈리아 사절단도 벚꽃을 구경한 뒤 ‘교태 많은’ 기생들의 접대를 받으며 조선요리를 먹고, 하룻밤을 즐겼다”는 기사까지 등장합니다.(매일신보 1938년 4월24일)
■사쿠라로 창씨개명된 벚꽃
물론 벚꽃의 원산지가 한반도, 그것도 제주도산이라는 것이 일제강점기에 연구·발표되었습니다. 즉 1932년 고이즈미 겐이치(小泉源一·1883~1953) 교토대(京都大) 교수가 한라산의 해발고도 약 600m 되는 곳에서 왕벚나무의 자생지를 발견했다는 건데요.
경성사범 생물교사였던 우에다 츠네카즈(上田常一)의 경성일보 기고문(1933년 4월27일)에도 나옵니다.
“경성에 심은 벚꽃나무는 일본 묘목을 이식한 것이다. 원래 그 원산지는 제주도인데 그 옛날 물고기를 잡으러 온 어부 등이 일본으로 전파했을 것이다. 이것이 온난한 일본에서 엄청난 기세로 번식해 그 자손이 조선 땅을 다시 밟은 것….”
또 시인·수필가인 차상찬은 조선일보 1933년 5월2일자에 비슷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쿠라라 하면 흔히 일본에서 온 것으로만 알고 재래 조선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근래 각 도시에 새로 이식한 벚꽃나무는 일본산이지만 각 지방의 산지에 있는 꽃은 재래 조선 것이다. 어떤 식물학자는 일본의 사쿠라도 조선(특히 제주지방)에서 이식한 것이라 했다. 그러고보면 일본 사쿠라가 조선에 온 것은 마치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온 격이다.”
차상찬은 “이렇게 당당한 이름(벚꽃)이 있는데 사쿠라로 일컫는 것은 ‘김서방’을 ‘김태랑(金太郞)’으로, 명동을 ‘명치정(明治町)’으로 각각 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별건곤> 1929년 4월호)고 개탄했습니다. 그러고보면 ‘창씨개명’이 1940년초부터 본격 시행됐지만, 벚꽃의 경우엔 이미 최소한 1920년대부터 조선인도 모르는 사이에 ‘사쿠라’로 개명되었다는 뜻이 아닌가요.
■일제에 의해 이식된 문화
이후 창경원 벚꽃놀이는 봄을 알리는 전령사의 동원령이 되어 조선인들의 마음을 마비시켰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창경원에 꽃소동이 나야 봄을 깨닫고 봄에 취하는 버릇이 있다”(조선일보 1938년 4월7일)든가, “시민들의 발길이 절로 반응하니 벚꽃은 마음의 흥분제냐, 마취제냐’(동아일보 1940년 4월12일)든가 하는 기사가 보입니다.
일제는 어쩌면 1년 365일 가운데 벚꽃이 피었다 지는 그 며칠간 동안만 식민지 백성들에게 마음껏 놀 자리를 제공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 기간동안 새로운 통치자인 일본의 아량을 베풀면서 말입니다. 아니 너희도 후드득 떨어지는 벚꽃처럼, 아니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일왕과 일본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고 부추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창경원이 한때는 궁궐이었던 사실도, 벚꽃놀이 문화가 일제에 이해 이식된 문화라는 사실도 잊어버렸구요. 그랬으니 제가 20대가 될 때까지인 1983년까지 창경원 벚꽃놀이가 꾸준히 이어진거죠.
‘창경원’의 벚꽃놀이 문화는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회복하면서 사라졌죠. ‘사쿠라’(櫻)라는 이름도 완전히 떨쳐버리고 ‘벚꽃’이라는 멋진 이름도 되찾았구요. 지금은 창경원 벚꽃놀이와는 전혀 다른 벚꽃문화를 누리고 있답니다.
어떤 연구자는 그것을 한국식 벚꽃문화라 하더군요.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해마다 즐기고 있는 벚꽃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식·변모했고, 결국은 사라지게 되었는 지는 알 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새삼 벚꽃 이야기를 들추는 이유입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동명, ‘벚꽃의 문화접변-창경원 벚꽃놀이에서 여의도 벚꽃축제로’, <한일관계사연구> 66권, 한일관계사학회, 2019
김찬송, ‘창경궁박물관 설립과 변천과정의 연구’, <고궁문화> 11호, 국립고궁박물관, 2018
김현숙, ‘창경원 밤 벚꽃놀이와 야앵(夜櫻), <한국근대미술사학> 19권,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08
박선영, ‘식민지 근대 경관과 장소성, 창경원 벚꽃놀이와 군중의 탄생’, <문학과 환경> 20권3호, 문학과환경학회, 2021
신명직, <모던뽀이-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 현실문화연구, 2003
류순열, <벚꽃의 비밀> 에세이, 2012
오누키 에미코(大貫惠美子),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이향철 옮김, 모멘토, 2004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경성일보>, <별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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