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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노비, 재소자, 장애인…세종의 '혁명적인' 인권 복지정책

(가)=“출산 휴가 100일로는 부족하다. 산전 휴가 1개월을 더 보태라.” 

(나)=“산모만 휴가를 주었더니 안되겠다. 그 남편에게도 30일간 출산 휴가를 주어라.”

꼭 요즘 시대 어느 나라 복지정책을 일컫는 것 같다. 그러나 놀라지 마라. 이것은 다름아닌 만고의 성군이고,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대왕 복지정책의 일단이다. 그것도 조선시대에 사람 취급도 받지못한 것으로 알려진 ‘노비의 출산정책’이다.

조선 후기 곤장을 맞는 모습. 세종은 범죄자에 대한 노여움과 분풀이로 태형을 함부로 가하는 것을 막았다. 가죽채찍을 대용으로 사용하되 50대 이하로 규제했다.

■노비의 남편에게도 1개월 출산휴가를 줘라

(가)는 1430년(세종 12년) 10월 19일 세종이 승정원에 내린, 그야말로 노비를 보살펴줘야 할 어엿한 백성으로 여긴 구체적인 명령이었다. 세종은 이미 ‘7일’에 불과했던 관노비의 출산 휴가를 100일 더 늘려 준 바 있다. 세종의 말마따나 “(출산 후 단 일주일 후에) 아이를 버려두고 노비 일에 복귀하면 갓난 아이가 해롭게 될까봐” 산후휴가를 대폭 늘린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그것도 부족하다고 했다.

“(산후 휴가 7일+100일도 문제가 있더라.) 출산일에 임박할 때까지 일했다가 산기가 임박하면 미처 집에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 위급한 경우도 있다. 만일 산기에 임해 1개월간의 복무를 면제해주면 어떻겠느냐.”(<세종실록>)

그러나 세종은 이런 조치에도 만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인용문에서 보듯 4년 뒤인 1434년(세종 16년) 4월26일 지금 봐서도 획기적인 복지정책을 편다.

“일찍이 내가 산달의 여노비와 산후 100일 내에 있는 여노비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는 법을 만든바 있다. 그런데 그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않으니 산모를 간호할 수 없게 되는 폐단이 있구나. 이것은 부부가 서로 구원하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혹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으니 진실로 가여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산모의 남편에게도 만 30일의 휴가를 주어라.”(<세종실록>)          

산모, 그것도 여노비에게 산전 및 산후 휴가를 두둑히 내린데 이어 산모의 남편에게까지 만 30일의 출산휴가를 내렸으니 말이다.

산모에게만 휴가를 준들 산모와 갓난아기를 돌볼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세종은 아예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고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 모두가 산모만이 아니라 산모의 남편이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못박는 발언까지 했다. 

‘출산과 산후조리, 갓난아기 키우기 등은 부부가 함께 구원하는 뜻’이라 한 세종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이를 낳은 아내를 돌보느라 출근을 늦게 하는 남편을 두고 직장상사들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니가 아기 낳냐. 그렇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늦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500년 전 세종시대 보다, 못한 참으로 야만의 세월을 살았다. 최근 들어서야 산전·산후 휴가가 늘어났고, 이제와서야 그것도 몇몇 회사에서 남자의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이 허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자가 육아휴직을 감히 신청할 수 있는 직장이 몇이나 될까. 대체 세종이라는 분의 머리에서는 어떤 생각이 있었기에 그러한 혁명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 주리를 트는 모습. 세종은 누구보다도 구체적인 죄수인권대책을 내놨다. 세종은 감옥은 죄수들에게 일정한 벌을 주는 곳이지 사람을 죽이는 곳은 아니라고 했다. 

■여종에게 구더기 섞인 똥 오줌 먹인 27살 집현전 관리 부부

1427년(세종 9년) 8월 세종의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집현전 응교(종 4품) 권채(1399~1438)가 여종인 덕금을 학대한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즉 8월20일 형조판서 노한(1376~1443)이 세종에게 “길에서 한 노복이 무슨 물건을 지고 있는데 가죽과 뼈가 붙어 파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형상이었다”고 고했다.

