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없을 겁니다. 여태껏 여러 대학과 여러 학자들이 조사했지만 허탕만 쳤습니다."
1978년 1월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맨먼저 단양군청을 찾았는데 시큰둥한 반응만 얻었다. 지금까지 많은 조사단이 오갔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새해벽두부터 뭐 그렇게 헛걸음 했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조사단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단양 읍내 뒷산인 성재산(해발 323m·적성산성)을 찾았다.
오후 2시. 조사단은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뒤덮은 산에 올랐다.
정영호 교수는 학생들에게 한가지 약속을 했다.
“성 안에는 옛날 식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지. 대부분이 신라토기였고. 학생들에게 ‘글자가 있는 기왓장을 수습하면 맥주 한 병씩 준다."
그러나 별 수확이 없는 듯 했다.
간밤에 내린 눈에 녹아 진탕이 되었고, 조사단 학생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려고 두리번거렸다.
마침 직경 한 뼘쯤 되는, 흙 묻은 돌부리가 지표면을 뚫고 노출돼 있었다. 안성맞춤이었다. 학생이 신발 흙을 털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돌부리에 새겨진 신라의 역사
무슨 글자 같은 것이 보이는 게 아닌가. 흙을 털어내자 맨먼저 눈에 띈 것은 글자는 ‘大’자였다.
정신없이 흙을 닦아내니 ‘阿’자와 ‘干’자도 보였다.
오후 3시30분. 성 안에 흩어져 조사 중이던 학생들을 부랴부랴 집합시켰다.
눈보라와 함께 날씨가 쌀쌀해졌지만 그냥 내려올 수 없었다. 야전삽으로 5㎝가량 얼어있는 지표를 걷어내고 맨손으로 긁어냈다. 30㎝ 정도 깊게 비스듬히 누워있던 돌부리가 완전히 노출됐다.
한 글자씩 확인될 때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깜짝 놀랄 만한 금석문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날이 저물어 소나무 가지와 잡초로 비석을 가려놓고 하산했다. 다음날 비석을 깨끗이 닦고 비신을 비스듬이 세워 촬영과 탁본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비록 비석의 상단부가 파손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좌우 측면은 거의 완형이었다. 전체 글자는 440자로 추정됐고, 288자 정도를 판독할 수 있었다.
이 ‘단양 신라 적성비’(이하 적성비)의 발견 소식에 학계는 흥분했다.
그럴 만했다.
금석문(金石文)이란 당대 사람들이 직접 쇠(金)나 돌(石)에 새긴 글(文). 그러니 1차 사료로서의 가치는 말할 나위가 없다.
당대의 문화 및 사회상을 생생한 필치로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후대의 자료일 수밖에 없는 역사서(<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를 보충하고, 그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
역사적인 발견 후 한달 보름이 지난 2월25일 학계 인사들이 총촐동했다.
김원룡·김석하·남풍현·이기백·임창순·변태섭·황수영·이희승·이병도·진홍섭·최순우·권오순·최영희·김정기·김동욱 등 내로라 하는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술좌담회를 열었다.
금석학자인 임창순 당시 태동고전연구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비문은 가장 난해한 문장이네요. 향찰식(鄕札式)도, 한문식도 아니어서 해독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암호문 같은 비문내용
당시 김석하 단국대 교수의 해석문을 소개해보자.
“○○년 ○월중에 (진흥)왕께서 대중등(大衆等)에 교사를 내리시니 탁부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와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와 사탁부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 등이 교사를 받들어 관할하다. 적성 사람 야이차(也이次)가 잘 보좌하고 힘써 일했으므로 뒤에 그의 처인 ○○의 과오를 용허(容許)해 주었으며~ 소자(小子) 도지(刀只)와 소녀(小女) 오례혜(烏禮兮)와 ○○에게 적성 전사법(佃舍法)을 만들게 하고~. 이후 국중(國中)에서 야이차처럼 잘 보좌하고 힘써 일할진대 ~~우대하리라 했다.~”
아무리 봐도 무슨 암호문 같다. 변태섭 당시 서울대 교수가 쉽게 플이했다.
“진흥왕이 이사부와 비차부, 무력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하여 신라의 척경(拓境)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 사람 야이차의 공을 표창했고, 후에도 야이차처럼 충성을 바치면 포상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 정신의 최초의 표현이다.”
정구복 전북대 교수가 다시 요약했다.
“(목숨을 바친) 적성 사람 야이차와 그 형제들의 처 3명과 소자, 소녀들에게 포상을 내리는 내용이다.”
즉, 신라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 땅이던 적성(赤城·단양)을 점령한 뒤, 즉 충청문화권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민심을 위무하는 차원에서 신라의 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라는 것이다.
■신라장군 이사부, 김유신 할아버지 무력의 등장
비문에 512년(지증왕 13년) 우산국을 정벌한 그 유명한 이사부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 그리고 비차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이 흥미진진하다.
이 적성비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신라가 북방경략에 나섰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진흥왕 때이다.
그러면 정확한 연대는? 일단 적성현(단양)이 신라의 수중에 넘어간 때인 진흥왕 12년(551년)이 틀림없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삼국사기>를 통해 비교해보자.
