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만큼이나 곤란한 것이 바로 이성계(혹은 정도전)가 나쁜 사람이야, 정몽주가 나쁜 사람이야 하는 질문입니다. 아들이나 딸이 그렇게 물어온다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네가 보기에 나쁜 사람이면 나쁜 사람이고, 네가 보기에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시답지 않은 이야기기냐고 하겠지만 그 말이 정답입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왜냐면 역사라는 것은 해석하는 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읽고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읽는 자의 몫이니까요. 요즘 텔레비전 사극은 여말선초의 사건과 인물을 집중해서 다루는게 트렌드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처럼 기록도 풍부한데다 워낙 드라마틱한 상황이 많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개국의 주역들이 더 조명을 받습니다.
아무래도 기존의 것을 지키는 세력보다는 뭔가 새롭게 바꾸려는 세력이 더 역동적이니까요. 그래서 다 쓰러져 가는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보다는 정도전이나 이방원 등이 더 각광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리의 사나이’ 정몽주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정몽주가 지키려했던 의리의 실체는 무엇이고, 요즘의 의리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한번 짚어보고자 합니다. 이기환의 팟 캐스트 63회 주제는 ‘의리의 사나이, 정몽주으리’입니다.
“간신 정몽주가…정권을 잡고서 전하(태조 이성계)를 도모하려 하다가 (1392년) 4월 4일 참형을 당했는데….”(<태조실록> 1392년 12월 16일조)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이 올린 상소문이다. 조준은 포은 정몽주를 ‘간신’이라 일컫고 있다. 당연했으리라. 정몽주야말로 역성혁명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정몽주는 조준의 언급대로 태조 이성계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니까….
■이성계에겐 ‘양정(兩鄭)’이 있었다
원래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는 도타웠다. 1364년 2월 정몽주는 이성계를 처음 만났다.
정몽주는 자신을 과거시험에서 선발해준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 정벌에 참전하고 있었다. 그 때 이성계가 원병을 이끌고 한방신을 도우러 왔는데, 거기서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이후 정몽주는 두차례나 조전원수(助戰元帥·장수를 보좌하는 일종의 참모)로 이성계를 보좌했다.
훗날 정몽주 참살의 장본인인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1403년·태종 3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부왕(태조 이성계) 때 양정(兩鄭)이라 했는데, 하나는 정몽주요, 하나는 정도전이다. 정몽주는 왕씨의 말년 시중이 되어 충성을 다했고, 정도전은 부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했으니 두 사람의 도리는 모두 옳은 것이다.”(<태종실록>)
태조 이성계가 그토록 아꼈던 사람이 바로 정몽주와 정도전이었다는 것이다.
정몽주 역시 왜구를 섬멸하는 이성계를 유비의 책사인 제갈량과, 유방의 책사인 장량 등에 빗대 문무를 겸비한 보기 드문 인물(盖如公者幾希)”이라고 극찬하는 시(<포은집> 권3 ‘송헌이시중화상찬·松軒李侍中畵像讚’)를 남긴다.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 등과 함께 쓰러져가는 고려를 일으키고자 했다. 당시 이인임으로 대표되는 권문세족의 횡포로 문란해진 고려의 정치·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정몽주는 1389년 11월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을 주도한 이성계 세력의 이른바 ‘흥국사 모임’에 가담,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성계·정도전·정몽주 등이 흥국사에서 모여 의논했다. 우왕과 창왕은 본디 왕씨가 아니다.(신돈의 후손들이다.) 마땅히 거짓 임금을 폐하고 참 임금을 세워야 한다.”(<태조실록> 총서)
이로써 고려 신종(재위 1197~1204)의 7대손인 정창군 왕요(王瑤)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공양왕이다. 이 사건으로 정몽주는 성균관에서 교류하며 노선을 함께 했던 이색·길재·권근 등과 갈라서는 아픔을 맛본다. 하지만 정몽주와 이성계·정도전의 밀월관계는 ‘거기까지’ 였다. 이성계 세력의 최종 목표는 정몽주가 생각한 고려의 개혁이 아니라 역성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
이성계와 정몽주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윤이·이초 사건’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재촉한 이 사건은 1390년 5월 일어났다. 즉 파평군 윤이(尹이)와 중랑장 이초(李初) 등 두 사람이 명나라 황제(주원장)를 찾아가 “이성계가 자신의 사돈인 요(공양왕)를 새 임금으로 세운 뒤 곧 명나라를 칠 것”이라고 호소했다는 것이다.
