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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우월한 유전자 갖춘 '18남 4녀' 세종의 자식들…한결같이 똘똘했다

흔히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재위 1400~1418)은 왕권을 강화하고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국왕으로 꼽힌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태종에 남긴 ‘불멸의 업적’을 꼽으라면 바로 ‘세종대왕’을 낳고, 세종대왕을 후계자로 바꿔 삼은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재위 1418~1450)은 어떨까.

놀라지마라. 세종은 정부인과 8남 2녀, 후궁까지 합하면 무려 18남 4녀를 두었다. 훈민정음 창제와, 4군6진 개척과 쓰시마(對馬島) 정벌, 측우기·자격루 등 과학기기 발명, 17만명 국민투표에 의한 공법실시, 농사직설 간행 등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임금이 아닌가. 그런 분이 이렇게 자식복까지 많으니….

<지장보살본원경>(보물 제966호).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가 죽은 남편 안맹담(1415~1462)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예종 1년) 간행한 불경이다. 지장보살이 여러 방법으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죄를 짓고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바람을 전한 경전이다. |관문사 소장

■당뇨병에도 18남 4녀를 낳은 세종

왕자 생산이 왕실의 번성을 가져온다는 게 당대의 법도라면 자녀 22명 중 18명의 사내아이를 낳은 세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 “당신의 능력은 과연 어디까지냐”는 감탄사가 나올법 하다.

세종대왕은 가히 ‘앉아있는 종합병원’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극심한 당뇨와 두통, 이질, 다리부종, 수전증, 풍질, 임질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하루에 물을 한동이 이상 들이켰을만큼 극심한 당뇨병(소갈증)을 앓았다. 당뇨 합병증으로 한걸음 앞 사람도 분간할 수 없을만큼 눈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랬는데도 6명의 부인과 22명의 자녀를 낳았으니…. 자녀만 많은 것이 아니다.

정부인인 소헌왕후(1395~1446)와의 사이에 낳은 8남2녀가 부모를 닮아서 그런지 한결같이 똑똑했다. 문종(1414∼1452·재위 1450~1452)과 세조(1417∼1468·재위 1455~1468), 안평대군(1418∼1453), 임영대군(1420~1469), 광평대군(1425~1444), 금성대군(1426~1457), 평원대군(1427~1445), 영응대군(1434~1467) 등 8남과 정소공주(1412~1424), 정의공주(?~1477) 등이 그들이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측우기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1837년제 측우기. 문종이 세자시절 착안했다는 <세종실록> 기록이 남아있다. 

■걸출한 장남(문종) 차남(세조) 삼남(안평대군)

이중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세 사람이 유독 도드라졌다. 조선 5대 임금으로 등극한 문종(재위 1450~1452)은 짧은 치세(2년3개월)에도 과소평가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사실 문종은 세자로 지낸 기간이 너무 길었다. 37살에 왕위 올랐다가 39살에 승하했다. 그렇지만 세종은 신료들의 강력한 반발을 뚫고 문종의 세자 시절 8년 가까이 대리청정을 하도록 배려했다. 1442년(세종 24년)부터 웬만한 정사를 돌보게 했다. 그러니까 문종은 재위기간 2년 3개월을 포함하면 10년 이상 재위한 거나 마찬가지다.

여하간 문종은 재위기간 중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궁중에 참석하여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일)를 허락했다.

“…아직도 언로가 좁다고 여겨, 6품 이상의 조신에게는 모두 윤대를 허용하였다. 지위가 낮은 신하라도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말씨로 응대해서 그들이 할 말을 다하게 하였다.”(<연려실기술>)

이것은 하급관리들 말까지도 경청함으로써 언로를 활짝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이민족과의 전쟁·전란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 뿐이 아니라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했다.

특히 문종의 세자 시절인 1441년(세종 23년) <세종실록>은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긴다.

“세자(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오면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다. 정확한 푼수(얼마에 상당하는 정도)를 알리고,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세종 연간 발명품으로 알려진 측우기가 사실은 문종의 세자 시절 고안됐다는 기사이다.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의 가스텔리가 제작한 것보다 약 200년 앞선 발명품이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과 날씨를 잘 관측해서 우레가 어느 때에 치고 어느 방위에서 일어난다고 예언하면, 반드시 맞았다”고 기록했다.

