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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허황옥, 평강공주…호화혼수의 원조들

“위로는 벼슬아치부터 아래로는 여염에 이르기까지 한번의 혼례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인(中人) 열 집의 재산보다 많습니다. 한 차례의 잔치에 드는 비용도 가난한 백성의 1년치 양식거리가 넘습니다. 이외에도 의복과 음식, 집, 식기 등이 분수에 넘칩니다.”

1834년(순조 34년) 지평 이병영이 망국적인 호화혼수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혼례비용으로 일반백성도 아닌 중인 10명의 재산보다 많다는 것이다. 이 액수는 가난한 백성의 1년치 양식거리가 넘는다니 할말을 잃게 한다.

혼수문제의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옛 자료를 찾아보니 고구려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매우 질박했다. 

“연애결혼도 인정한다. 결혼할 때는 남자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재물이 없이 결혼하는 것이 예법(禮法)이다. 만약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딸자식을 계집종으로 파는 것으로 생각해 부끄럽게 여겼다.(有婚嫁 取男女相悅卽爲之 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以爲賣婢)”

중국측 기록인 <북사(北史)> ‘열전’ 등에 나온 고구려의 혼인풍속이다.

 김준근의 풍속도. 결혼을 앞두고 예물을 들고 가는 모습을 그렸다. 조선시대에도 혼수가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파혼하려 했던 얼빠진 신랑이 적발되기도 했다. |숭실대박물관 제공

연애결혼을 인정했다는 대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혼수품의 경우 신랑집에서 가져오는 돼지와 술 뿐이라는 것이다.

또 혼수를 받는 행위는 마치 딸을 노비처럼 파는 것으로 여겨 매우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질박한 결혼풍습인가. 

■‘가출공주’ 평강이 가져온 혼수
그러나 역사서를 들춰보면 혼수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혼인이라는 것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양가 집안이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성의 혼인이나 왕가의 혼인이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스토리를 양산한다. 예나 지금이나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예컨대 마음 속에 그렸던 배필을 찾아 무작정 가출한 평강공주도 혼수품 만큼은 반드시 챙겼다.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딸인 평강공주는 어릴 적 울보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평원왕은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낼 거야"라 놀렸다. 

온달은 당시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음식을 구걸해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해진 신발을 신은 채로 거기를 헤맸다. 당대 고구려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 했다.

그 소문이 궁궐에까지 퍼졌던 것이다.

그런데 16살이 된 평강공주가 "이제 난 온달과 혼인할 것"이라 고집을 피웠다. 아버지 평원왕이 "무슨 소리냐"고 꾸짖었지만 평강공주는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 거냐. 어릴적부터 온달한테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냐"고 고집을 피웠다.

아버지가 길길이 뛰었지만 평강공주는 끝내 "온달과 혼인을 치르겠다"고 궁을 뛰쳐나왔다.

그 때 공주가 팔꿈치에 매고 나온 것이 금팔찌 수십개였다. 공주는 물어물어 온달을 찾아가 마침내 백년가약을 맺는다.(<삼국사기> ‘온달전’)

공주가 임의로 금팔찌를 지니고 나왔을까. 어머니(왕비)나 혹은 아버지(평원왕)가 은근슬쩍 마련해준 혼수품은 아니었을까. 어차피 딸의 가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부모가 남몰래 혼수를 마련해준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공주는 가져온 혼수품(금팔찌)을 내다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소와 돼지, 식기 등을 마련했다.

온달은 아내의 혼수품으로 마련한 말로 사냥대회에 나가 임금(장인)의 눈에 들었다.

빼어난 사냥실력으로 장군이 되었고, 급기야 임금의 정식사위가 됐다. 평강공주의 혼수품이 바보 남편을 강성대국 고구려의 장군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호화혼수의 원조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호화혼수의 원조는 허황옥이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국제결혼한 야유타국의 공주님이다.

기원후 48년 7월, 야유타국의 공주가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단 배를 타고 김해에 닿았다. 김수로왕은 임시장막으로 궁전을 조성해서 공주를 맞이했다.