“형조에서 수사해보니 그 여인은 권채의 노복이었고, 그 노복이 권채의 집에서 도망한 것을 미워해서 가두어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세종은 “평소 내가 권채를 좋게 보았는데 그렇게 잔인한 자였더냐”고 깜짝 놀랐다. 그도그럴 것이 권채는 불과 9개월전인 1426년 12월 11일 세종의 그 유명한 ‘사가독서(賜暇讀書·왕명으로 휴가를 내려 책을 읽게한 제도)’의 첫번째 헤택을 받은 기대주 학자였다. 세종은 당시 권채와 신석견·남수문 등에게 ‘사가독서’ 명을 내리면서 “직무로 인해 독서할 겨를이 없을 것이니 젊고 장래성 있는 너희에게 집에서 쉬면서 책을 읽는 시간을 준다”고 했다. 당시 권채는 세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27살 집현전 관리였다.

그런 그가 여자 노비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말인가. 4일간의 형조 수사 끝에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엽기적이었다.

일찍이 권채가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았다는 것. 그런데 덕금이 병든 할머니를 문병하려고 휴가를 청했지만 권채의 본부인에게 거절당했다는 것. 그렇지만 덕금은 허락없이 할머니를 찾아갔다는 것. 이에 권채의 부인 정씨가 남편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고 거짓으로 고했다는 것. 화가 난 권채는 덕금을 잡아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을 가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 방 속에 가두어놓았다는 것. 권채의 본부인인 정씨는 ‘고통을 주어 저절로 죽게 한다’면서 강제로 “오줌과 똥을 먹으라”고 핍박했다. 

형조는 “덕금이 구더기가 생긴 오줌과 똥을 먹지 않으려 하자 본부인 정씨는 침으로 덕금의 항문을 찔렀다”면서 “결국 덕금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는 등 수개월동안 고통 속에 살아왔다”고 보고했다. 세종은 “이 사건을 의금부가 국문토록 하라”는 명을 다시 내렸다. 

그러나 재수사를 벌인 의금부는 “권채는 ‘덕금 학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서 “주인(권채)의 명을 듣지 않고 머리털을 자르고 포학하게 대한 본부인 정씨의 죄만 물으면 어떻겠느냐”고 보고했다. 전형적인 꼬리자르기식 축소 수사였다. 의금부의 보고서를 보면 “이 사건의 경우 종(덕금)과 주인(권채) 사이의 일이며 이것을 형벌로 신문하고 끝까지 진상을 캐내는 것이 어쩐지 편치않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덕금 학대 사건’을 그저 ‘주인과 종’ 사이의 일로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하지만 세종은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 비록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지만 덕금이 고소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먼저 인지수사한 사건이고 또한 죄질이 아주 불량하다고 여겼다. 세종은 의금부에 재삼 재사 철저히 수사하라고 또다시 다그쳤다. 

궁지에 몰린 권채 부부는 모든 허물을 형조판서에게 돌리는 추태까지 보여 ‘글은 알지만 부끄러움은 모르는 인사’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때 세종이 천고에 남을 명언을 ‘날린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1427년 8월29일) 

결국 세종 임금의 총애를 받아 첫번째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은 집현전 관리가 되었던 권채는 직첩(관리 임명장)을 회수당하고 유배형의 처벌을 받는 신세가 됐다. 세종은 자신이 그토록 총애했던, 더욱이 27살 밖에 안된 새파란 관리조차 임금의 허락없이 노비를 학대하고 심지어는 죽이는 행태를 보인 것에 자극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점복을 주업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장애인들. 시각장애인 판수(判數)가 제삿상에서 오른손으로 북을 두드리고 왼손으로 바닥에 잇는 꽹과리를 쳐 가면서 경(經)을 읊고 있다.|숭실대 박물관

■“노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다”

세종은 결국 1444년(세종 26년) 윤 7월24일 “노비를 함부로 구타하거나 죽이지 말라”는 명을 형조에 내린다. 

세종은 우선 “우리나라 노비법은 상하의 구분, 즉 신분을 엄격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며 “이 법으로 강상(綱常·사람의 도리)이 지켜지는 것”이라 전제한다. 삼강오륜을 지키려면 당연히 노비법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상벌은 본디 군주의 대권(大權)이지만, 임금된 자라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서 또한번 명언 릴레이를 펼친다.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다. 그런데 신하된 자가 하늘이 낳은 백성(천민)을 노비로 부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것인데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세종실록>) 

비록 상하의 구분을 가려 강상의 도리를 지키려고 노비라는 제도를 만들기는 했지만 ‘노비 역시 하늘이 내린 백성’이므로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주가 반드시 보살피고 지켜주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을 신상필벌하는 것이 군주의 권리인데, 너희같은 신하된 자들이 그저 노비를 부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그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흔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노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라는 언급이야말로 세종을 또한번 성군의 반열로 올려놓은 명언이라 할 수 있다.


