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일본의 금성 탐사선이 금성 궤도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 보도를 계기로 천의 얼굴을 가진 금성 이야기에 흠뻑 빠져보겠습니다.
금성은 낭만적인 별이 아닙니다. <사기> ‘천관서’를 보면 “금성이 낮에 나타나면 변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유랑한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변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종 금성이 대낮에 나타나거나 금성일식 혹은 금성월식이 일어났습니다. 금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면 조정에 난리가 났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이 부덕한 탓”으로 돌렸습니다. 조선 중후기 문신 조익(1579~1655)은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원망이 금성의 주현 같은 천문의 이변으로 나타나는 것”(<포저집>)이라 했습니다.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면 자연히 하늘의 노여움도 풀릴 것’이니 임금은 몸과 마음을 되돌아 반성하면서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요즘에 금성은 또한번 ‘흉조의 별’로 운위됩니다. 96%가 넘는 이산화가스로 이뤄진 금성의 대기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온실효과 때문에 금성의 표면온도가 450도에 이른답니다. 만약 인류가 온실가스를 지금처럼 뿜어내다면 지구는 언젠가 금성과 같은 ‘지옥별’로 전락할 운명이라는 겁니다. 금성을 재앙을 예고한 불길한 별이라고 여긴 옛 사람들의 혜안이 어쩌면 그렇게 딱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0회 주제에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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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金星)처럼 천의 이름과 천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별은 드물 것 같다. 서양에서는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미의 여신인 비너스로 통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역시 미의 여신인 이슈타르로 일컬어졌고, 기독교에서는 라틴어로 루시퍼라 했다. 동앙에서는 어떤가. 태백성(太白)이라는 별칭도 있는데, 보이는 곳과 때에 따라서도 달리 일컬어진다. 저녁에 보일 때는 장경성(長更星), 새벽에 보일때는 계명성(啓明星)이라 한다. 아마도 태양과 달을 빼고는 우리가 보는 가장 밝은 별이라 이런 이름들이 붙었을 것이다. 너무 밝기 때문에 어떤 경우엔 미확인비행물체(UFO)로 보이기도 한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별
우리 선조들의 작명은 더 운치가 있다. 새벽에 동쪽에서 새롭게 빛나는 금성은 샛별이라 이름붙였고, 저녁에 서쪽에서 보이는 금성에게는 이름도 희한한 ‘개밥바라기별’이라 했다. 왜 하필 다 좋은 이름 두고 ‘개가 밥을 바라는 별’이냐. 아무도 모르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논밭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온 주인보고 집을 지키던 개가 짖어댔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때 서쪽 하늘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별(금성)이 있다. 그러니 주인장은 ‘이 놈은 꼭 저 별이 뜰 때만 되면 밥달라고 난리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별을 ‘개밥바라기별’이라 작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의 일화이다. 어머니가 태백성, 즉 금성을 삼키는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태)백’으로 지었다. <신당서> ‘이백 열전’을 보면 이백의 살아 생전에는 금성이 하늘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왜? 이백의 어머니가 삼켰으니까.
금성은 예로부터 예사로운 별이 아니었다. 그렇게 밝은 별이 보였다 말다 했기 때문이다. 왜냐. 금성은 수성과 함께 지구 안쪽에서 도는 내행성이기 때문이다. 태양과 워낙 가까운 수성은 논외로 치고 금성만 검토해보자. 지구에서 봤을 때 금성은 멀리 날아야 태양 근처의 공전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한낮이나 한밤중에는 보이지 않았다. 태양이 뜨기 전인 새벽이나 태양이 진 직후인 저녁에 잠깐 보일 뿐이다. 그래서 새벽 금성을 ‘샛별’, 저녁 금성을 ‘개밥바라기별’이라 한 것이다.
■계명성과 사탄
이렇게 보였다 말았다 하고, 또 보일 경우 그렇게 밝은 별이 되니 금성의 출몰과 밝기는 예로부터 갖가지 상상과 추측을 자아냈다.
그리고 금성의 변화무쌍한 조화는 곧 하늘의 계시로 여겨져 온갖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금성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탄인 루시퍼(Lucifer)으로 일컬어진다. 원래 계명성은 음악을 주장하는 영(靈)이었다. 그런데 찬양을 좋아하신 하나님이 계명성의 지위를 올려 하늘의 성가대를 이끌게 했는데, 곧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동등해지려 반역하는 사탄이 됐다는 것이다. <구약성서> 이사야서 14장을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랬으니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는 가사가 실린 찬송가 261장이 잘못”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 김재준 목사의 작시인 이 찬송가 중에 사탄의 별을 뜻하는 계명성, 즉 금성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지난 5월 한국새벽기도운동본부(대표회장 나겸일 목사)는 찬송가 261장의 ‘계명성’을 ‘새벽별’로 개사해줄 것을 한국찬송가공회측에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금성은 반란의 조짐
동양에서도 금성을 두고 병란이나 내란, 혹은 여왕의 출현처럼 좋지않은 조짐으로 여겼다.