공주는 나루터에 배를 댄 뒤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16살 공주가 가져온 혼수품은 어마어마했다.

먼저 공주를 따라온 잉신(잉臣·혼인할 때 신부를 따라온 신하)이 두 명이나 됐다.

신보와 조광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아내와 데리고 온 노비까지 모두 20여 명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금수능라(錦繡綾羅·비단옷감)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경구복완기(瓊玖服玩器·장신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보기 힘든 고급 중국제 호화혼수였던 것이다. 김수로왕과 침전에 든 공주가 왕을 찾아 혼인하게 된 까닭을 설명한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꿈에서 상제가 나타나 너희 공주를 가락국의 수로왕(首露王)의 배필로 삼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상제의 말씀 대로 저를 대왕에게 보낸 것입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김준근의 <조선풍속도>. 혼례를 마친 첫날 밤 신부집에 꾸려진 신방에서 족두리를 쓴 신부가 상을 받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 |숭실대박물관 제공

그러니까 공주의 부모인 아유타국 임금이 어린 딸을 이역만리 먼 곳으로 시집 보내면서 바리바리 혼수품을 싸준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도 부모의 전재산이라도 털어 보냈을 것이다.

김수로왕은 신부 허황옥이 가져온 혼수품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먼저 그녀가 데려온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했다.

또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을 내줬다. 그들이 가득 싣고 온 혼수품은 왕궁의 창고(內庫)에 두어 왕후의 사시(四時)비용으로 쓰게 했다. 

■서라벌이 떠들썩했던 혼수의 대열

<삼국사기> ‘신문왕조’를 보자. 전성기 신라임금과 귀족간 있었던 흥청망청한 혼인의례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문왕 3년(683), 왕은 일길찬(一吉飡·17관등 중 7관등) 김흠운(金欽運)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엄청난 양의 혼수품을 전달한다.

“~예물로 보내는 폐백이 15수레였다. 또 쌀·술·기름·꿀·간장·된장·말린 고기·젓갈이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 5월7일 7일 이찬 문영과 개원을 그 집에 보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책봉했다. 그날 묘시(卯時)에 (귀족들의 부인) 30명들을 보내 신부를 맞아오게 했다. 신부는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서 시종하는 관인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성대했다.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신부가 수레에서 내려 궁궐로 들어갔다.”

기사를 보면 왕비를 맞이하면서 들썩들썩거렸을 서라벌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모두 합해 300수레에 달했던,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호화혼수품 대열이다.

백제(660)에 고구려(668)까지 멸망시키고 당나라까지 쫓아낸(676) 신라에 무슨 걱정이 있었으랴. 태평성대를 맞이한 통일신라 시대의 흥청거림을 한 눈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 이날 맞이한 신문왕의 부인은 사실 두번째 왕비였다. 신문왕의 첫째 왕비는 태자 시절 혼인한 김흠돌의 딸이었다. 하지만 신문왕이 즉위한 681년, 아버지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키자 궁에서 쫓겨났다.

그렇게 혼자가 된 신문왕이 임금자리에 있을 때 재혼한 것이었다. 왕은 그렇게 맞이한 어린 신부에게 뻑적지근한 혼수품을 보냈을 것이다.  

■나라가 혼수품을 대주다

조선시대에서도 혼수는 요지경 풍속이었다.

예컨대 혼수를 갖출 수 없던 민초들은 시집·장가도 가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나서 “가난한 자들에게 혼수품을 대주라”고 각 지방관에게 엄명을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세종은 1420년 <원·속육전>에 따라 혼수품 구휼의 원칙을 시행하라고 명을 내렸다.

“혼인의 예는 인륜으로서 소중한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늦도록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다. 서울에서는 한성부(漢城府)가, 지방에서는 감사가 힘을 다해서 방문하여 조사하라. 내외친(內外親)으로 사촌(四寸) 이상의 친척들이 함께 혼수를 갖추어 때를 잃지 아니하도록 하라. 만약 이를 어기면 죄를 주라.”

