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선왕릉과 관련해서 반가운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40기의 왕릉 중에서 유일한 비공개릉이던 서삼릉의 효릉을 9월8일부터 일반에 개방한다는 겁니다.
효릉은 조선의 12대 왕인 인종(1515~1545, 재위 1544~1545)과 부인(인성왕후 박씨·1514~1578)의 무덤인데요.
비공개의 이유가 있습니다. 서삼릉의 다른 왕릉과 달리 효릉에 들어가려면 국내 농가에 젖소 종자를 공급하는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쳐야 했거든요. 그래서 방역 문제가 걸려있어서 일반인의 출입이 곤란했답니다.
이번에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치지 않는 관람로를 따로 마련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거고요.
■정치적으로 조성된 서삼릉
서삼릉은 인종 부부의 ‘효릉’ 외에도 인종 친어머니 장경왕후(1491~1515)의 ‘희릉’, 철종(1831~1849, 재위 1849~1863)과 부인 철인왕후(1837~1878)의 ‘예릉’ 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서삼릉’이라 했죠.
서삼릉은 탄생부터가 지극히 정치적입니다.
1506년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조강지처(단경왕후 신씨·1487~1558)를 즉위 일주일만에 폐출시키죠.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한 단경왕후의 아버지(신수근·1450~1506)가 반정 가담을 거절한 죄로 죽임을 당했거든요.
조강지처를 내친 중종이 두번째 부인을 맞이하는데요. 그 분이 바로 장경왕후 윤씨입니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1515년 2월 25살의 춘추에 아들(인종)을 낳고 일주일만에 산후증으로 승하하는데요.
장경왕후의 능(희릉)은 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인 헌릉(서울 서초구) 서쪽 언덕에 조성되는데요. 그런데 당대의 권신 김안로(1481~1537)가 장경왕후의 능을 정치적으로 이용합니다.
당시 김안로는 정적인 정광필(1462~1538)의 허물을 잡으려고 갖은 모략을 꾸미는데요.
그러다 정광필이 희릉(장경왕후릉) 조성의 총책임자였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습니다. 김안로는 “정광필 때문에 희릉이 잘못 조성됐다”면서 “반드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당대 세도가의 서슬에 아무도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고요. 결국 정광필은 이 일로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장경왕후의 희릉은 이렇게 고양 원당(현 서삼릉)으로 옮겨왔습니다.(<중종실록 1537년 4월25일)
■남편과 전부인의 무덤을 떼어놓아라
이후 7년 만인 1544년(중종 29) 중종이 승하하고요.
이때 중종의 무덤을 희릉(장경왕후릉)의 서쪽 언덕에 조성하죠. 그것이 ‘정릉(靖陵)’입니다.
또 불과 9개월도 지나지 않은 1545년(인종1), 인종이 위독해지자 효성이 가득 묻어나는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장사 지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종의 유언으로 효릉이 들어선 겁니다.
그러나 시퍼렇게 살아있던 중종의 세번째 부인(문정왕후 윤씨·1501~1565)은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10여년이 지난 1581년(선조 14) 2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그 내막이 자세히 소개되는데요.
문정왕후와, 그 동생인 윤원형(?~1565), 그리고 봉은사 주지 보우(1509~1565) 등이 원흉으로 등장합니다.
즉 윤원형과 보우가 “‘선릉(성종과 부인 정현왕후 무덤·서울 강남구)’ 근처에 명당이 있다”는 말을 퍼뜨리면서 “정릉(중종릉)을 이장해야 한다”고 대신들을 압박했다는 겁니다. ‘중종-장경왕후’가 아니라 ‘중종-문정왕후’가 함께 묻혀야 한다는 계략이었던 겁니다. 그러기 위해 사전에 중종의 무덤을 옮겨야 했던 겁니다.
결국 정릉(중종릉)은 18년만인 1562년(명종 17) 1월8일 지금의 서삼릉에서 선릉(성종 및 정현왕후릉)으로 옮깁니다.
지금 선정릉으로 일컬어지는 곳으로요.
■길지가 최악의 흉지로
하지만 “내가 남편과 같이 묻히겠다”면서 억지로 ‘중종-장경왕후’를 떼어놓은 문정왕후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야심만만하게 남편의 무덤을 옮긴 바로 그곳이 ‘길지’가 아니라 최악의 ‘흉지’였던 겁니다.
이장지로 결정된 곳은 지세가 낮은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흙을 쌓아 높이는 데 드는 비용만도 거만금이었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중종의 정릉을 이장했지만 흉사가 이어졌습니다.
해마다 강물이 불어 넘치면 정릉의 재실(무덤 제사를 위해 지은 집)까지 차올랐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백성들이 비분강개했다”고 고발합니다.
이 때문에 1565년 승하한 문정왕후는 그토록 염원했던 남편과의 ‘죽어서 만남’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문정왕후는 멀리 태릉(서울 노원구)에 묻혔습니다. ‘7일의 왕비’였던 중종의 첫부인(단경왕후)는 온릉(경기 양주)에 자리를 잡았는데요.