<사기> ‘천관서’를 보면 금성은 오방으로는 서쪽, 오행으로는 금(金), 오상(五常)으로는 의(義), 오사(五事)로는 말(言)을 상징한다. 또 금성을 ‘살벌(殺伐·사람을 죽이고 정벌)을 주관하는 별’이라 규정했다.
“태백성(금성)이 낮에 하늘을 지나가면 천하에 혁명이 일어나서 백성이 왕을 바꾼다. 이에 기강이 흩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유랑한다.(太白經天 天下革 民更王 是爲亂紀 人民流亡)”(<한서> ‘천문지’)
두 문헌은 더 구체적으로 “금성이 낮에 보이고 태양과 밝기를 다투면 강국은 약해지고 소국은 강해질 것이며, 여주(女主)가 창성할 것(晝見與日爭明 彊國弱 小國彊 女主昌)”이라 했다. 무슨 말인가. 앞서 살폈듯이 내행성인 금성은 태양이 뜨기 직전의 동쪽이나 태양이 진 직후의 서쪽에서 잠깐 보여야 한다. 그런데 금성이 낮에 뜬다는 것은 황제나 왕을 상징하는 태양과 그 밝기를 다투는 것이므로 그것은 곧 반란의 조짐이라는 뜻이다.
금성이 낮에 뜨는 현상을 흔히 주현(晝見)이라 한다. 태양빛이 약해지면 때때로 낮에도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현도 같은 주현이 아니다. 금성, 즉 태백성이 한낮인 오시(五時· 오전 11~오후 1시)에 정남향의 높은 하늘 위에서 밝게 비추는 현상을 경천(經天)이라 한다. 단순한 주현이 아닌 경천 현상이 나타나면 흉조 중의 흉조, 곧 왕위찬탈이나 전쟁, 혁명의 조짐이 틀림없는 것으로 해석됐다.
또 금성이 지나칠 정도로 밝거나 매우 격하게 움직일 경우, 태양이나 달을 범하거나 뚫는 현상(금성일식 혹은 금성월식)이 일어날 때, 그리고 수성의 궤도와 겹칠 때도 역시 변란의 조짐이었다. 단적인 예로 허목의 <기언>은 “금성이 달을 범하거나 달 속으로 들어가면 임금이 죽고 병란이 일어난다”고 기록했다.
■금성이 낮에 나타나면…
실록 등 각종 사서를 들춰보면 변란이 일어나기 전에 금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는 기록이 많다.
예컨대 <신당서>를 보면 “644년(당태종 정관 18년) 태백성(금성)과 진성(수성)이 동정성(28별자리 중 22번째 별)에 합쳐졌다. 그것을 본 점성가가 ‘장차 병란이 있을 것’이라 했다. 과연 1년 뒤인 645년 6월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쳐들어갔다.”
1390년(고려 공양왕 2년) 금성이 달을 꿰뚫는 현상이 나타나자 공양왕은 매우 두려워 하며 정도전에게 “무슨 재앙이 일어날 조짐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것은 중국에서 재앙이 있다는 뜻이니 고려 조정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안심시켰다. 고려는 2년 뒤 망했다.
각종 사화로 피바람이 일어난 연산군 때는 금성이 낮에 나타나는 이변이 계속됐다. 무오사화(1498년)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497년과 갑자사화(1504년) 5년 전인 1499년 금성이 대낮에 나타나는 괴변이 잇달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전인 1572년(선조 5년) “금성이 해를 첨범하고 흰 무지개가 하늘을 범했으며 번개와 우뢰가 번쩍댔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 중후기 문신 김경장(1597~1653)이 스승인 여현 장현광(1554~1637년)을 위해 남긴 추억록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병자년(1636년) 여름과 가을이 교차할 무렵이었다. 태백성(금성)이 몇 달 째 계속하여 하늘에 뻗쳤다. 천상의 변고가 여러 번 나타난 것이었다. 이 때 선생(장현광)이 <주역>을 살펴보시고는 서글퍼 하셨다. 그러면서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 거닐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길게 한숨을 쉬며 장탄식했다. 그런데 거울이 오자 이것이 맞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선생은 영남 일원의 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았다. 하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어 항복하자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선생은 한탄하면서 ‘이 세상에는 더이상 뜻이 없다’고 하면서 동해변의 산에 들어간 뒤 반 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여현집> ‘부록·경원록’)
그러니까 1636년 금성이 몇달째 대낮에 보인 것을 전쟁의 조짐으로 여긴 장현광이 장탄식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자 영남 유림들을 모집하려 했지만 인조가 항복하는 바람에 낙심하고 은거한 뒤 반년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화병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모두 임금의 잘못입니다”
그랬으니 금성의 움직임은 천문관측의 최대 관심사였다. 만약 금성을 비롯한 별자리의 운행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임금은 전전긍긍했고, 신하들은 ‘모든 것이 임금이 부덕한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금성이 백주에 두 번이나 나타난 연산군 때도 마찬가지였다. 철권을 휘둘렀던 천하의 연산군이지만 금성이 백주에 빛을 발하자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1497년(연산군 3년) 예문관 봉교 강덕유가 무시무시한 간언을 해댔다. 봉교가 어떤 직책인가. 7품에 불과했지만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이었다. 강덕유의 말은 서릿발 같다..