경북 성주 선석산에 세종의 왕자 18명과 맏손자인 단종(1441∼1457)의 태실(胎室·태를 항아리에 봉안한 뒤 만든 시설)을 조성했다. 사진 왼쪽부터 평원대군 안태용 분청사기, 화의군(영빈 강씨 소생) 안태용 분청사기 및 도기항아리, 영풍군(혜빈 양씨 소생)안태용 분청사기. |경북대박물관·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수양대군(세조) 역시 말할 나위가 없다. 계유정난(1453년)으로 정권을 잡고 어린 조카(단종·1452~1455)를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결정적인 흠이었다. 하지만 토지와 인구 비례에 맞도록 군현제를 정비했고, 직전법 실시 등으로 토지 제도를 개혁했다. 호패법을 강화했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펴냈으며 불경과 역사 편찬에도 힘썼다.

무엇보다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와 보급에 힘을 보탠 것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즉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부왕의 명을 받아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다.

“병인년(1446년)에 소헌왕후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이에게 명복을 빌어주는 것은 전경(독경을 위한 불경)보다 더 큰 공덕은 없을 것이니 네(수양대군)가 석보를 번역하여 만드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시어…. <석보상절>을 만들고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세종에게 올렸더니 읽어보시고 바로 찬송을 지어 이름을 월인천강지곡이라 했다.”

셋째인 안평대군은 또 어떤가. 서예와 시문(詩文),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

“대군은 특히 시와 문에 능했다. 서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탔다. 성품이 호방하고 옛 것을 좋아했다.”(<연려실기술>)

조선전기 문인인 최항(1409∼1474)은 시문집 <태허정집>에서 “동방에 서도를 일으켰고… 중국 조정의 선비들이 또한 글씨 한 장씩만 얻어도 가첩을 만들어 보배로 사랑하고 모방하여 비교하려고 했다”고 소개했다. 조선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면 중국인들은 “당신네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하느냐”고 반문했단다.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 가운데 어찌어찌해 중국의 유명한 글씨를 구입해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대부분이 안평대군의 글씨였다. 안평대군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사온 글씨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고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며 기뻐했다(<연려실기술> ‘전고·필적’). 머나먼 중국까지 가서 애써 사왔다는 서예작품이 다름 아닌 자신의 것이라고 확인한다면 얼마나 흐뭇했겠는가.

하지만 재주가 출중했던 안평대군은 결국 둘째 형인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453년(단종 원년) 안평대군은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결탁해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강화도로 유배되고 8일 만에 사사된다. 안평대군의 나이 36살이었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다.

세조 어진 초본’(복제품)이 선보인다. 조선왕들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대다수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4년 피란지 부산에서 화재로 소실된 상황에서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버금가는 나머지 5형제

걸출한 세 형님에게 가렸지만 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등도 뛰어난 왕자들이었다.

넷째인 임영대군은 문(文)보다는 무(武) 쪽에 조예가 깊었다. 부왕(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銃筒) 제작을 감독했고, 큰형(문종) 즉위 후에는 화차를 제작했다. 왕손이면서도 근검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교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1448년(세종 30년) 창덕궁 옆에 불당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신료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러자 세종은 “그렇게 불당이 궁궐과 가깝다면 내가 임금 자리를 내놓으면 될 게 아니냐”고 선언하면서 임영대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종이 ‘양위’라는 폭탄선언을 한 뒤 거처를 옮긴 곳이 임영대군 집이었다는 것은 세종의 총애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섯째인 광평대군은 사서삼경과 <국어>, <좌전> 등에 능통했고, 이백·두보·구양수·소식(소동파) 등의 문집을 읽었으며 음률과 산수에도 밝았다. 서예와 격구에도 능했지만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여섯째인 금성대군은 강직한 성품과 죽기를 각오한 충성심으로 이름을 남겼다. 위로는 부왕(세종)과 큰형(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조카(단종)를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킨 둘째형(수양대군)에 의해 ‘몇몇 종친과 무사들과 결탁해서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쓰고 유배됐다. 금성대군은 유배지인 경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했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일곱째인 평원대군은 어렸을 때부터 시와 예(禮), <대학연의> 등에 통달했고, 서체(書體)와 사어(射御·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했다. 그러나 1445년 19살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요절했다. 평원대군과 이듬해(1446년) 부인(소헌왕후)의 죽음은 세종으로 하여금 숭불책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막내인 영응대군 역시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음률(音律)에도 해박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영응대군은 세조 때 <명황계감>을 한글로 번역했다. <명황계감>은 당 현종(재위 712~756)의 이야기를 적고, 고금(古今)의 시를 덧붙여 엮은 책이다. 