“진흥왕 12년 거칠부와 대아간(17관등 중 5관등) 비차부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 죽령 바깥쪽 고현 안쪽의 10군을 빼앗았다”(<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전')
당시 변태섭 서울대 명예교수는 더 나아가 “아마도 551년보다 수년 앞서 적성비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비문에 등장하는 아간(아찬·17관등 중 6관등) 비차부를 보자.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전'을 보면 551년 고구려를 침공할 때의 비차부는 대아찬(대아간), 즉 5관등이다. 그런데 적성비의 비차부(6관등)는 아직 5관등으로 승진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이것은 적성비가 551년보다 앞선 시기에 세워졌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거칠부와 이사부, 비차부
또 하나, 적성비에 거칠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다. 거칠부가 누구인가. 고구려 경략의 공을 세운 것은 물론 진흥왕 6년(545년) 신라의 역사책인 <국사(國史)>를 편찬한 인물이 아닌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이사부나 무력, 비차부 등은 보이는데, 적성비에 거론된 10명의 공신 이름에 거칠부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학자들은 바로 이 대목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고구려 경략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거칠부 이름이 없을 리가 만무했으니까.
변태섭 교수는 비문의 세번째줄 맨 위의 부분, 즉 ‘○○夫智 大阿干支’에서 ‘○○夫’ 부분이 바로 거칠부(居柒夫)가 아닐까 추론했다.
즉 ‘○○夫智大阿支’는 바로 ‘居柒夫智 大阿干支’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 이름 뒤의 지(智)와, 관직 뒤의 지(支)자는 모두 경칭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이름 뒤에 붙는 ‘지(智)’는 요즘으로 보면 ‘○○씨’, 관직 뒤의 지(支)는 '○○님'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결락된 부분은 ‘거칠부와 그 관직인 대아간지, 즉 17관등 중 5등인 대아간(대아찬)’일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후에 탁본이 아니라 실물을 꼼꼼히 살펴본 학자들은 이 의견을 사실상 공인했다. 그러면 비문에서 거칠부가 이사부보다 훨씬 뒤에 나온 이유는?
그 또한 설명이 된다.
이사부는 내물왕의 4세손이고, 거칠부는 내물왕의 5세손이다. 나이 차이가 많았다는 얘기다. 장유유서로 가칠부의 이름이 뒤에 나온다는 것이다.
■ 국사 편찬 거칠부까지? 그런데 비문 내용을 훑어보면 중요한 단서가 있다. 변태섭 교수가 그걸 지적했다. 최소한 진흥왕 때 신라가 성별·연령별로 인구를 분류했고, 토지제도까지 확립하는 등 율령제를 시행했다는 증거일 수 있으니 말이다.
■ 비문이 남긴 교훈 여담 하나. 금석문의 발견은 학자들을 울리고 웃긴다.
“문제의 거칠부가 대아간(5관등)에서 파진간(4관등)으로 승진한 것이 진흥왕 6년이다. 이찬(2관등)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국사>를 편찬했다는 바로 그 시기다.”
따라서 이 적성비는 거칠부가 대아간에서 파진간으로 승진한 진흥왕 6년 이전, 즉 545년 이전에 건립되었다는 말이 성립된다.
이기백 당시 서강대 교수는 적성비의 또 한부분에 주목했다. 바로 비문에 나오는 소자(小子), 소녀(小女) 부분이다.
이기백 교수는 “일본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신라장적에서 보이는 小子, 小女는 바로 연령별로 인구를 나눌 때 가장 어린 자녀들을 분류한 용어”라고 말했다. 또 비문에 보이는 전사법(佃舍法)은 일종의 토지제도를 뜻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흥왕 7년(520년) 율령을 반포했고, 비로소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했다’고 해놓았어요. 구체적인 율령의 내용은 기재하지 않고, 복색제도의 확립만을 기록한 거지. 그 때문에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때 반포한 율령은 복색제도에 국한된 것이지,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율령은 아니라는 해석도 나왔어요.”(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그러나 이기백 교수는 ‘소자, 소녀’와 토지제도인 ‘전사법’이 적성비문에 출현한 것도 유심히 살펴봤다.
또한 이기동 당시 경북대 교수는 비문의 맨 마지막이 “○○智 大烏之”로 끝나고, 외위(外位·외직)의 명칭인 아척(阿尺)이 등장한 것을 주목했다. ‘대오’는 바로 17관등 가운데 15관등을, ‘아척’은 외직 가운데 최하등급이다. 이로 미루어 신라의 17관등제도는 최소한 비문이 세워질 무렵인 진흥왕 12년(551년)에는 이미 확립되었다고 본 것이다.
“가장 충격을 받은 이가 진평왕 때(재위 579∼632년) 관등제도가 성립됐다고 주장해왔던 일본학자 미이케 켄이치(三池賢一)일 것이야. 한때 그의 학설은 너무도 정연해서 누구라도 부인하기 어려웠는데, 비문이 발견되면서 단번에 허물졌으니….”(이기동 교수)
금석문은 이렇게 부족한 사료를 근거로 큰소리 뻥뻥 쳐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학자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이기동 교수는 “아무리 화려한 학자라 해도 무명고지에서 나온 하나의 비석 때문에 평생의 연구업적을 깡그리 잃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일정한 사료를 가지고 학자가 아무리 버무려봐도 한계가 있지. 그것이 고대사 연구자의 운명이자 비극입니다.”
하지만 막 발견된 금석문의 희미한 글자를 더듬어 해독하는 일도 쉽지 않다. 자칫 잘못 읽었다가는 그 또한 역사왜곡의 길로 빠질 수 있으니까. 조심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기사는 예전에 발표한 글을 팟캐스트 용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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