장마가 계속되는 것을 혼수와 연결시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1478년(성종9년) 장마가 계속되자 임금이 예조에 명했다.

“장마가 몇달째 계속된다. 혹 가난 때문에 시집 못간 노처녀의 한(恨) 때문인가. 혼수감을 넉넉하게 주어 혼인시키라.”

이역만리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의 묘비. 엄청난 양의 혼수품을 가져왔다. 뭐든지 더 해주고싶은 부모의 마음이 구구절절 서려있다.

■혼수품 타박에 신부 버린 정신나간 남자

혼수품이 적다고 타박하고 신부를 버리는 몰상식한 남자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다.

세종 때인 1442년에 있었던 일이다. 현감을 지낸 정우가 사헌부에 고했다.

“박자형이라는 인물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사위가 혼수품을 갖추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행실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쫓아냈습니다.”

요컨대 신랑이 내심으로는 신부의 혼수를 문제삼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신부가 작고 뚱뚱하며 행실이 좋지않다고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금부에 고소했는데,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정우의 주장이었다. 박자형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는 진술만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종 임금이 가만히 듣더니 “판결은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선을 긋는다.   

“판결은 본질에서 찾아야 한다. 의금부는 박자형이 술에 취해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미혹돼서는 안된다. 박자형은 신부집에서 하룻밤 잤다. 만약 신부의 행실을 문제 삼았다면 그 때 문제삼아야지.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예물을 다 받았으니 혼인은 성사된 것이다. 그래놓고 혼수품인 이불과 요, 그리고 옷이 화려하지 않자 엉뚱한 핑계를 대서 파혼하려 하는 것이다.”

결국 박자형은 곤장 60대와 징역 1년이라는 중형을 받았다.   

■혼수가 탐나 부잣집과 혼인한 사대부들

호화혼수가 탐이 나 부자집과 혼인을 맺은 일도 화제에 올랐다.

1791년(정조 15년)때 일어난 일이다. 사간 성덕우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이민행이라는 대부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민행의 재물에 끌리고 혼수를 탐내 그와 혼인을 맺은 서울의 사대부들이 많다고 합니다. 황종오라는 인물로 그 중 한 사람입니다. 황종오도 지금 이민행의 집에서 부인을 얻으려 한답니다.”

한마디로 황종오라는 인물이 두둑한 혼수품을 받을 속셈으로 부자집인 이민행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고 비난한 것이다. 하기야 이민행의 집안과 사돈을 맺은 사대부가 13명에 이르렀다니 그런 의심을 받을 만도 했다. 하지만 임금은 황종오를 감쌌다.

“혹여 (황종오와 혼인한) 이민행의 딸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며 자살이라도 하면 어찌하는가? 그리고 이민행과 결혼한 나머지 열두 가문은 (상소를 올린) 너(성덕우)를 어찌 생각하겠는가?”

이렇게 호화혼수를 지적하는 기록이 도처에 있다. 혼수품을 착취하는 정신나간 관리들의 행태가 고발되기도 하고, 혼수품목을 직접 요구하는 정신나간 집안이 있는가 하면, 혼수품 마련에 집안이 거덜나는 경우도 있었다.

중종 때(1518) 조계상이라는 인물은 고을의 수령들에게 편지를 보내 혼수감을 요구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각 고을의 수령들은 이렇게 수근대며 비아냥댔단다.

"조계상은 웬 자녀들이 그리도 많은 것인가?" 

명종 때(1562년) 영의정 상진은 ‘혼수감 좀 보내라’는 윤원로의 요구에 명주 두 바리를 실어 보낸 일로 탄핵 받기도 했다.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모당평생도> 중 혼인식 부분. 신랑이 신부집에 가는 모습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호화혼수 뿌리 뽑아라!’ 사헌부의 명령

1482년 성종 13년의 일이다. 한성부 우윤(지금의 서울시 부시장)이었던 한간이라는 인물의 혼수품이 도마 위에 올랐다.