“근년에 재앙과 변괴가 자주 나타나 지진이 일고 햇무리가 있으며 겨울에 뇌성이 나고 여름에 눈이 옵니다. 흰 기운이 하늘에 가로지르고 금성이 낮에 보입니다. 변방 백성들이 염병에 걸려 거의 다 죽어갑니다. 이같은 재앙과 변괴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럽고 쇠퇴한 시대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이변입니다.”
강덕유는 그러면서 “그런데도 전하는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 아니냐고 변명하고 근신하거나 반성하는 마음을 조금도 갖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신은 통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나이다.”
강덕유는 한발 더 나아가 폭군의 대명사격인 중국 주나라의 여왕과 유왕을 들먹거렸다. “유왕과 여왕이 정사를 잘못 펼치자 걷잡을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졌다”는 것이다. 여왕과 유왕이 누구인가. 주나라 여왕은 기원전 841년 백성의 입을 막는 공포정치로 일관하다가 이른바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정권을 잃은 인물이다. 쉽게 말하면 백성들이 혁명을 일으켜 군주를 쫓아낸 것이다. 이로써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주나라(서주)는 큰 타격을 입는다. 이후 14년간 재상인 주공과 소공이 힘을 합쳐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것이 공화(共和)라는 말의 유래다. 유왕은 한술 더떴다. 향락과 주색에 빠져 주나라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결국 서융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다.(기원전 770년) 이로써 약육강식의 춘추시대가 개막됐다. 주나라는 이후 허울좋은 ‘동주’라는 이름으로 연명했다. 사실 강덕유의 ‘여왕·유왕 발언’은 자칫 피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대상이 다름아닌 연산군이 아닌가. 그렇지만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의 대응은 매우 담백하다. “(그저 강덕유의 상소를) 들어주지 않았다”고만 기록한다.
■연산군을 폭군이라 하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강덕유가 속한 예문관이 가만 있지 않았다. 예문관은 다시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군주가 사관(史官)을 왜 두려워합니까. 사관이 임금의 선과 악을 모두 그대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사관 강덕유은 구구절절이 옳은 말만 했습니다. 역사책에 그대로 쓰십시요. 또 강덕유의 상소대로 좋은 인재를 골라 등용하십시요. 간사배들은 빨리 내쫓아야 합니다.”
이렇게 역린을 건들였는 데도 천하의 연산군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인 더러) 유왕이니 여왕이니 하면 어찌 하는가. 아무리 성스러운 아들과 인자한 자손들이 있어도 (이런 평가를) 영영 고칠 수 없는 것 아니냐. 만약 내가 한 일이라면 몰라도, 하지 않은 일이라도 역사책에 기록하면 어찌하겠느냐. 그리고 인재를 등용하라 했는데, 그렇다면 너희들이(7~9급 공무원들)이 한번 추천해보거라.”
무오사화(1498년)를 일으키기 전의 연산군이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 제 아무리 연산군이지만 천문 기상의 조짐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지금으로 치면 7급 공무원에 불과한 전임사관이 연산군더러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고, 그것이 가납되지 않자 그가 소속된 관청(예문관)까지 나서 재차 상소를 올렸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전전긍긍한 연산군
그런데 무오사화의 참변이 벌어진 1년 뒤인 1499년(연산군 5년) 금성이 또 낮에 나타난다. 천문지리를 관장하던 관상감이 “금성이 사시(오전 9~11시)에 나타나 오시(오전 11~오후 1시)에 이르렀다”고 보고한 것이다. 심상찮게 여긴 연산군은 천문에 정통한 경기 감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김응기는 물론 “이것은 좋지 않은 조짐”이라고 보고한다.
