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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충무공이 찬 '큰 칼'은 '국보 장검'인가, '사라진 쌍룡검'인가, 아니면…

얼마전 ‘이순신 장검’(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 뉴스를 접하는 여러분들은 학창시절 배웠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를 떠올렸을 겁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閑山島月明夜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何處一聲羌笛更添愁)’
삼척동자도 다 알 법한 ‘한산도가’ 입니다. 심화학습에 들어간다면 ‘한산도 야음(夜吟·밤에 읊다)’이란 시도 있죠.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水國秋光暮)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구나.(驚寒안陣高)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은 활과 칼을 비추도다.(殘月照弓刀)’ 
두 시에는 국운을 건 결전을 앞두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 충무공의 노심초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를 보면 장군에게 ‘칼’이 있죠. 장군의 상징인 큰 칼(大刀)을 차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기죠.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이순신 장검이 ‘한산도가’와 ‘한산도 야음’에 등장하는 그 칼일까요. 오늘은 이순신 장군의 칼이 얽힌 진실과 오해를 총정리해보겠습니다. 전통 도검 연구자인 이석재 경인미술관장과 조혁상 홍익대 초빙교수의 도움으로 풀어봅니다..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이순신 장검’ 두자루 모두 길이가 2m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칼입니다. ‘장검1’은 196.8㎝(칼날 137.3㎝ 칼자루 59.5㎝)에 무게만 4.32kg에 이르고요. ‘장검2’는 197.2㎝(칼날 137.8㎝, 칼자루 59.4㎝)에 4.20kg에 달합니다. 칼집(장검 1·2 모두 144.5㎝)과 가죽끈(장검1=87㎝, 장검2=92㎝)까지 합치면 그 무게는 5.72㎏(장검1)~5.44㎏(장검2)에 이르죠.
이 두 장검의 칼날에는 이순신 장군이 손수 지은 싯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三尺誓天山河動色)’(장검1),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一揮掃蕩血染山河)’(장검2)는 글귀인데요. 

이 구절은 1795년(정조 19) 왕명에 따라 발간된 <이충무공 전서>에 실려있는 싯구 그대로입니다.
<이충무공 전서>는 “장검 한 쌍이 공(이순신)의 후손 집에 전해오는데 공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고 전했거든요.
또 칼자루 속 슴베(칼자루와 칼날의 결합부) 표면에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요.

마침 장군의 <난중일기> 1595년 7월14일자에는 ‘태구련(太九連·태귀련과 동일인물 추정) 등이 들어왔다’고 했고요. 21일자는 “태구련과 언복이 만든 칼을 충청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1자루씩 보냈다”고 했습니다. 

태귀련·이무생이 왜 장검 두자루를 이순신장군에게 바쳤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어요.
다만 1955년 채록된 태씨 문중 후손들의 증언이 귀담아들을만 합니다.
즉 태귀련·이무생은 왜구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10년간 도검 제작술을 배웠고요. 임진왜란이 터지자 왜군의 길잡이가 되어 귀국했답니다. 그러나 이순신 군대에게 포로로 잡혀 ‘반역자’라는 죄목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요. 
이때 두사람이 장군 앞에서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자 장군은 “그럼 대신 칼을 만들어 보라”고 명했답니다. 
두 사람은 10년간 배운 모든 기량을 다해 장검 두 자루를 만들어 바친거고요. 이번에 국보가 된 ‘이순신 장검’입니다.

■이순신 장검은 왜색?
그럼 이순신 장군의 손때와 정신이 담겨있는 ‘장검’ 두자루는 왜 지금까지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을까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이순신 장검’이 일본도의 양식을 따랐다는 구설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지적이 타당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도검 연구자들의 견해입니다.
물론 이순신 장검이 일본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우선 슴베와 칼자루를 결합하여 못을 끼워 고정하기 위해 뚫은 구멍(목정혈·目釘穴), 칼자루를 단단하게 쥘 수 있도록 가죽끈을 엑스(X)자로 교차해 감은 끈매기 방식이 그렇고요. 