결국 남편과 세 부인은 서울 강남 정릉(남편 중종)과 양주 온릉(단경왕후)·고양 희릉(장경왕후)·노원 태릉(문정왕후)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네요.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왜군이 파헤친 중종과 성종의 무덤
이건 약과입니다. 심각한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중종의 무덤을 옮긴 결과는 끔찍한 재앙을 낳았습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 4월13일 왜적이 선릉(성종릉)과 정릉(중종릉)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선조실록>) 조정에서 난리가 났죠. 즉각 현장 발굴에 나섰는데요. 그 결과가 끔찍합니다.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서 소장품을 가져가고 관을 구덩이 밖에서 불태워버렸다”(<선조수정실록> 1593년 5월1일)겁니다. <선조수정실록>은 “특히 (중종이 묻힌) 정릉에서는 형체가 완전한 시신 하나가 수도(隧道·묘의 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옥체(중종의 몸)가 아닌가 하여 양주 송산에 이안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답니다. 이 시신이 정말로 중종의 유해라면 어쩝니까. 젊어서 중종을 모신 이들이 총출동했는데요.
유해를 본 이들은 각자 자신이 본 바를 기록한 ‘의견서’를 제출했는데요. 그러나 그 상황에서 이 유골이 정말로 중종의 옥체인지, 아닌지 단정해서 말하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정릉 뿐 아니라 선릉, 즉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과 정현왕후 윤씨(1462~1530)의 무덤에서 불탄 재가 보였는데요. 그런데 그 잿속에서 뼛가루가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릉의 치욕’
역시 이 뼛가루가 중종이나 성종 부부의 것인지 단정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이릉(二陵)의 치욕’이라 하는데요.
왜란 이후 윤안성(1542~1615)이 포로귀환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단에게 지은 시가 있습니다.
‘이릉의 송백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시인데요. 즉 ‘왜적이 훼손한 이릉(선릉과 정릉)에서는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二陵松柏不生枝)’는 회한에 가득찬 내용입니다.
어쨌거나 이후 서삼릉에는 인종 부부(효릉)와 친어머니(희릉)가 묻힌 셈이 되었고요.
강화도령으로 살았다가 왕위에 오른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과 철인왕후 김씨(1837~1878)도 예릉에 묻혔죠. 비로소 서삼릉이 된 겁니다. 철종의 경우 그냥 강화도령으로 한평생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팔자에 없는 임금이 되어 불과 33살에 승하했으니까요. 철인왕후는 당대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온화한 분이었다네요.
■인종의 아명이 ‘억명’이었던 이유
이 세 왕릉 중 이번에 공개되는 인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인종은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최단 기간 재위’ 한 분입니다. 9개월(1544년 11월20~1545년 7월1일)도 채우지 못하고 승하했습니다. 기막힌 일화가 있습니다.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 10) 2월 아들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하기 직전에 홀연히 앉아 손수 유언장을 써내려갔습니다.
“지난해 여름 꿈에 어떤 이가 나타나 ‘아이(인종)을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벽에 붙여놓았으니….(<중종실록> 1515년 3월7일)
필시 인종의 짧은 수명을 걱정하면서 ‘억만년을 살라’는 꿈의 계시였던 게 아닐까요.
장경왕후의 친필유언에 따라 인종의 아명은 ‘억명’이 됐습니다. 그러나 인종이 6살 때인 1520년(중종 15) 3월5일 당시 6살이 된 원자의 이름은 ‘억명’에서 ‘호’로 개명했어요. 만약 어머니의 꿈에 나타난 이름을 바꾸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런 객쩍은 생각도 듭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곡기 끊은 아들
인종은 세자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6살 때인 1520년 세자로 책봉된 이후 25년 만인 1544년이 되어서야 왕위에 오릅니다. 인종에게는 어려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었습니다. 새어머니(문정왕후)입니다.
문정왕후는 친아들(명종·재위 1545~1567)을 옥좌에 올려놓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요순이 될 소년 임금’이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백왕보다 더 높다는 인종의 성덕’은 채 피지도 못한채 9개월 단명으로 끝납니다. 인종의 공식적인 사인은 ‘지나친 효도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병에 걸리자 세자(인종)는 곡기를 끊었고요.
그럼에도 중종이 승하하자(1544년 11월 15일) 인종은 뜰 아래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다섯달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요. 인종의 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인종은 승하하기 전날(1545년 6월 29일) 마지막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1482~1520)의 관작을 복구하라”는 특명과 함께 “현량과(과거없이 천거하는 제도)를 회복시키라”고 지시한 겁니다. 인종은 이튿날(1545년 7월1일) 승하했습니다.
■“난 그냥 타죽을란다”
그런데 인종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여론이 퍼졌습니다.
문정왕후와 왕후의 오라비인 윤원로(?~1547)·윤원형(?~1565) 형제가 인종을 해코지 하려고 갖은 술수를 썼기 때문이죠.
