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숙종)께서 기로신 10명을 초대하시어 종일토록 즐겼는데 5차례에 걸쳐 5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다. 5번째 잔은 ‘사기로소(賜耆老所·기로소에 하사한다) 네 글자가 새겨진 큰 은술잔으로 마시게 했다. 기로신들은 주상의 명을 사양하지 못해 만취했다.”
1719년(숙종 45년) 4월18일 59세가 된 숙종 임금(1661~1720, 재위 1674~1720)이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눈병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던 숙종은 “병든 몸이 궁전에 오르니…여러 관리 모여있고…이 연회는 본시 높이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가득한 술잔에 자주 손이 간들 어떠리”라는 시를 지었다. 이날의 연회 내용을 첩자로 만든 것이 바로 ‘기사계첩’이다.
<기사계첩>에 수록된 행사그림 중 ‘어첩봉안도’. 1719년 2월11일 경희궁 흥정당에서 기로소에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 그림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행사앨범
기사계첩에는 대제학 김유(1653~1719)가 작성한 발문과 행사장면을 그린 기록화 5점, 기로신의 이름과 벼슬, 기로신의 초상화, 기로신의 축시, 숙종의 어제시, 기로신 임방(1640~1724)의 계첩 서문까지 실었다. 기사(耆社)는 기로소, 계첩(契帖)은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이 계를 조직해 만든 화첩을 의미한다. 보통 참석한 인원수대로 제작해 나눠 갖은 것이 풍습이었다. 오늘날의 추억록이나 앨범 같은 것이다. ‘기사계첩’이 완성된 것은 기로연이 열린지 1년 8개월이 지난 1720년 12월이었다. 주인공인 숙종이 승하(1720년 6월)한 뒤였다. 이렇게 기사계첩의 완성이 늦은 것은 행사도와 기로신 10인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었다.
최근 문화재청은 1987년 보물 제929호 지정된 이 ‘기사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예고했다. ‘기사계첩’은 12부를 작성해서 1부는 기로소에 보관했고, 나머지 11부는 기로신 11명이 한부씩 나눠 가졌다. 기로신 중 최규서는 은퇴하여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기로연에도 불참했고, 기사계첩에도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다.
이 ‘기사계첩’은 이제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나라의 국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계첩’에는 자격미달임에도 끝끝내 59살의 나이로 기로소에 입소한 숙종과 왕실의 고집, 그리고 입소의 근거와 명분을찾으려 동분서주한 신료들의 사연이 담겨있다. 또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한술 더떠 51살의 ‘젊은’ 나이에 기로소에 입소함으로써 노인대접을 받았다. ‘기사계첩’의 후일담이다.
‘숭정전 진하전도’, 이튿날인 2월12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견하례를 올리는 장면. 현재 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기사계첩>은 3종인데,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은 보물 제638호이다. 보물 639호 ‘기사계첩’도 있다. 이 ‘숭정전 진하전도’는 이화여대 소장품이다.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올 연말이면 어차피 말이 나올 건데….”
기로소(耆老所)가 어떤 곳인가. <주례>와 <예기> 등에 따르면 한자로 기(耆)는 60살, 로(老)는 70살을 의미한다. 그 중 정2품 이상의 문관이며 70세는 넘어야 입소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기로소였다.
그런데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뭇신하의 스승이라는 군주, 즉 숙종은 왜 그렇게 기로소에 입소하려 했을까. 자격미달인 59세의 나이로….
논의를 처음 제기한 이는 종신(宗臣·벼슬 사는 왕족)이자 인조의 고손자인 여성군 이즙(1668~1731)이었다. 이즙은 1719년(숙종 45년) 1월10일 “어차피 올 연말이면 (춘추 60을 앞둔) 성상의 기로소 입소를 본격 준비할 것인데,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빨리 성대한 잔치(기로연)를 베풀어야 함이 옳다”고 대리청정중인 세자(경종)을 재촉했다.
세자는 상소문을 읽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잘됐다”고 반색했다. 비록 임금이 만백성의 어버이라 하지만 더욱 높여서 나라의 큰어른으로 한껏 모시자는 얘기였으니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숙종실록>)
“태조대왕(이성계)께서도 춘추 60에 기로소에 들어가셨는데 이제 성상(숙종)도 59세가 되셨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예전의 사례를 찾아 추진하려 했는데 그대의 상서가 올라왔으니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빨리 추진하라.”
그러나 말처럼 쉽게 추진할 수는 없었다. 제 아무리 임금 마음대로인 왕조국가라지만 법규와 관례 없이 멋대로 추진할 수는 없었다.
