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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부러진 대롱옥 맞춰보니…백제판 '사랑과 영혼'의 약속이었네

2003년 9월이었습니다. 충남 공주 의당면 수촌리에서 농공단지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조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조사는 1구역(1000평), 2구역(300평)으로 나누었는데요.

그런데 먼저 발굴한 1지역의 흙무덤에서 뜻밖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국식 세형동검과 꺾창, 창, 도끼, 조각칼 등 청동기 세트가 노출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어 실시된 2구역 조사에서는 불과 300평 남짓한 구릉 한편에서 고분 6기가 노출되었는데요. 거기서 금동관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언론에서 ‘무령왕릉(1971년) 이후 최대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할 만 했습니다.

농공단지 터는 하룻밤 사이에 사적으로 지정됐고, 그 주변을 대상으로 한 발굴조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범위를 넓혀 진행된 발굴에서 확인된 2구역의 7~8호 고분에서도 높은 위계의 유물이 출토됐는데요. 7호에서는 환두대도와 함께 각종 말갖춤새가 보였구요. 8호에서는 금동신발과 누금제 귀고리 등이 보였습니다.
2구역의 발굴성과를 정리해볼까요. 5세기 중엽초중반기원후 5세기까지의 생활상을 일목요연하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무덤조성 양식의 변화가 흥미롭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흙무덤(마한)과 돌무덤(백제)의 차이인데요.
충청도나 전라도의 토착세력, 즉 마한 사람들은 흙무덤(토광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성백제가 마한을 복속시키면서 점차 백제식 돌무덤이 전파되었죠. 

수촌리 무덤(2구역)을 살펴보면 1~2호분의 주인공은 흙무덤에 나무곽을 쓴 덧널무덤(토광목곽묘)을 썼습니다. 마한의 전통을 이었다는 뜻이죠. 연대는 기원후 390~400년으로 판단됐습니다. 2011년 확인된 7~8호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로 조성되었는데요. 구덩이를 파고 위에서 시신을 묻는 양식이죠. 연대는 400~420년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를 이은 무덤이 3호(앞트기식 돌덧널무덤·횡구식석실묘)인데요. 돌덧널 무덤을 만든 뒤 앞쪽 벽을 터서 시신을 묻었죠. 이 3호 무덤의 연대는 430년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마지막으로 조성된 무덤은 4~5호(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인데요.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을 만든 뒤 돌로 쌓아 만들었죠. 440~450년으로 짐작됩니다.
정리하자면 1~2호(덧널무덤·390~400년)→7~8호(구덩식 돌덧널무덤·400~420년)→3호(앞트기식 돌덧널무덤·430년)→4~5호(굴식 돌방무덤·440~450년)으로 무덤 양식이 이어진 겁니다. 

■백제 중앙정부의 하사품
여기서 두가지 착안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상대대로 이어온 가족묘라는 이야기인데요. 
4세기 후엽~5세기 중·후반에 이곳 수촌리 인근을 다스렸던 수장의 가족묘라는 얘기죠.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제 도자기 등을 껴묻이할만한 위상을 지닌 가문이었을 겁니다. 그럼 금동신발의 제작자는 누구일까요. 연구자들은 대체로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의 지도자(공주 수촌리·고창 봉덕리·나주 정촌·나주 복암리 등)들에게 하사한 일종의 위세품이라고 해석합니다. 
따지고보면 마한의 입장에서 백제는 배은망덕한 나라입니다. 이복형(고구려 유리왕)에게 쫓겨 내려와 ‘집도 절도 없던’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7)에게 땅까지 주며 거둬주었거든요. 

그런데 야금야금 땅을 빼앗더니 결국 마한 50여개 소국을 모두 차지해버리고 만거죠. 그러나 굴러온 돌인 백제로서는 그런 마한 땅을 직접 통치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 지역의 토착세력, 즉 옛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해당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을 겁니다. 이른바 간접지배의 형태로 말입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고 58성, 700촌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백제가 성(城)과 촌 단위로 조직되었음을 알려주는 단서죠.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침략(396년) 이후 국세가 위축됐는데요. 
바로 이 무렵 백제 중앙정부가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같은 ‘위세품’을 사여하여 지방 세력의 이탈을 막는 한편 그들을 매개로 거점 지역을 간접 지배했다는 견해가 유력한거죠.