1543년(중종 38) 1월7일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세자의 침소가 밖에서 잠겨 있었으며 누군가 불지른 혐의가 역력했다”고 고발했습니다. 이때 세자가 누구(문정왕후 측)의 짓인 줄 알고 부인(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한 뒤 “조용히 타 죽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다 급히 세자 처소를 찾은 귀인 정씨(송강 정철의 누이)의 손에 이끌려 현장을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인종의 스승이자 절친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일화가 주목되는데요.
1545년(인종 1) 4월 인종의 건강이 나날이 나빠지자 김인후가 스승의 자격을 내세워 “약제의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했답니다.(<공사견문>)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김인후가 어의의 처방을 살펴보겠다고 자청한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정황의 묘갈’)이라고 의심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인종이 죽은 이유가 있어’
문정왕후의 악행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루는 인종에게 뜬금없이 “이제 홀로 된 첩(문정왕후 본인)과 약한 아들(훗날 명종)이 어떻게 몸을 보전할 수 있겠느냐”고 괴롭혔답니다. 인종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아 ‘햇빛이 쨍쨍 쬐는’ 무더운 날, 맨 땅에 오랫동안 엎드려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풀어주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느라 만신창이가 된 인종을 사지로 내몬 겁니다.(<유분록>)
문정왕후가 이질에 시달린 인종에게 상극인 닭죽을 바쳤고, 독이 든 떡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습니다. 인종이 난생 처음 살갑게 대하는 계모(문정왕후)가 먹어보라고 준 떡을 덥석 받아먹었고요. 가짜뉴스였을까요. 아닙니다. 1548년(명종 3) 8월30일자 <명종실록>은 의미심장한 기사를 전합니다.
내관들이 한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관 김준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는 겁니다.
“인종께서 돌아가신 것은 김충후와 석씨 등의 소행이야.”
<명종실록>은 해괴한 말을 내뱉은 내관 김준을 추국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맙니다. 인종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의문사였음을 시사해줍니다. 인종의 승하를 전한 <인종실록> 1545년 7월1일자가 심금을 울립니다.
“인종이 위독하던 밤 도성민들이 밤새도록 자지 않고 궐밖을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전하의 증세가 어떠한가 물었다. 승하한 날에는 제 부모를 잃은 듯 통곡했다. ‘이제야 태평시대가 열리겠다’고 기대했던 백성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삼릉에 묻힌 저마다의 사연들
서삼릉에는 인종·인성왕후, 장경왕후, 철종·철인왕후 등 ‘삼릉’만 모신 것은 아닙니다.
3기의 원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 54기가 자리 잡고 있는데요.
이 중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1612~1645)의 ‘소경원’이 눈에 띄죠.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1645)한지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단 4일만에 급서했는데요. <인조실록> 1645년 6월27일자는 “세자의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고 전했습니다.
또 서삼릉에는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1482)의 ‘회묘(懷墓)’도 조성되어 있어요.
1482년(성종13) 사사된 윤씨의 회묘는 경기 장단군에 있었는데요. 연산군 즉위 후(1497) 묘소를 서울 동대문 회기동으로 이장했고요.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직후 제헌왕후로 복위되면서 무덤 이름도 회릉(懷陵)으로 승격됐죠.(3월24일)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로 격하됐고요. 다시 463년만인 1969년 10월25일 서삼릉으로 이장됐습니다. 서삼릉에 묻힌 분들의 삶이 한결같이 파란만장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조선왕가의 탯줄을 날일(日)자로 묻어둔 일제
어디 그뿐인가요. 서삼릉 한편에 조성된 태실 54기 역시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한 뒤 전국의 길지를 선정해 그 태(태반과 탯줄)를 봉안하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제가 1929년 전국 곳곳의 길지(명당)에 봉안되어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 54위를 경기 고양 서삼릉에 집단 이주시킨 겁니다. 일제는 특히 새롭게 조성한 왕과 왕자(공·옹주 포함)의 공간을 한 일(一)자 형태로 구분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자 형태가 됩니다. 지상 뿐이 아닙니다. 땅 밑에는 원형 모양의 시멘트 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날 일(日)자 형태의 시멘트 덮개를 씌웠습니다. 태실 연구자는 이를 두고 “조선 왕조의 만세안녕을 기원하며 봉안한 조선왕가의 태를 죽음의 공간인 무덤(서삼릉)에 묻어버린 셈”이라고 말하더라구요.
이번에 인종 부부의 효릉이 일반에 공개된다고 해서 살펴본 서삼릉과 조선왕릉의 역사인데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사연을 품고 있지않습니까.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이 기사를 위해 이윤정 문화재청 궁눙유적본부 주무관과 이상헌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서삼릉) 소장이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원, <조선왕실 원묘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Ⅱ>, 2018
국립문화재연구원, <조선왕릉 종합학술보고서Ⅰ~Ⅸ>, 2009, 2020, 2011, 2012, 2013, 2014
심현용, ‘조선시대 태실 연구의 현황과 과제 발표’(경기도 태봉·태실의 가치 재발견 학술세미나), 경기문화재연구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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