요컨대 사위를 들일 때 분수에 넘치는 혼수품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간은 심지어 당대에서는 최고급인 중국제 혼수품까지 받아챙겼다는 것이다. 대신들은 한간의 예를 논의하면서 호화혼수품 행태를 비판한다. 

“요즘 혼수품을 10여 가지나 요구하는 집안이 많습니다. 가난해서 혼수품을 마련하지 못하는 이들은 혼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산군 때(1502)는 사헌부가 이같은 행태를 개탄하면서 ‘혼수품 규정’을 만들 것을 주청한다.

“채단(예물)과 침구에 사라능단(紗羅綾緞·견직물), 갓의 장식에 금은주옥, 갓끈에 산호·유리·명박(明珀·호박의 일종)을 사용하는 것을 모두 금지시키소서. 이는 당상관의 자녀들에게도 적용시키소서.”

사헌부는 이외에도 분수에 넘친안장을 꾸민 말을 보내는 사람, 신부가 시부모를 뵐 때 금은·주옥·패물을 갖추어 주는 사람들도 엄단하라고 촉구했다. 호화혼수의 뿌리를 뽑으려는 사헌부의 의지는 추상 같았다.

“혼인하는 집은 예물을 주고받는 납채일과 혼례식 날짜를 미리 관부에 알려라. 그날이 되면 관리를 보내 감찰할 것이다. 만약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가 발각되면 해당집안을 물론 관리감독하는 관원(공무원)들까지 중죄로 다스릴 것이다. 또 호화혼수품을 적발하고도 눈감아주는 관리가 있다면 곤장 100대로 다스리고 모두 변방의 군사로 편입시킬 것이다.”

심지어는 혼례식 날 골목까지 가득 메우고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는 행위까지 단속했다. 이를 어기면 신랑·신부집은 물론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까지 처벌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혼수품 내역을 기록한 혼수물목. 세로 31㎝에 가로는 1m가 넘는다. 신부가 준비해야 할 장농, 상의, 바지, 고쟁이 등의 갖가지 혼수용품의 명칭과 수량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혼례비용이 중인(中人) 열 집 재산

그러나 애지중지하는 자식을 혼인시키는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 것일까.

시댁과 처가에서 제발 미움 받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임금도 마찬가지였을까. 왕실의 혼인도 구설이 따랐다. 왕실 스스로 호화혼수의 풍조를 자초했으니 말이다. 

1522년(중종 17년) 대사헌 김극성과 부제학 서후 등이 잇달아 상소문을 올린다.

“지금 전하께서는 왕자녀들의 나이가 겨우 10세만 되면 혼례식을 치릅니다. 왕자와 왕녀의 길례(吉禮)는 예제에 지나치지 못하게 한 것이 국전(國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길례 비용이 3∼4만 필(匹)에 이릅니다. 아! 위에서 폐단되는 일을 행하면서 어떻게 백성들의 폐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이 아니었다. 중종은 왕자와 부마들의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토목공사를 벌였다. 대신들은 그런 임금의 행태를 가감없이 비난한 것이다. 하지만 개전의 정이 없었다. 이듬해인 1523년 홍문관의 상소가 다시 이어진다.

“근래에 왕자녀 혼례의 혼수가 전보다 배나 들었습니다. 거기에 명분 없는 하사(下賜)가 많아서 씀씀이가 커져 창고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18세기 이덕무도 장탄식했다.

“혼수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딸을 낳으면 집을 망칠 징조라 한다. 어린 딸이 죽으면 사람들이 얼마의 돈을 벌었다는 말로 위로한다. 인륜과 도덕이 여지없이 타락한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혼사는 인륜의 대사임이 분명하다. 지금 이 순간도 자식 결혼을 앞두고 골머리를 썩는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180년 전 이병영이 올린 상소문으로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사치라는 것은 재물을 소모하는 구멍이요,(夫奢侈者 消財之眉閭也) 탐욕은 백성을 해치는 독벌레입니다.(貪도者 장民之훼석)"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