<송서> ‘백제전’ 및 <남제서> ‘백제전’은 “백제는 국가에 일정한 공로를 세운 자를 예우하기 위해 왕(王)·후(侯)제도를 두었다”고 했습니다. ‘작호제’(爵號制)라 할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수촌리 가문이 바로 그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마한의 후예, 즉 공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지방 귀족 가문일 수 있다는거죠. 
물론 2구역 외의 주변 지역에도 수촌리 가문과 같은 양식(흙무덤→구덩식 돌덧널무덤→앞트기식 돌덧널무덤→굴식 돌방무덤)의 가족묘가 잇달아 발굴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같은 높은 위상의 유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세형동검 등 청동기 세트가 확인된 1구역에서 잇달아 확인된 백제 무덤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수촌리 2구역 쪽이 이 지역의 최고지도자 가문이었다는 뜻입니다. 500~600년전 세형동검 등 청동기세트를 껴묻이한 가문은 어느 순간에 몰락한 집안일 수도 있다는, 뭐 그런 상상력을 동원해봅니다.

수촌리 1·3·4호분에서 금동신발이 출토됐다. 이 역시 가장 이른 시기의 백제 금동신발이다.

■부러진 사랑의 정표를 맞춰보니…
또하나 흥미로운 점은 수촌리 고분은 주로 부부묘였다는 것입니다. 
인접한 곳에서 같은 양식끼리 조성된 1~2호(덧널무덤)과 7~8호(구덩식돌덧널무덤), 4~5호(굴식돌방무덤)가 그런데요.
단적인 예로 1호분이 금동관과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으로 무장한 남성이라면 2호분은 화려한 머리장식 구슬과 목걸이가 출토되었답니다. 7~8호와 4~5호도 비슷한 양상의 유물들이 조합되어 있었답니다.
그런데 2004년 여름이었습니다. 수촌리 2구역의 출토유물을 정리하고 있던 발굴단(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속 연구원이 깜짝 놀랄만한 발견을 했답니다. 즉 4호와 5호묘에서 부러진 관옥(구멍 뚫은 대롱 모양 구슬)이 1점씩 출토됐는데, 형태가 너무 비슷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맞춰보았다니 세상에, 꼭 맞았답니다. 그것은 ‘부절(符節·돌과 대나무, 거울, 옥 따위를 잘라 신표로 삼던 것)임이 틀림 없었습니다. 부절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고구려 유리왕(기원전 19~기원후 18)이죠. 
아버지인 동명성왕(주몽·기원전 37~기원전 19)이 부여를 탈출할 때 부인(예씨)이 아들(유리)을 잉태하고 있었죠. 그렇게 태어난 아들 유리는 훗날 아버지가 ‘부절’로 숨겨놓은 부러진 칼을 찾아 졸본부여 땅에 있던 아버지를 찾아갔답니다(기원전 19년). 
칼을 맞춰보니 틀림없는 부자 사이였죠. 동명성왕은 뛸듯이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게 됩니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유리명왕조’). 또 하나의 사례가 신라 소년 가실과 설씨녀 이야기죠(<삼국사기> ‘열전·설씨녀’).

2003년 수촌리 2구역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제 자기 등 최상위의 유물이 쏟아지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발굴조사지역이 확대되었다. 그중 부부묘로 추정되는 7,8호분 가운데 부인묘로 보이는 8호분에서 금동신발 1점과 누금제 등 높은 위계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실 소년은 동네 소녀 설씨녀를 연모하고 있었는데요. 어느날 설씨녀의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게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년은 설씨녀를 찾아 “이 몸이 아버님의 군역을 대신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죠. 
가실이 눈물나도록 고마웠던 설씨녀와 그 아버지는 “그럼 혼례를 치르자”고 제안했답니다. 그러나 가실은 “군역을 마친 뒤에 혼례를 치러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미뤘습니다. 설씨녀와 가실은 거울을 반으로 잘라 반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것은 신표로 삼는 겁니다. 다시 만나는 날 합쳐 봅시다.”
그러나 약속한 3년이 지날 무렵 공교롭게도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교대를 할 수 없게 됐답니다. 6년이 지나도록 가실이 돌아오지 않자 설씨녀의 아버지가 “이제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다른 남자와의 혼인을 권유했습니다.
설씨녀는 “신의를 버릴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늙어서 정신이 혼미해진 아버지는 다른 남성과 강제 혼인을 추진했습니다. 병든 아버지 때문에 도망도 치지 못한 설씨녀는 가실이 남겨두고 떠난 말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때 삐쩍 마른 가실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돌아옵니다. 가실이 설씨녀를 보고 ‘깨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가 그것을 주워 들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그럼 수촌리 부부는 어떨까요. 남편이 묻힌 4호분은 규모도 가장 크지만 부장품이 가장 화려했습니다.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물론 은장식대도, 닭머리장식 항아리 등 중국자기 4점과 각종 말갖춤새가 발견되었죠. 수촌리 가문에서도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아간 수장이었을 것 같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는데요. 