세자는 태조대왕(이성계)가 기로소에 입소한 전례가 있는지 자세히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틀 뒤인 12일 약방 도제조인 이이명이 아뢴 내용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경현당석연도’. 4월18일 경현당에서 왕이 기로신에게 베푼 연회 광경.|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실록에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태조대왕께서 60세가 기로소에 들어갔다고 비록 유전하는 말은 있지만 명문(明文)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전해지는 고사는 “1394년(태조 3년) 임금의 나이가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서 어휘(御諱·임금의 이름)를 서쪽 누각 벽 위에 쓰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실록 등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이이명 등은 백방으로 다른 책을 찾아보았고, 그나마 근거로 삼을 만한 내용을 겨우 찾아냈다. 즉 후대의 인물인 심희수(1548~1622)와 김육(1580~1658)이 기록한 ‘태조와 기로소’ 이야기였다.
“본조(本朝·조선)에 이르러서 기로소 모임은 신하들 뿐 아니라 임금도 참여해서 권장했다. 태조가 어휘(御諱·임금의 이름)와 친필을 서쪽 누각 위에 남겨놓은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심희수의 ‘기로소선생안·중수서’)
“기로 모임은 당·송 시대부터 있었고 우리나라는 고려중기부터 시작됐으나 모두 사사로운 모임이었는데 우리 태조대왕처럼 임금이 명령하고 임금이 직접 참석한 특수한 은전(恩典)이 있었는가.”(김육의 ‘기사제명기’)
실록에서는 찾지 못했지만 심희수와 김육의 기록이 있으니 아쉬운대로 ‘근거’는 마련된 셈이라는 것이다. 이이명은 태조가 서쪽 누각에 썼다는 어필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기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 현전하지 않은 것일뿐”이라는 김육의 전언을 전했다.
결국 이이명은 “세자가 원하고, 또 근거도 마련된 셈이니 성상(숙종)께서는 기로소에 들겠다는 전교를 내리시라”고 권했다.
숙종은 이이명의 주청을 냉큼 받아들였다.
“내가 본래 병이 많아서 50세는 넘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제 넘겼다. 태조 대왕께서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셨는데 내가 태조대왕의 밑에 이름을 얹는다면 얼마나 성대한 일이 되겠는가. 이는 겸손할 만한 일이 아니다.”
‘봉배귀사도’. 기로신들이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잔을 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행렬.|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4책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그런데 숙종의 다음 한마디가 심상치 않다.
“(여성군) 이즙이 상서하기 전에 세자가 이미 이것을 청했고, 이즙의 상서가 나온 후에 다시 세자가 재청했으니 내가 기뻐하고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이미 허락했다. 전교(임금의 명을 담은 교서)할테니 거행하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숙종의 기로소 입사가 여성군 혼자만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세자가 먼저 청했고 여성군이 뒷받침했으며 세자가 다시 재청했고, 숙종은 이를 못이기는 체 하고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왕실차원에서 북치고 장구친 기획 드라마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식 역사서인 실록에 ‘태조의 기로소 입소’ 내용이 없는 것이 찜찜했다.
조정은 ‘태조의 기로소 입소’를 입증할 ‘출처와 논리’를 보강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먼저 춘추관 당상과 낭청(살무담당 종 6품)을 실록이 보관된 강화 정족산 사고(史庫)에 급파했다. 그러나 강화도를 다녀온 지춘추 민진후는 “실록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출처를 확인할 수 없어 헛걸음했다”고 보고했다.
“신(민진후)이 <태조실록>을 꺼내 첫 권부터 세종 기해년(1419년)까지 총 34책을 샅샅이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출처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숙종실록> 1719년 1월22일조)
세자가 재차 “명백하게 상고해 보았느냐”고 되물었지만 민진후는 “두사람이 밤낮으로 쉬지않고 뒤져보았으니 빠뜨릴 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민진후는 “근거와 출처가 없으니 일을 추진할 수 없다”면서 “차라리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양전(숙종과 중전)을 위한 잔칫상을 베푸는게 좋겠다”고 수정제안했다. 출처도 없이 무리수를 던질 수는 없으니 생신상이나 잘 차려드리라는 얘기였다.
‘기사사연도’. 기로신들이 기로소에서 연회하는 모습.|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빈정 상한 숙종, “그래? 그러면 관둬!”