윤이와 이초는 더 나아가 “이성계 측이 명나라 정벌에 반대하는 재상 이색과 조민수·우현보·이숭인·권근·변안열 등을 죽이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고려사절요> 등) 이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발칵 뒤집혀졌다. 이성계 세력은 이를 빌미로 이색 등 19명을 축출했다.
이 때부터 역성혁명의 길로 본격 접어든 이성계의 혁명세력과 정몽주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정몽주는 고려 태조의 정통성을 계승한 공양왕을 받들어 쓰러져가는 500년 사직을 부여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이색과 권근 등의 사면을 건의하면서 구 세력과 결합을 모색했다. 이 때부터 고려 사직을 지키려는 정몽주 세력과 신왕조 개창에 박차를 가하는 이성계 세력의 반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몽주의 공격은 만만치 않았다. <태조실록> 등을 통해 정몽주의 반격과 피살 등 숨막히는 순간을 리뷰해보자.
1392년 3월, 이성계가 사냥 도중 말이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낙마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실록>은 이 때 “정몽주가 기쁜 기색을 내비치며 이 기회에 태조(이성계)를 제거하고자 했다”고 기록했다.
“정몽주는 대간들을 사주하면서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먼저 제거한 뒤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라 했다.”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대간이 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남재·조박 등을 탄핵했다. 탄핵을 받은 6인은 결국 외지로 귀양을 가야 했다. 정몽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6인방의 참형을 촉구했다. 혁명세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 등이 아버지를 급히 찾아갔다.
“정몽주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아버님! 정도전을 국문하면서 우리 집안까지 연루시키고 있습니다. 형세가 매우 급합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몽주를 죽일 수는 없다”면서 거절한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1392년 4월 4일, 그 참극의 순간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한 이방원은 결국 측근인 조영규를 불렀다.
“정몽주를 내가 죽여야겠다. 내가 그 허물을 뒤집어 쓰련다. 휘하 사람들 중에 누가 이씨를 위해 힘을 쓸 사람이 있는가.”
조영규가 “제가 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조영규와 함께 조영무·고여·이부 등이 나섰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변중량(1345~1398)이 정몽주에게 “공이 위험하다”고 누설했다. 정몽주는 사태의 추이를 보려고 이성계를 병문안 했다. 이것이 천려일실이었다.
이성계는 본디 정몽주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전과 똑같이 대접했기 때문이다.
의심을 걷어낸 정몽주는 마침 상(喪)을 당한 전 판개성부사 유원을 조문한 뒤 귀가하고 있었다.
<태조실록>은 1392년 4월 4일 벌어진 참극의 순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조영규 등이 달려가 정몽주를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조영규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났다. 조영규가 급히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을 넘어뜨렸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났다. 이 때 고여(高呂) 등이 쫓아가서 죽였다.”(<태조실록> 총서)
비보를 들은 이성계는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 집안은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나라 사람들이 뭐라 하겠는가.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이방원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몽주 등이 우리 집을 모함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정몽주를 살해한 것이) 곧 효도입니다.”
이것이 <태조실록>이 전한 ‘간신’이자 ‘역신’인 정몽주 피살 사건의 전모이다.
■9년 만에 간신에서 충신으로
그런데 불과 9년 만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1401년(태종 1년) 1월14일 참찬문하부사 권근이 태종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 즉 ‘치도(治道) 6조목’을 권고했다. 그 가운데 5번째 조항을 보면….
“임금이 의(義)를 받들어 창업할 때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불복하는 이는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창업을 이루고 수성(守成)할 때는 반드시 전대에 절의를 다한 신하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만세의 강상(綱常)을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다음 권근은 정몽주 등의 이름을 거론했다.
“정몽주는 본래 한미한 선비로 태상왕(태조 이성계)의 천거로 출세했으니 어찌 그 은혜를 갚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어찌 천명과 인심이 태상왕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몰랐겠습니까. 그렇지만 자기 몸이 보전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섬기던 곳’(고려)에 마음을 주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대절(大節·죽음을 각오한 절개)을 빼앗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권근은 정몽주를 남송의 문천상(文天祥·1236~1282)에 비유했다. 문천상은 남송이 원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가 체포됐다. 쿠빌라이(원 세조)는 그런 문천상의 재능을 아껴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나 문천상은 끝내 죽음을 택했다. 원나라는 문천상의 절개를 기려 추증했다. 권근은 “바로 문천상을 추증한 원나라처럼 정몽주를 절개의 상징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권근의 상언 가운데 ‘수성할 때는 절의있는 자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반을 잡은 만큼 이제는 그 조선을 지키는 절의있는 신하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태종은 권근의 상소를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문충(文忠)’의 시호와 ‘영의정 부사’의 직함을 추증했다. 정몽주가 ‘간신’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길재는 모가 났지만 정몽주는 순실하다’
이후 조선의 역대 임금과 신하들은 입을 모아 정몽주 찬양대열에 합류한다.