이 4호분에서 발견된 중국자기 세트를 보면 항아리·주전자·병·잔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한눈에 봐도 수입명품으로 차린 술상 같죠. 이 지역을 다스린 지도자가 술을 어지간히 좋아했다는 이야기일까요. 5호분은 그 분의 부인이구요.
그렇다면 수장 부부의 무덤에 한점씩 묻어놓은 부러진 관옥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금슬 좋은 부부의 정을 죽어서라도 간직하고픈 마음에 묻어달라고 했을까요. 혹은 먼저 간 남편(혹은 아내)의 머리맡에 옥을 부러뜨려 고이 넣고는 자식들에게 말했을 지도 모르죠. 
“나 죽으면 나머지 부러진 옥을 내 머리맡에 놓아주거라. 그 사람(이)를 하늘에서 만나 맞춰보게….”
혹은 술을 어지간히 좋아했던 남편이 부인을 위해 ‘죽어서는 맹세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부절일 수도 있겠네요. 뭐 고고학적인 상상력입니다.

■수촌리로 시집온 백제 공주 무덤인가
수촌리에는 또 하나의 스토리가 숨어있습니다. 바로 2011년에 발굴된 7~8호 부부 무덤인데요. 
7호는 은으로 상감한 둥근고리큰칼이 부장되어 있어서 남성 무덤으로 추정되는데요. 그런데 부인의 무덤으로 짐작되는 8호묘는 7호묘 보다 덧널(석곽)의 크기가 더 크고 정교하며 부장품도 훨씬 화려합니다. 
즉 남편 무덤에서는 보이지 않는 금동신발과 함께 누금(鏤金) 기법을 사용한 금제귀고리와, 은장 옻칠 장식품 등 격이 높은 부장품들을 껴묻이 했다는 겁니다. 누금은 가는 금실이나 금알갱이를 알알이 붙여 섬세한 무늬를 표현하는 금속세공기법이죠.

8호에서 확인된 누금 금제귀고리는 1호와 4호 등 금동관이 출토된 수장급 남성 무덤의 귀고리보다 격이 훨씬 높답니다.
그렇다면 8호에 묻힌 여성은 누구일까요. 당시 발굴을 책임진 이훈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실장(현 공주대 연구교수)은 “이 여성이 혹시 백제 중앙에서 시집 온 분일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했습니다. 백제 중앙에서 온 분이라면 백제 공주일 수도 있다는 거죠. 이 역시도 고고학 발굴성과에 따른 그럴듯한 상상입니다.

여성 무덤들인 2호와 8호 등에서도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피장자의 머리와 상반신을 굽은옥과 마노, 유리 등으로 제작한 다양한 색깔의 구슬이 치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두 피장자 모두 구슬로 머리를 묶거나 장식하였으며, 목걸이에 곡옥을 매달았는데요. 옷에 구슬을 꿰거나 묶어 장식한 것으로도 추정돼죠. 또한 팔목과 발치에서도 구슬이 출토되고 있구요.
“구슬을 귀한 재물로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혹은 목에 매어 달거나 귀에다 늘어뜨리기도 했다”는 <삼국자> ‘위서·동이전·한조’의 기록과 부합되죠. 그런 마한 여성의 전통이 5세기 백제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중국의 흔적까지
뭐니뭐니해도 수촌리 유물이 백미는 금동관인데요. 1호와 4호에서 각 1점씩 확인됐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발굴된 금동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1호는 4세기말, 4호는 5세기 초반)된 겁니다. 백제 금동관은 이 수촌리부터 나주 신촌리 출토품까지 일관된 계통성을 갖고 있답니다. 한마디로 백제 중앙이 제작해서 각 지방에 하사했다는 뜻이죠. 게다가 이 수촌리 출토 금동관은 일본 규슈(九州)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출토품과 유사합니다. 당대 백제의 영향력이 일본 열도까지 끼쳤다는 반증이 되는겁니다. 여기에 중국(동진)제 자기까지…. 1600년 전 백제 중앙-지방, 백제-일본-중국 등을 잇는 국제교류의 흔적을 공주 수촌리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이 기사를 위해 이훈 공주대 연구교수와 이창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문화재연구부장, 이한상 대전대 교수 등이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