또 코등이(슴베 박은 칼자루의 목 쪽에 감은 쇠테)가 국화문양인 점도 일본풍입니다. 칼날의 형태나, 피를 흘려보내고 칼의 무게를 줄이려고 판 일본식 ‘피홈(혈조·血漕)’ 등도 그렇습니다.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은 “칼날에서 칼끝과 칼몸이 만나는 부위에 각도의 차이로 생기는 요코테(橫-よこて)의 흔적이 확인된다”면서 “이것도 일본풍”이라고 전했습니다. 물론 이순신 장검 두자루에 일본풍의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죠. 
나무 틀 위에 ‘물고기 가죽(어피)’을 감고 ‘붉은 칠(주칠)’을 한 칼자루가 그렇고요. 끈이 밀리지 않도록 칼자루 표면에 붙인 금속판, 그리고 표면에 은실을 붙여 장식한 철제 부속의 전통 무늬 등이 조선풍입니다. 
칼날에 새긴 황동입사글씨와 물결무늬, 칼집의 패용장식과 어깨걸이용 가죽끈목, 칼집의 끝마개 및 윗마개 장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리한다면 이순신 장검은 조선칼의 주된 요소에, 일본풍의 일부 요소를 결합한 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칼이 허접했던 이유 
그래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네요. 다른 분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칼에 왜색이 가미되어 있다니…. 
그러나 그 이유가 있답니다. 1592년 4월13일 200년 평화를 구가하던 조선에 갑자기 전쟁이 발발하죠. 
조선은 속수무책,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무기도 형편없었습니다. 칼은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온 스페인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1551~1611)의 평가가 실감납니다.
“조선인이 사용하는 무기는 매우 빈약했으며 특히 칼은 길이도 매우 짧고 가늘었다.”(<예수회 연례보고서>·1592)
세스페데스는 필시 일본도와 조선칼을 비교했을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 할 것도 없습니다.

류성룡(1542~1607)의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 조선을 방문한 일본 사신(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의 코멘트를 전합니다. 즉 당시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지방 고을을 지날 때 백성들이 창을 들고 길 양옆에서 이른바 무력시위를 벌이는 것이 관례였다는데요. 이때 다치바나가 코웃음 쳤답니다. “당신들의 창은 자루가 참으로 짧구려.” 
당시 조선의 무기가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만 했습니다. 왜구와의 접전을 벌였던 여말선초의 무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200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무기 분야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주력병기는 궁시(활과 화살)와 화포였습니다. 칼은 보조병기였답니다. 반면 일본은 15세기 중반~16세기 말까지 150여년의 전국시대를 거쳤습니다. 특히 근접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칼과 창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마당에 왜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와 길고 날카로운 칼을 마구 휘둘러 대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선택은 세가지였겠죠. 일본군에게 노획한 일본도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일본도의 칼날만 빼내서 익숙한 조선검의 외장과 결합해서 쓰거나, 아니면 일본도의 칼날 등을 차용해서 새로운 칼(일본+조선식 칼)을 제작하거나 하는 방법을 썼겠죠.

■일본칼을 개조한 의병장들
실제로 의병장과 의병들은 포획한 왜군의 무기를 그대로, 혹은 개조해서 실전 사용했습니다. 
곽재우 장군(1552~1617)의 ‘장검’(보물)을 볼까요. 일본도 중에서도 와키자시(脇差し·50~80㎝)의 칼날과 외장을 그대로 사용했고요. 일본 칼집 특유의 고즈카(小柄·칼집 바깥 쪽에 끼는 작은 칼)와 고가이(계·머리카락 정돈 및 귀이개 도구) 꽂이가 있는 부분만 나무로 덧대어 막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조선제 장식으로 바꿔 달았습니다. 

권응수(1546~1608)·정기룡(1562~1622)·최진립(1568~1636)·이광악(1557~1608) 장군의 칼도 비슷합니다. 왜군과의 대등한 싸움을 위해, 급한대로 노획한 일본도의 형식과 규격을 빌려 칼날을 만들고, 조선식의 칼집과 칼자루 등의 부속품을 단 새로운 칼을 만든 겁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풍 칼의 장점을 조선칼의 제작방식에 일부 적용했습니다. 
단적으로 전형적인 일본풍인 칼자루의 ‘X자 줄매기’는 1813년 발간된 군사교범(<융원필비>)에 수록된 환도(조선칼)의 도해에 등장합니다. 그 정도로 보편화했습니다.