우선 정몽주 척살의 장본인인 태종 이방원을 다시 보라. 1402년(태종 2년) 4월 3일, 태종이 과거 합격자들을 언급하면서 갑자기 정몽주를 칭찬했다.
“정몽주가 향생(鄕生·시골 출신)으로 장원의 영예를 얻었는데 그 호방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대언(왕명을 출납하는 정3품) 이응은 태종의 평가에 화답했다.
“정몽주 같은 분은 중국에서도 드뭅니다.”
얼마 전까지 대역죄인이었던 정몽주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충신’으로 칭송받고 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또 어떤가. 1431년(세종 13년) 3월 8일, 대신들과 고려 말의 ‘3은(隱)’을 거론하며 일일이 인물평을 하고 있다.
“고려 말에는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매우 적었다. 목은 이색 같은 사람도 절의를 다하지 못했고, 유독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가 능히 옛 임금을 위해 절개를 굳게 지켰기 때문에 뒤에 벼슬을 추증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의 다음 말이 흥미롭다.
“정몽주는 순실(淳實)하지만, 길재는 규각(圭角)이 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길재는 정몽주에 비해서는 약간의 간격이 있을 것이다.”
‘순실’은 ‘순하고 참됨’을, ‘규각’은 ‘사람됨에 모가 났음’을 각각 뜻한다. 세종은 고려를 위해 절개를 지켰다는 ‘3은(隱)’ 가운데 정몽주를 ‘으뜸’으로 꼽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12월 3일에는 정윤정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정몽주의 증손이라는 점이 감안됐다.
그런데 19년 뒤인 1479년(성종 10년) 7월 16일, 정윤정이 성종의 후궁선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성종 임금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저렇게 망발을 내뱉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배후가 있을 것이니 엄벌에 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대목을 기록한 <실록>의 기자는 매우 흥미로운 평을 달아놓았다.
“정윤정은 정몽주의 증손이다. 그의 상소가 비록 황당무계했다지만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의 말에서 증조부(정몽주)의 풍모가 보인다. 그냥 그의 말이 옳다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일인데….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의리, 으리, 기리(ぎり)
정몽주를 살피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요즘 한창 유행 중인 ‘의리’이다.
한마디로 ‘정몽주=의리의 종결자’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정몽주으리’라는 것인가. 먼저 서애 류성룡이 내린 ‘포은 정몽주 평’을 보자.
“포은 선생은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 모든 유생을 위해 제창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종(大宗)으로 삼았다. 국가가 존재하면 함께 존재하고 국가가 망하면 함께 죽었으니…. 고려 500년 강상의 중함을 자임했고 조선 억만년의 절의의 가르침을 열어놓았으니 선생의 공은 위대하다.”(<포은집> ‘포은집발·圃隱集跋’)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포은 정몽주가 의리 하나로 모든 유생들의 ‘형님’이 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여기서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정몽주의 ‘의리’와, 요즘 잘못 생각하기 쉬운 ‘의리’가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일상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끝까지 추종하거나, 친구 간 맹목적인 친분을 과시하거나, 심지어는 불량배나 범죄집단이 자신의 조직을 배반하지 않는 행위를 ‘의리’라 일컫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같은 의리는 유교적 전통의 의리가 아니라 일제(日帝)의 영향 속에서 변질된 ‘의리’일 가능성이 짙다.
즉 일본의 윤리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덕목이 바로 ‘기리(義理·ぎり)’라는 것. 일본에서의 ‘기리’는 전통적으로 가족 간이나 친지 간, 혹은 영주와 농노 간과 같은 구체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요구된 덕목이다. 이런 일본의 ‘기리’가 일제 시대부터 파고 들어와 ‘의리’의 개념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규모 집단 내에서의 맹목직인 의리는 자칫하면 집단이기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
■의리지학과 정몽주
의리(義理)의 의미를 풀자면 ‘의(義)’는 도덕성과 올바름이고, ‘리(理)’는 이치 혹은 도리이다.
그러니까 ‘의리’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올바른 도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것은 서애가 언급했고 <실록>에서도 여러차례 등장하는 ‘의리지학’은 사실 ‘성리학’을 뜻한다. 한마디로 ‘올바름(義)의 이치(理)’를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다.
그러니 작은 이해관계에 빠질 수 없고,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의리지학, 즉 성리학의 정신인 것이다.
이제 ‘으리’가 아닌 ‘정몽주의 의리’를 좀더 살펴보자.