이 말에 충격을 먹은 것일까. 시쳇말로 삐친 것일까. 숙종은 이튿날인 1월 23일 “믿을만한 역사기록이 없다니 할 수 없지. 논의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이 ‘그만두라’는 말을 했다고 넙죽 받아들이면 큰일난다. 심중을 잘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숙종의 말뜻은 ‘기로소 입소의 논리와 명분을 보강해서 다시 올리라’는 것이었다. 당장 임금의 의중을 받잡은 왕실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1월24일 선조 임금의 후손인 밀창군 이직과 낙창군 이탱, 서평군 이요 등이 부리나케 상소문을 올렸다.
세자 역시 “안그래도 성상께서 ‘논의 중지’를 결정하셔서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맞장구 쳤다.
1월23~24일자 <숙종실록>을 읽으면 마치 잘 짜여진 각본 같다. 임금이 ‘야. 증거 없다잖아. 안할래’라고 떼를 쓰면, 세자를 비롯한 종친들이 차례로 나서 임금의 체면을 살리는 상소문을 올리고…. 세자가 “너무 답답하다”는 심정을 피력하자 이튿날인 25일에는 동선군 이병과 동창군 이정 등이 다시 상소문을 올리고.... 그 다음날인 26일이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판가름한 분수령이 된 날이다.
연잉군(훗날 영조) 이금과 연령군 이훤(숙종의 여섯째 아들) 등이 종신(宗臣·벼슬하는 종친)들을 거느리고 상소문을 올렸다.
“실록에 없다고 갑자기 논의를 중단하다니오. 아니 될 말씀입니다. 국초에는 사관들이 더러 빠뜨리고 기록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연잉군 등은 갑자기 선조 임금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신 등이 일찍이 삼가 듣건대 선조 말년에 거의 육순이 되자 태조대왕의 고사를 뒤쫓아 기로소에 입소하려고 했다가 미처 시행하지 못해서 당시 신료들이 한스러워했다”는 것이었다.
기로연에 참석한 기로신 10명의 초상화.
■‘들은 이야기까지’ 근거와 출처로 둔갑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일까. 연잉군 등의 상소는 ‘신 등이 일찍이 듣기에…’라고 시작한다. 무슨 뜻일까. 기록이 아니라 구전이라는 것이다. 선조(1552~1608)는 57세에 승하했다.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을 아무리 들춰봐도 ‘선조가 기로소 입소를 도모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논리와 명분을 보강하려고 ‘들은 이야기’까지 들춰내면서까지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강행한 것이다.
세자와 왕자, 그리고 모든 종친이 총동원된 ‘숙종의 기로소 입소’ 이벤트가 막을 내렸다.
숙종은 “세자와 왕자, 여러 종신이 한결같이 청하고 심희수 등의 글이 있으며, 선조조의 고사까지 전해진다니 명백한 일이 아니냐”면서 “예전에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이 이렇게까지 소원하는 일인데 아무리 눈치없는 신하들이기로서니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후에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침내 기로소에 입소한 숙종은 성대한 잔칫상을 받으라는 청에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눈병에 걸려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데다, 백성들이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는 와중인데 무슨 마음으로 잔칫상을 받겠느냐”는 것이었다. 숙종은 “대신 다른 기로신들에게 잔치를 내려주는데 옳겠다”고 수정제안했다.
무엇보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했다. ‘태조의 기로소 입소’ 사적을 잃어버려 애를 먹었으니 이 참에 함께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길이 남길 필요가 있었다. 태조-숙종으로 이어지는 기로소 입소의 근거와 명분을 확실하게 만든 것이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 기념 행사를 그림과 함께 정리한 것이 바로 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기사계첩’이다.
<기사계첩>의 발문. 대제학 김유가 지었다. 태조의 기로소 입소 사실은 물론이고 그저 말로만 전해졌다는 선조의 ‘입소 기도’ 내용까지 사실처럼 기록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51세나 59세나 마찬가지로 60을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숙종의 59세 기로소 입소는 새발의 피였다.
숙종의 아들로서 부왕의 기로소 입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조(과거 연잉군)는 50살을 갓 넘긴 51살에 기로소에 입소했다.
영조는 평소 나이들어 기로소에 입소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 누누이 밝혀왔다.
“조정에 붕당이 없이 백성이 무사한 것이 지극한 즐거움이고,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평소의 소원이며, 장성한 원량(사도세자)에게 국사를 맡기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바라는 바다.”(<영조실록> 1743년 1월11일)
아무리 임금이라도 너무한 것 아닌가. 그러나 임금이 흉중의 일단을 털어놓은 만큼 종친들이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영조가 운을 뗀 지 1년 7개월여 뒤인 1744년(영조 20년) 7월 29일 종신(宗臣·벼슬하던 종친)인 여은군 이매가 “전하의 춘추가 50을 넘어 60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기로소에 입소할 자격을 갖췄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50을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 즉 ‘망육(望六)’이니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59세였고 전하의 춘추는 51세입니다. 조금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육순을 바라보는 것은 같습니다.”