안평대군의 친필목각본. 안평대군은 서예와 시문(詩文),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 |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수학영재 정의공주?

왕자들 뿐이 아니었다. 맏딸인 정소공주는 13살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둘째딸인 정의공주의 능력은 왕자들 못지 않았다. 정의공주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것은 정의공주의 시댁인 죽산 안씨 가문 족보인 <죽산 안씨 대동보> 내용에 담겨있다.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그러나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여러 대군은 풀지 못했다. 그러나 정의공주는 곧 풀어 임금에게 바쳤다.”

물론 이런 사실은 <세종실록> 등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1477년(성종 8년) 2월11일 정의공주의 졸기(부음기사)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다.

“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曆算·책력과 산술에 관한 학문)을 해득해서 세종이 사랑했다.”

여성이 공부할 기회를 얻기도 힘들었던 시절, 그 어렵다는 역법과 수학 등 이과 학문을 해득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가 전해진다. 세종이 중국에서 사온 안장을 손수 고치려고 칼로 깎다가 칼 끝이 다리에 박힌 일이 벌어졌다. 이때 정의공주는 당황하지 않고 술지게미(醋粕)를 데워 상처에 붙여서 부기가 빠져나가게 한 후 자석으로 부러진 칼 끝을 빼냈다. 정의공주는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서 1469년(예종 1년)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보물 제 966호)을 간행했다.

그러고보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은 수양대군과 영응대군, 그리고 정의공주 등 똘똘한 자식들의 합작품이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이 든다.

금성대군의 공적을 기록한 <금성대군실기>. |소수박물관 소장


■기구했지만 왕비의 롤모델된 소헌왕후

이렇게 10명의 자녀 모두 비범한 자질을 타고났지만 그것이 오직 세종의 유전자 덕분이었을까. 당연히 부인이자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의 DNA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소헌왕후 심씨(1395~1446)는 참 기구한 여인이었다. 원래 임금 자리와는 상관없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과 혼인했지만 졸지에 세자빈이 되었다. 남편의 즉위와 함께 왕후 자리에 올랐지만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었다. 외척의 발호를 지나치게 염려한 태종이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온(1375~1418)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웠다. 친정은 멸문지경에 빠졌다. 가슴이 천갈래만갈래 찢어졌겠지만 소헌왕후는 내색하지 않았다. 소헌왕후는 내명부의 귀감이 되었다. 성격이 워낙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기강이 엄정했다. 후덕한 소헌왕후의 내조 덕분에 세종은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소헌왕후는 남편 세종이 군주의 본보기가 된 것처럼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로서 존경을 받았다.


■‘세종대왕의 왕자들’ 기획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세종대왕유적관리소는 세종의 자녀 22명 중 특히 유명한 문종·세조·안평대군·금성대군 등 4명의 삶을 살펴보는 ‘세종대왕의 왕자들’ 기획전을 온라인으로 개최한다. 기획전은 29일부터 11월29일까지 궁능유적본부 누리집(http://royal.cha.go.kr)과 세종대왕유적관리소 누리집(http://sejong.cha.go.kr)에서 열린다. 기획전에서는 맏아들 문종과 관련된 유물로 측우기(복제품)가 전시된다.

둘째 아들인 세조와 관련된 유물로는 ‘세조 어진 초본’(복제품)이 선보인다. 조선왕들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대다수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4년 피란지 부산에서 화재로 소실된 상황에서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다. 셋째아들인 안평대군 유물로는 병풍인 ‘안평대군 이용 친필목각본’이 나온다.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 관련 유물로는 금성대군의 공적을 기록한 ‘금성대군 실기’가 공개된다.

한편 세종은 경북 성주 선석산에 왕자 18명과 맏손자인 단종(1441∼1457)의 태실(胎室·태를 항아리에 봉안한 뒤 만든 시설)을 조성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선석산에서 출토된 태를 담았던 도자기를 살펴볼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