■재소자 인권을 위한 5대 행동강령

세종의 시선은 노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른바 재소자 인권에까지 따사로운 눈길이 간다. “감옥을 설치하는 것은 죄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세종실록> 1430년 4월27일)는 세종의 생각 덕분이다.

1448년(세종 30년) 8월25일 세종은 아예 각도 감사들에게 재소자 인권을 위해 해야 할 ‘5대 강령’을 발표한다.

“1)매년 4~8월 새로 냉수를 길어다 자주자주 옥 가운데 바꿔놓을 것, 2)5월에서 7월10일까지 한차례 몸을 씻게 할 것, 3)매월 한차례 머리를 감게 할 것 4)10월부터 정월까지 감옥 안에 짚을 두껍게 할 것, 5)목욕할 때 관리와 옥졸이 친히 스스로 감찰해서 도망가는 것을 막을 것 등이다.”

죄수 인권과 관련해서 지금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세종의 마음 씀씀이는 실록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1431년(세종 13년) 7월28일자 <세종실록>을 보라.

“옥에 갇힌 죄수 가운데 홀아비와 과부의 어린 자식들을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이 굶주리고 추워서 죽음에 이를 것이 아닌가. 지금부터는 그 친족에게 주고, 젖먹이 아이는 젖있는 사람에게 주어라. 또 친족이 없으면 관가에서 거두어 보호하고 기르도록 하라. 잘 돌보는 지 서울에서는 사헌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규찰하라.”

친족이 있다면 친족이 키우되 없으면 관가에서 맡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를 잘 돌보는지 국가나 지방 치원에서 관찰하라는 것이다. 젖먹이 아이가 젖을 먹지못할까봐 ‘깨알지시’하는 세종의 마음에서 백성을 향한 가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확인된 백제 시대 목간. 구황기 때 곡식을 빌려주고  구황기에 곡물이나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이른바 ‘환곡(還穀) 문서’일 가능성이 짙다.

■재소자 귀휴제도의 효시

이 뿐이 아니다. 세종은 죄인들에게 휴가를 주는 이른바 ‘귀휴제도’까지 시행한다. 

1444년(세종 27년) 7월12일 의정부는 세종의 ‘귀휴제도’에 허점이 있다면서 제도보완을 건의한다.  

“지난번에 주상께서 유배중이거나 복역중인 죄인 중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는 휴가를 주어 1년에 한번씩 서로 만나 보게 허락하셨습니다. 또 그 휴가 일수는 모두 복역일수에 통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고 오고 할 때에 병들었다고 거짓 일컬으며 중도에 머물고, 고의로 시일을 경과하는 자가 있사오니….”

참으로 놀라운 제도가 아닌가. 이미 574년 전에 죄인들의 귀휴제도를 만들었고, 무엇보다 귀휴일자를 모두 복역기간에 산입하는 시스템이 아닌가. 세종은 의정부가 제도보완 요청을 수용했지만 귀휴제도 자체는 유지시켰다.

세종은 여름철이면 죄수들이 온열질환에 걸릴까봐, 겨울철이면 동상에 걸려 얼어죽을까봐 전전긍긍했다.

“각도 관찰사들은 들어라. 올해는 유난히 더위가 심하구나. 그래서 유배형 이하의 죄수는 모두 사면하라. 또 석방되지 않은 죄수는 옥에서 더위 때문에 죽게 될까 내 마음이 몹시 근심된다. 죄수들이 병나지 않게 잘 돌봐 주거라”(<세종실록> 1443년 7월12일)

“감옥 죄수가 잇따라 죽는데, 고문이 너무 심한 때문만이 아니다. 실제로는 감옥이 좁고 막혀서 모진 추위와 무더위의 장마비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병이 나서 많이 죽게 되어 진실로 불쌍하다.”(<세종실록> 1438년 12월18일)

감옥이 너무 좁다는 것도 지적사항이었다. 

“감옥이 너무 좁아 무더위와 맹추위를 만나면 병에 걸리기 쉽다. 옥이 없는 곳은 새로 짓고, 좁은 곳은 넓히고, 남녀 옥사를 확실히 구분하라. 그리고 죄인의 경중을 가려 거처하는 곳을 따로 만들라.”