■이순신 장검은 실전용인가
이 대목에서 또 한가지 궁금증을 해소해봅시다. 이순신 장군은 과연 이 장검을 직접 차고 전투에 임했을까요.
이순신 장검은 두 자루 모두 길이가 2m에 가깝고 무게만 해도 5㎏에 가까운 칼입니다. 그렇지만 ‘한산도가’에도 ‘큰 칼(大刀) 옆에 차고…’라는 구절이 있죠. <삼국지>의 인물인 관우도 82근(8㎏ 추정)에 달하는 청룡언월도도 휘둘렀다는데, 아무렴 천하의 이순신 장군이 고작 5㎏도 안되는 칼을 다루지 못한단 말이냐, 뭐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삼국시대에는 청룡언월도 자체가 없었고요. 무엇보다 2m에 근접하고 무게가 5㎏에 육박하는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답니다. 에계! 겨우 아령 무게 정도인데 그것도 휘두르지 못한단 말입니까.

겨우 5㎏이라고요? 2m 앞에 있는 5㎏ 가까운 무게의 한쪽 끝부분을 잡는다고 생각해보십시요.
잡는 지점에 따라 실제로 느끼는 체감 무게가 2~3배 증가합니다. 더구나 힘을 실어 휘두를 때는 순간적으로 칼 끝에 실리는 무게가 수십㎏ 이상이 될 겁니다. 만약 실전에서 이순신 장검을 휘두르게 되면 어찌될까요.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게 아니라 칼이 사람을 휘두르는 격이 된답니다. 어찌어찌 해서 칼을 어설프게나마 휘둘렀다고 칩시다. 그 휘두름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의 재빠른 칼날에 반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육지전투도 아닌 해전에서 그와 같은 칼을 휘둘렀다고요? 그랬을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이석재 관장은 “무엇보다 이순신 장검 두 자루에는 실전에 사용한 격검흔(칼날 끼리 부딪쳐 이가 어긋난 흔적)과 칼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생기는 균열, 휨, 우그러짐, 뒤틀림 같은 칼날의 변형 현상도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2m에 근접하고 무게가 5㎏에 육박하는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순신 쌍룡검의 출현 
그렇다면 대체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가’ 등에서 찼다는 ‘큰 칼’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 단서가 있었습니다. 
일제가 설립한 조선고서간행회가 발간한 <조선미술대관>(1910년)에 이순신 장군이 차고 다녔다는 칼 사진이 나옵니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장검은 아니고, ‘쌍룡검’의 사진과 함께 설명이 붙어있었습니다.(수원광교박물관 소장)
소장처는 궁내부박물관(1908년 설립·이왕가 박물관)이라고 했고요. 설명문은 “이 도검은 임진왜란의 수군을 통솔하여 우리(일본) 군대와 힘껏 싸웠던 명나라 이순신이 늘 패용했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칼등에 새겨진 시를 소개했습니다.

‘쌍룡검을 만들어 얻으니(鑄得雙龍劒)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千秋氣尙雄)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盟山誓海意) 충성스런 의분은 고금에 같다.(忠憤古今同)’
이 싯구가 주목을 끌었습니다. 순조 연간(1800~1834)에 훈련도감을 역임한 박종경(1785~1817)의 문집(<돈암집> ‘원융검기’)에도 바로 이 시와 함께 이순신 쌍룡검이 등장하거든요. 조혁상 홍익대 초빙교수가 이 ‘원융검기’를 전문번역했는데요.
“어느 날 병조판서 심상규(1766~1838)가 찾아와 ‘이 검은 이충무공이 차고 다니던 것인데…난 서생이라 쓸 데가 없으니 상장군이 된 자네에게나 어울리겠다’면서 나에게 주었다…”(<돈암집>)

그러면서 박종경은 “칼등에 ‘쌍룡검을 만들어 얻으니(鑄得雙龍劒)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千秋氣尙雄)…’는 싯구가 있다”고 소개합니다. 1910년 발간된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바로 그 시입니다. 박종경은 그렇게 얻은 쌍룡검 한자루를 걸어놓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어느날 지인이 박종경을 찾아와 ‘똑같은 검을 찾았다’고 전하더랍니다. 
“장군 제가 충남 아산에서 온 사람한테서 이것을 샀는데요. 장군이 아끼는 검과 어찌 그리 꼭 같단 말입니까.”   
박종경도 “그 사람이 가져온 검과 벽에 걸어놓은 검을 비교해보니 쌍둥이처럼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2일자에 ‘창경궁에 충무공이 쓰던 칼이 있는데, 이 비상한 시국에 쓸 자가 누구냐’고 한탄하는 시조가 실린다. <권업신문> 1912년 5월26일자는 “일제가 창경궁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던 이충무공의 원융검(쌍룡검)을 치워버렸다”고 개탄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후 쌍룡검은 종적을 감췄다.