사실 포은 정몽주는 동방이학, 즉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 받았다. 한마디로 ‘의리지학’의 으뜸이었다는 소리다.
<고려사> 권117 ‘열전·정몽주’를 보자.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로는 <주자집주> 뿐이었다. 그런데 포은의 강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빼어났다. 그렇기에 듣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했다. 하지만 후에 호병문의 <사서통(四書通)>을 보게 되니 포은의 강설과 내용이 꼭 맞았다. 여러 선비들이 탄복했다.”
포은이 주자학(성리학)에 얼마나 정통했는 지를 알려주는 기록이다. 포은의 주자학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포은의 실력을 매우 의심했다는 것.
하지만 훗날 호병문의 <사서통>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어서 포은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는 것. 언급된 호병문(1250~1333)은 원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그가 54명 학자들의 주석을 정밀분석해서 펴낸 <사서통>은 주자학 연구자들의 필수 교과서가 됐다.
그런데 1326년 출간된 <사서통>을 뒤늦게 받아본 고려인들이 정몽주의 주자학 강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감탄사를 연발했다는 것이다.
이색은 “포은의 논리는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면서 “동방 이학(성리학·주자학)의 비조로 추대할만 하다.”고 칭찬했다.
삼봉 정도전은 포은이 <대학>과 <중용>, <논어>, <맹자> 뿐 아니라 <주역>과 <시경>, <서경>, <춘추>까지 정통했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우리나라 500년 동안 이런 정도의 이치에 도달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생들이 자기 학식을 고집하고 사람들마다 이설을 제기했지만 포은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분석하고 설명하여 약간의 착오도 없었다,”(<삼봉집> 권 3 ‘포은봉사고서·圃隱奉事槁序’)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내면서 쟁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한치의 흩어짐이 없는 정몽주의 논리에 일패도지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정몽주으리’
중요한 것은 포은의 ‘실천적 의리정신’이다,
“유학자의 도는 모두 일상의 일로 음식과 남녀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니 지극한 이치는 그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포은집> 권 4 ‘본전·本傳’)
그러니까 올바른 행동과 바름을 지키는 ‘일상의 도리’의 ‘일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운행은 하루에 구만리를 달리네. 잠시라도 쉼이 있다면 만물은 곧 자라지 못하리…. 생각에 병통이 생기면 혈맥이 가운데서 막히네. 군자는 이것을 두려워 하여 저녁까지 두려운 듯 힘쓰고 힘쓰리. 극진한 노력을 쌓으면 하늘의 존재와 마주 대하리라.”
포은의 시(‘척약재명·척若齋銘’) 내용이다. 시의 제목에 나오는 ‘척약’은 <주역> ‘건괘·구삼·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가 종일토록 굳세고 굳세어 저녁까지 여전히 두려운 듯 행동하면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을 것이다.(君子終日乾乾 夕척若 려无咎)”
여기서 ‘척(척)’은 ‘두려워 삼가는 것’을 뜻하며, ‘구삼효(九三爻)’는 전체의 괘(卦)에서 상괘와 하괘가 교체하는 중간에 자리잡은 위태로운 자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주역>의 내용은 평소 마음가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리고 시종일관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주자학에서 ‘일상의 도리’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과 통한다.
즉 공자는 제나라 경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했다.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론은 결국 ‘자신의 분수와 명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며, 특히 명분이 바로 서지 못하면 말이 올바르지 못하고, 말이 올바르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리는 일상의 도리
정몽주가 ‘일상의 도리’를 실천한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자.
1384년(우왕 10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명나라는 고려가 임금(공민왕)을 시해했을 뿐 아니라 약속한 공물을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고려가 보낸 사신들에게 곤장형을 내리고 줄줄이 유배시켰다. 때문에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라고 하면 모두들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왕은 명나라로 보낼 성절사(명 황제 생일에 갈 특사)로 밀직 진평중(陳平中)을 임명했다. 그러나 진평중은 당대의 권신인 임견미에게 노비 수십명을 뇌물로 써서 빠져 나갔다. 임견미는 대신 정몽주를 추천하고 말았다. 우왕이 정몽주와 불러 넌지시 의향을 묻자 정몽주는 쾌도난마식으로 대답했다.
“군주의 명령은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는 법입니다. 어찌 피하겠습니까. 다만 남경(명나라 수도)과의 거리가 8000리입니다. 부지런히 간다해도 90일 여정인데, 이제 겨우 60일 남았습니다. 그것이 신의 걱정입니다.”
정몽주는 우왕의 명을 받자마자 일각의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떠났다. 정몽주는 불철주야 재촉한 끝에 천신만고 끝에 황제의 생일날에 맞춰 남경에 도착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그 같은 사정을 알고서 정몽주를 특별히 치하했다.