세종은 이것을 두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서 흠휼지인(欽恤之仁)을 넓히는 일”이라 했다.       


■감옥에는 의술에 정통한 의원들을 배치해라    

세종은 감옥의 죄수들이 병에 걸려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못해 죽어가고 있는 현실도 개탄했다.

1437년(세종 19년) 11월9일 세종은 “지금 전옥에 전염병이 번졌다”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빨리 의원을 정해 치료하라. 병의 증세를 살펴서 보고하여 약재료를 타면 늦는다. 다양한 약재료를 미리 혜민국에서 받아다가 비치해놓고 급한 환자가 생기면 빨리 처방해줘야 한다”고 재촉했다. 치료가 늦어 죽는 죄수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군주가 앞장서서 ‘교도소 인권’을 외치자 신하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1439년(세종 21년) 3월9일에는 형조가 나섰다. 즉 감옥(전옥서)에 파견되는 의원들은 대부분 임시직이거나 정규직이라도 수습의원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죄수들의 병 증세를 알지도 못하는데다 진찰 후에 약을 받아오는 것도 지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형조는 “바로 이런 실정이니 앞으로 감옥에는 의술에 정통한 의원들을 배치해야 한다”고 요청했고, 세종은 흐뭇한 마음으로 가납했다. 형조는 또 “앞으로 옥에 갇힌 죄수의 의복·음식·질병·기거와 죄수들끼리 다투고 혹은 학대하는 자를 가려낼 수 있도록 전옥서의 관리가 숙직·감시해야 한다”고 청했다. 세종은 이 역시 “그러라”고 냉큼 받아들였다.     

심지어 세종은 평안도와 함길도 등 죄수들의 단골 유배지에서 각 고을 수령들이 죄인들이라고 홀대할까봐 “그들이 춥고 배고프지 않도록 잘 보살피라”고 신신당부한다.(1436년 11월17일)

“죄인들은 그 처자까지 평안도와 함길도에 이주시켜 두는데, 각 고을 수령들이 죄인이라고 구휼하지 않을까 두렵다. 지금부터 죄인들이 지나가는 관(館)과 역(驛)에서 식량과 의복을 공급해라. 배고프고 춥게 하지 말라. 또 그들이 정주하는 곳의 각 고을은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 구휼하고 양육하여, 생업에 편안하게 하라.”

김준근의 풍속도. 어린아이의 안내를 받아 길을 가고 있는 시각장애인. 시각장애인용 장죽을 잡았다.|숭실대박물관

■어가를 막아선 집단시위에 대한 세종의 대처법 

참 대단한 세종이 아닌가.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세종의 눈길은 가없다.

1419년(세종 1년) 5월3일 사냥을 참관한 뒤 발길을 돌린 세종 임금의 어가가 개성의 영빈관에 이르렀을 때 소동이 일어났다. 

시각장애인 114명이 어가 앞을 막아서 “배고파 못살겠다”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세종실록>은 “맹인들이 어가 앞에서 궁핍함을 호소했다(告窮乏于駕前)”고 기록했다. 감히 국왕의 행차를 막아서다니….

대멍천지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 시대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통령의 전용차를 막고 불법으로 집단행동을 벌인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다. <실록>의 표현은 담담하기만 하다.

“상(임금)은 그들의 호소를 듣고 유후사에 명하여 쌀 40석을 주었다.”

이런 일은 뉴스거리도 안된다는 듯…. 그렇다면 이들은 특별케이스였을까. 

아니었다. 3년 뒤인 1422년(세종 3년) 11월28일 서울에 사는 시각장애인 여자 26명이 집단으로 북을 치며 호소한다.

“우리가 일찍이 환상(還上·관청에서 곡식을 빌린 뒤 가을에 갚는 제도)을 받았사옵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해서 현물(곡식)로 갚을 수 없으니 저화(楮貨)로 대신 갚으려 합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저화는 여말선초 때 발행된 지폐였다. 하지만 실질가치를 중요시하는 시중에서 신뢰를 받지 못해 저화의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시각장애 여성들은 도저히 현물(곡식)로는 갚을 수 없으니 관청조차 받기 싫어하는 저화로나마 갚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그러자 세종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쿨’하게 명했다. 

세종이 어가까지 가로막은 소외계층의 호소를 군말없이 들어준 까닭이 있다.  