어거지 상소문이었다. 8살이나 차이 나는 데도 ‘육순을 바라보는 것은 매한가지’(望六旬則一)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영조는 여은군의 상소에 반색한다.
“이것은 내가 겸손을 떨지 않겠다. 지극한 나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이르다고 할 수 있지만 난 노쇠하고 고질병을 앓고 있다.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어찌 될 줄 알겠는가.”
<영조실록>은 이 대목에서 “영조의 하교가 누누이 수백마디에 달했다”고 표현했다. 영조가 얼마나 기로소 입소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보다못한 우의정 조현명이 “성교(聖敎·임금의 지시)가 너무 번거롭다”고 일침을 놓았을 정도였다.
기로신의 이름과 나이, 본관 등을 기록한 좌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발 몇 년 더 기다리세요”
그로부터 10여일 뒤인 8월11일 이번에는 영의정 김재로가 반대대열에 합류한다.
“태종·세종·세조·중종·선조 같은 5~6분은 50세를 넘겼지만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말씀을 여러차례 내리셨는데…6~7년을 기다렸다가 의논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조는 “기로소 명단에 부자(숙종-영조)가 함께 등재되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냐”고 고집을 피웠다.
5일 뒤인 16일에는 영의정 김재로, 좌의정 송인명, 우의정 조현명 등 3정승 이름으로 반대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끄떡도 하지 않고 희한한 논리도 신하들을 몰아붙인다.
“내가 (기로소 입소를) 이번에 처음 생각했겠는가. 스스로 정력을 따져보니 앞날이 아득했다. 어찌 8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리겠는가. 그리고 만약 아들이 아비를 위한다면 8년을 기다리겠는가. 그러고보니 임금과 아비가 다르다는 것을 알겠구나.”
날이 갈수록 정력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8년을 기다리겠냐. 그리고 나를 아비라고 여긴다면 자네들이 8년 기다리라고 했겠느냐. 역시 아들이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과, 너희같은 신하들이 임금 생각하는 것과 역시 다르구나. 뭐 이렇게 따지고 있다.
꼭 어린 아이처럼 생떼를 부리고 있다. 임금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3정승이 어쩌겠는가. 우의정 조현명은 “보통 사람들은 늙는 것을 싫어해서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젊어보이려고 애쓰는데 임금이라는 분은 왜 이렇게 노인대접을 받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현명은 할 수 없다는 듯 “정 그러하시다면 특별 교서로 명한다면 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복했다. 영조는 두손 두발 다 든 조현명의 포기발언에 “그래 오늘의 임금과 신하 관계에는 전혀 틈이 없다(今日君臣 可謂無間矣)”고 너스레를 떨었다.
영조의 기로소입소를 기념한 <기사경회첩>. 영조는 부왕 숙종의 뒤를 좇아 불과 51살의 나이로 기로소에 입소했다. 삼정승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으나 “언제 60을 기다리느냐”고 고집을 피웠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반대상소 올린 관리를 유배형으로 다스린 영조
반대여론을 잠재웠다고 여긴 영조 앞에 생각지도 않았던 새까만 관리가 감히 나섰다. 사헌부 지평(정 5품) 박성원이었다.
박성원은 8월 29일 11조목에 달하는 긴 상소문을 올렸는데, 첫번째 조목이 바로 ‘영조의 기로소 입소 반대’ 였다. 박성원은 “조종(임금의 조상)께서 남몰래 도와주어서 성상(영조)의 수령이 100세까지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몇 년 기다리는게 무엇이 그리 급하냐”고 질타했다. 박성원은 끝내 소신을 굽힌 3정승 등 여러 신하들과 임금까지 싸잡아 “근일에 여러 신하들이 아첨을 일삼아서 임금을 날로 거만하게 만들고 국가의 운세를 고립되게 한다”고 비판했다. 영조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영조는 상소를 올린 박성원을 불러 길길이 뛰었다.