“고려의 배신들이 서로 오지 않으려 하다가 날짜가 임박하니 너를 보낸 것이로구나.”
명 황제는 억류 중이던 김유와 홍상재 등을 풀어주었고. 고려와 외교관계 회복을 허락해주었다.(<고려사절요>)
■“죽어도 의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명분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정몽주의 삶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국가존망이나 왕위찬탈의 위기에 빠졌을 때, 즉 불의에 닥쳤을 때 타협을 거부하고 목숨을 바쳐 싸우는 것이야 말로 정몽주의 의리정신이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노수신(1515~1590)은 포은의 의리를 소개했다.
“고려 쇠퇴기를 맞아 어쩔 수 없게 되자 포은은 사람들에게 ‘남의 신하가 되어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겠는가. 이미 나의 처할 바가 되었다’고 했다. 큰 절개에 임해 뜻을 빼앗을 수 없는 군자인 것이다. 평소 깊은 수양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확고할 수 있겠는가.”(<포은집> ‘포은선생시집서’)
정몽주의 의리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예컨대 1476년(성종 7년) 8월13일 도승지 현석규는 이렇게 말했다.
“정몽주는 태조(이성계)에게 간택되어 지위가 정승에 올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만약 한번만 마음을 바꾼다면 개국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서겠는가’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몽주는 끝내 고려 신하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존숭의 대상이된 포은의 의리정신
포은의 의리정신은 후대 유학자들의 ‘존숭의 대상’이 됐다.
유학자들은 정몽주의 학문이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정몽주를 한국 도학(道學·주자학)의 시조로 꼽고 있다.
기대승(1527~1572)은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조종이 됐는데 불행히도 고려가 망하는 바람에 살신성인했다”고 평했다.
이황은 “신돈이 조정을 저지르고, 최영이 중국을 더럽힐 때 군자라는 정몽주는 무엇을 했느냐”는 일각의 회의론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허물이 없는 데 허물을 찾아서는 안된다. 정몽주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가히 천지의 경위(經緯·씨줄과 날줄)가 되고 우주의 동량이 될만 하다.”
그러면서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정몽주의 거센 바람 우리나라에 떨치니(圃翁風烈振吾東), 사당과 학궁도 우람하고 그윽하네.(作廟渠渠壯學宮) 공부하는 모든 선비들에게 말하노니(奇語藏修諸士子) 연원과 정의 둘다 으뜸(조종)이라네.(淵源節義兩堪宗)”(<퇴계전서> 권 4 ‘임고서원·臨皐書院’)
송시열의 평가는 어땠을까.
“기자(箕子)가 태어난 것은 은(상)의 행운이 아니라 조선의 행운이며(殷師之生 非殷之幸 而我東之幸也), 포은 선생이 출생하심은 고려조의 행운이 아니라 조선의 행운이다.(先生之生 非麗氏之幸 而我朝之幸也)”(<포은집> ‘중간서·重刊序’)
기자가 누구인가. 이른바 세상을 다스리는 9가지 정치이념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남겼다는 은(상)시대(기원전 1600~1046)의 성인이다. 송시열은 포은 정몽주를 만고의 성인으로 존숭되는 기자의 반열에 놓고 있다. 더할 수 없는 극찬이다.
1478년(성종 9년) 6월 3일, 동부승지 김계창이 소식(소동파)의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에게 올린 상언이 심금을 울린다.
“임금은 평소에 절의있는 선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옛날 송나라 임금이 소동파에게 ‘절의있는 선비는 어찌 알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동파는 ‘평시에 할 말 다하고 극간을 하는 자는 절의있는 선비이고, 아부하며 순종하는 자는 간신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정몽주와 길재 두 사람뿐입니다.”
진정한 의리는 불의를 용납치 않고, 어떤 순간에도 할 말을 다하는 것이요,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아부하는 자는 간신의 오명을 뒤집어 쓴다는 것이다,
새삼, ‘의리의 표상’인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를 읊어본다.
‘이 몸이 죽고 죽어(此身死了死了) 일 백 번 고쳐 죽어(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向主一片丹心) 가실 줄이 있으랴(寧有改理也歟)’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문헌>
정병석, <포은 정몽주의 의리정신과 순절의 의미>, ‘민족문화논총’ 제50집,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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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대 출판부, 1999
김영진, <철학적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 철학과 현실사, 2004
이승환,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고려대 출판부, 1998
엄연석, <포은 정몽주의 유가적 의리실천과 역사철학적 인식>,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강문식, <포은 정몽주의 교유관계>,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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