“환과고독(鰥寡孤獨·늙은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 의지할 곳 없는 노인)과 장애인은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에게 환곡(식량을 빌려줌)을 우선 베풀고, 거처할 집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세종실록> 1418년 11월3일)

막 즉위한 세종의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이다. 3년 뒤인 1421년(세종 3년) 2월, 잇단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장애인과 병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라”는 명을 내리면서 “과인의 명대로 하지 않은 수령은 중죄로 처단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감찰관을 파견해서 반드시 확인할 것이다. 만약 민간의 백성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었다면 중죄로 처단할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요순시대는 아니었지만…

물론 <세종실록>을 읽어나가다 보면 당혹스러운 내용도 눈에 띈다. 세종의 치세 때 도둑이 창궐했다는 기사다. 

“서울 한복판에서 도둑을 맞는 집이 없는 날이 없고, 이를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거리 위에 들립니다. 이제는 내탕(內帑)의 금작(金爵)과 봉상시의 은찬(銀瓚)까지도 털리니….”(<세종실록> 1435년)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에서 금으로 만든 술잔(금작)이,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에서 제기(은찬)까지 잇달아 털렸다니 얼마나 많은 도둑이 들끓었다는 것인가. 또하나 반전의 기록은 세종시대에 유독 능지처참이라는 혹형이 많았다는 것이다.

기자가 예전에 한국고전번역원의 <세종실록> 기사에서 ‘능지처사’ ‘능지처참’ ‘거열’ 등의 기사로 검색해보니 60명이 이른바 능지처참 형을 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면 세종은 고전적인 의미의 ‘해동의 요순’은 아니었다. 

고전적인 의미의 ‘요순시대’는 임금이 누군지 신경쓸 필요없이 잘 다스린 시대이고, 또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그만두면 되는 시대이며, 그래서 부른 배를 두드리고(鼓腹) 땅을 구르며(擊壤) 노래를 흥얼거리며 살았다는 ‘고복격양’의 시대를 일컬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뭐라 이름을 짓지 못하여 ‘해동의 요순(堯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세종실록>) 후대의 신하들은 자신이 모시는 임금들에게 “세종대왕과, 세종을 빼닮은 성종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세종은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어졌고, 성종은 ‘세종의 고사’를 따라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를 사랑했나이다. 세종과 성종을 따르는 것이 곧 성인을 본받는 것이라 했습니다.”(<명종실록> 1548년 3월14일) 

세종의 시대는 이미 임금이 누구인줄도 모르고 배만 두들기며 고복격양가를 불러도 되는 그런 단순한 시대가 아니었다.


■‘까임방지권(까방권)’을 지닌 세종

때는 바야흐로 여전히 고려를 향한 민심이 만만치 않았던 여말선초의 혼란기였다. 

도둑이 지존인 임금이 사는 궁궐의 내탕고까지 침입하는 그런 시기였다. 또한 능지처참의 희생자 중 졀대다수인 58명이 주인과 부모, 남편을 살해한 이른바 강상죄인이었다. 세종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폐륜범죄는 극형으로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주인공이 해동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이니까 이 대목과 관련해서는 ‘아쉽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가 사회의 기강을 단단히 세워야 할 시기였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천하의 세종대왕이라도 실록을 곰곰히 읽어보면 그 역시 잘못하고 실수할 때가 적지않다. 버럭 화를 내고, 생떼를 쓰고, 심지어는 고문을 가해서 거짓자백을 받아낸 일도 있었다.

하지만 32년 세종대왕의 치세는 그가 이룬 업적이 과실을 10겹으로 뒤덮고도 남기에 후대의 임금 신하 백성은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만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한글창제와 4군6진 개척과 대마도 정벌, 농서보급(농사직설), 천문과학기구 제작(측우기·혼천의·간의·앙부일구) 등의 업적만 있을까. 가만보니 세종대왕이 1418년 8월11일 임금이 되었으니 올해가 즉위 600주년 되는 해다. 오늘 배운 소외계층을 위한 선진적이고 혁명적인 인권정책 또한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임을 알 필요가 있겠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최익한, <조선사회정책사>, 송찬섭 엮음, 서해문집, 2013

정창권,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역사속 장애인 이야기>, 문학동네, 2005

오미현, '세종시대 인권보장을 위한 형사법 제도의 고찰', 공주대 석사논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