■감쪽같이 사라진 쌍룡검은 어디?
무슨 뜻일까요. 박종경의 <돈암집> ‘원융검기’와 <조선미술대관>이 소개한 쌍룡검이 같은 유물이라는 뜻일까요.
무엇보다 이순신 장군이 차고 있던 쌍룡검이 정말로 존재했다는 얘기네요.
아마 이 쌍룡검은 박종경이 근무했던 훈련도감을 거쳐 궁내부박물관(훗날 이왕가박물관)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럼 그 쌍룡검도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어디엔가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그게 안타깝습니다. 그 쌍룡검은 지금 행방이 묘연합니다.

1910년 <조선미술대관>이라는 책에 등장하고, 궁내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국권침탈 직전인 1910년 4월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창경궁에 충무공이 쓰던 칼이 있는데 이 비상시국에 그 칼을 쓸 자가 누구냐”고 꼬집는 시조가 실립니다. 창경궁 궁내부 박물관에 존재했다는 얘기죠. 
그런데 2년여 뒤인 1912년 5월26일자 <권업신문>은 “일제가 창경궁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던 이충무공의 원융검(쌍룡검)을 치워버렸다”고 개탄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후 ‘쌍룡검’은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그 사이 ‘이순신 쌍룡검은 원래 없었다’ ‘쌍룡검은 이충무공의 충혼을 기려 후세의 인물이 만든 칼’이라는 등의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최근에는 <조선미술대관>의 사진에 등장하는 두 칼이 박종경의 ‘원융검기’에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냐”고 감탄했던 쌍둥이칼과 다르다는 견해가 등장했습니다.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두 자루의 칼을 한번 자세히 보라는 겁니다. 

과연 칼등 명문 20자만 같을 뿐 하나하나 뜯어놓고 보면 모든 부위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칼날의 ‘휨 정도’(곡률)를 보십시요. 하단 칼을 기준으로 상단 칼이 43도 정도 뒤로 누워(기울어져) 있는데요. 그렇게 누운 상단 칼을 바로 올렸다고 치고 계산하면 상단 칼은 하단 칼보다 70%(1대 1.71)이상 더 ‘휨의 정도(곡률)’가 큽니다. 이 정도의 휨 차이가 있다면 두 칼은 전혀 다른 형식의 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미술대관>은 쌍룡검의 사진설명을 쓰면서 ‘이순신의 국적=명나라’로 표기하는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신뢰감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겁니다. 

정리하자면 박종경의 ‘원융검기’와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쌍룡검은 서로 같은 칼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각각 두자루의 칼이 이순신 장군의 것이 맞니, 아니니 하고 쾌도난마할 수도 없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진 쌍룡검을 찾아 진위를 가려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순신 장검’의 국보 승격을 계기로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장군의 칼을 한번 뒤져봄이 어떨까요.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겨레를 살린 두 자루 칼-충무공 장검>(충무공 장검 제작 7주갑 기념 특별전 도록), 2014
육군박물관, <조선의 도검-충을 벼루다>(특별전 도록), 2013
이석재, ‘형태와 용도로 본 이충무공 장검의 정체성 고찰’, 고려대 석사논문, 2015
이석재. ‘원융검기’와 ‘조선미술대관’의 쌍용검 형태 분석‘, <동양고전연구> 78권78호, 동양고전연구회, 2020
조혁상, ‘충무공 이순신의 검에 대한 소고’, <이순신연구논총> 10권 1호, 순천향대이순신연구소, 2008
조혁상, <조선후기 도검문학 연구>, 학자원, 2021
조혁상, ‘한산도야음 차운시의 도검의상에 관한 소고’, <동방한문학> 55권55호, 동방한문학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