“이게 무슨 심보냐. (네가 날 욕보이려 한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일찍 물러났다면 이렇게까지 곤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더러워서 임금 노릇 못해먹겠다’는 듯 “모든 정사는 앞으로 승정원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까지 내렸다가 대소 신료들의 간청으로 겨우 진정했다. 그러나 박성원은 영조의 역린을 건드린 죄로 절도(남해)에 유배됐다. 이런 홍역을 치렀으니 어느 누가 입도 벙긋하겠는가. 영조의 기로소 입소 역시 숙종처럼 한바탕 난리를 떤 뒤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급기야 1744년(영조 20년) 9월9일 영조는 51살에 불과했지만 망육(望六), 즉 60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논리로 기로소에 입소했다.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는 궁중 연향, 즉 진연의식 관련 기록은 ‘갑자진연의궤’와 ‘기사경회첩’에 잘 남아있다.
■기로소 입소 1년만에 승하한 숙종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왜 숙종과 영조는 말도 안되는 무리수를 던져가면서까지 노인 대접을 받고 싶었을까.
여러가지 해석이 나온다. 숙종의 경우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뒤 거세게 일었던 비판적 기류를 잠재우려고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다는 주장이 있다. 60세에 기로소에 입소했다는 태조의 뒤를 잇는 적통 후계자임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로소에 들어감으로써 세자(경종)에게 안정적으로 왕위를 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단순하게 해석해보자. 역시 숙종의 건강을 들 수 있겠다.
일반 백성보다는 훨씬 풍요로운 의식주와 의료혜택을 받은 조선시대 임금들이지만 평균수명은 47세에 불과했다. 게다가 27명의 조선 임금 중에 환갑을 넘긴 이는 6명 뿐이다. 태조(74)와 정종(63), 광해군(67), 숙종(60), 영조(83), 고종(67) 등이다.
숙종은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다. 숙종이 기로소에 들기 2년전인 57살 때는 다리가 저리며 눈이 어지럽고 어두운 증세에 시달렸다. 숙종은 안질 때문에 글씨를 또렷하게 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왼쪽 눈 뿐 아니라 오른쪽 눈도 장님이 될 지경”이라면서 “억지로 정사를 펼치면 나에게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라고 호소했다.
숙종은 기로소에 입소한 직후부터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1720년(숙종 46년) 1월 드디어 염원하던 육순을 맞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해가 됐다. 숙종은 1720년(숙종 46년) 6월8일 승하할 때까지 6개월 이상 병석에 누워있었다. 숙종으로서는 60을 맞이하기도 벅찬 몸 상태를 알고 기로소 입소를 강행한 것 같다.
<기사계첩>의 서문. 기로신이자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인 임방이 작성했다, 1719년 4월18일 숙종이 차려준 기로연의 모습이 현장감있게 표현돼있다. 기로신들은 숙종이 내려주는 술을 5잔씩 받아마셨다. 특히 다섯잔째는 엄청 큰 은잔에 가득 담긴 술을 마셔야 했다. 기로신들은 만취했다. 주연이 끝난 뒤 기로신들이 엎드려 “잔치를 열어주시니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고 숙종은 “술을 얼마나 마셨느냐”고 일일이 물어보았다. 숙종은 “기로소로 돌아가서 더 마시라”고 권했다. 기로신들은 취한 몸을 이끌고 서로 부축한 채 기로소로 돌아가 ‘2차 술자리’를 가졌다.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무수리 어머니의 아들이 받고 싶었던 노인대접
숙종의 아들 영조는 어떨까. 83살까지 산 영조는 조선 임금 중 가장 장수한 왕이다. 그러나 ‘골골 팔십’ 소리를 들을 만큼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두창과 안질, 현훈증. 화병, 견비통, 담병에 시달렸다. 기로소에 입소할 무렵인 50세 때는 담증과 근육통,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영조가 기소로 입소를 염원한 이유를 대면서 “이르다지만 난 노쇠하고 고질병을 앓고 있다”면서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조바심을 낸바 있다. 영조가 기로소 입소를 강행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건강 염려증’이었다는 얘기다. 또다른 이유롤 꼽자면 영조는 부왕 숙종의 예를 따르려 했을 것이다. 특히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소생이어서 출생 콤플렉스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혐의가 평생 따라다녔다. 그렇다면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부왕 숙종의 모습과 자신을 대비시키면서 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자신의 권위를 보이려 했다는 주장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 이번에 국보로 승격지정 예고된 ‘기사계첩’에는 이렇게 환갑을 넘기기 힘든 조선 왕조 시대에 노인대접을 받고 싶었던 임금 부자의 어거지 섞인 분투가 담겨있다. 뭐 임금이 생떼를 써서 기로소에 입소한들 백성들에게 그 어떤 피해는 가지 않았으니 그냥 봐줄만 한 것이 아닐까. 임금 노릇 하느라 평생 스트레스 받았을테니 그 정도는 너그럽게 넘길만 하다.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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