“목성·화성·수성·금성·토성 등 오성(五星)의 운행은 그 느리고 빠름, 순행과 역행이 있습니다. 금성은 해를 따라 들어갈 때는 장경(長庚), 달보다 앞서 나올 때 계명(啓明)이라 합니다. 이 별은 마땅히 숨어 있어야 하는데 낮에 나타났습니다. 별은 음(陰)을 나타내고, 오정(午正)은 양위(陽位)입니다. 그런데 금성이 아침 늦게 떠서 대낮까지 떴다는 것은 곧 하늘을 누비는 것입니다.”
김응기는 “이것은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미약하다는 증거이며, 대단한 재변(災變)이오니 마땅히 임금이 근신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태백이 낮에 보이면 병란의 조짐이거나 외척이 발호하거나 여왕이 창성한다.’고 했습니다.”
연산군은 “해가 진 뒤 서쪽에 나타나는 그 별 말이냐”고 반문하면서 “나보고 근신하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렇게 해도 이 별이 낮에 보이게 되면 어찌하느냐”고 전전긍긍했다.
김응기는 “대낮에 보이지 말아야 할 별이 보였으므로 지금이야말로 두렵게 여겨 몸과 마음을 닦고 살필 때”라고 신신당부했다. 연산군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고 몸과 마음을 닦고 반성하는 일)이 부족했던 탓알까. 연산군은 결국 잇단 사화에 휘말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몸가짐 잘하고 반성하겠나이다”
천하의 연산군에게도 ‘제발 좀 반성하라’고 다그쳤는데, 다른 임금들에게는 오죽했겠는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변계량(1369~1430)의 <춘정집>을 보라. 당대에 별자리가 흔들리고 괴이한 기상이변이 일어나자 소격전(도가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려고 설치한 관서)에서 제사를 지내며 읽은 축원문이 실려있다.
“금성이 낮에 나타나다니…. 하늘이 백성을 민망하게 여겨 분명한 질책을 내린 것입니다. 임금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노력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미처 생각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모두 임금의 책임이라 여겨야지 다른 데서 이유를 찾으면 안됩니다. 간절히 기원합니다. 모든 재앙이 얼음 녹듯이 사라지고 큰 복이 구름처럼 밀려오게 하소서. 신체가 건강하여 오래도록 이룩된 대업을 누리고 백성이 화목하여 시기하는 싹이 영원히 없어지게 하소서.”
특히 세종은 “금성이 대낮에 나타났다고 하니, 재앙을 만나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면서 “하늘의 별들을 우러러보는 백성에게 도움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했다.
이렇게 하늘에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은 세종 임금처럼 공구수성, 즉 몸가짐을 삼가고 스스로 반성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임금 때문에 모든 재이(災異)가 일어나는 것”이라는 신하들의 질책을 감당해야 했다. 이럴 때 임금이 맨 첫번째로 해야 할 조치가 바로 ‘구언(求言)’, 즉 충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불통의 정치 때문입니다”
조선 중 후기의 문신인 조익(1579~1655)의 <포저집>에는 하늘의 조짐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여름 사이에 형혹성(熒惑星·화성)이 다른 별을 범하고,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난 것을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일관(日官)들만 볼 수 있었던 주현(晝見)을 지금은 사람들 모두가 보게 되었으니 심상찮습니다. 문제는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환란의 조짐입니다.”
조익은 “이제 백성들이 병란(병자호란)의 끝에서 소생되기를 바라는데 아직도 후유증이 가시지 않고 폐단만 남았으며 기근이 잇달아 발생하는데다 노역까지 많아 피곤하고 고달프기만 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더욱 험한 말을 해댄다.
“주상께서는 신하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슬리는 말이 있으면 반성할 생각은 안하고 사적인 감정에 이끌려 천둥번개 치듯 역정을 내십니다. 그러니 말을 하다가 처벌을 받는 자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조익은 그러면서 “직언이 용납되지 않으면 이제 임금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어 임금이 교만해질 것이며, 그 경우 불통 현상이 생겨 좋은 정치를 이룰 수 없다”면서 “이것이 가장 두렵다”고까지 했다. 조익은 금성 등 별자리의 심상찮은 운행을 ‘불통의 정치’와 연결시켜 임금을 마구 다그치고 있다.
조익은 <서경>을 인용해서 핵심을 짚는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든 재앙은 모면할 길이 없다’(<서경> ‘태갑 중’)고 했습니다.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백성들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즐거워하면 하늘도 기뻐할 것이 분명합니다.”
무슨 말인가. 조익의 핵심은 이거다. ‘백성들의 마음 속 원망이 바로 하늘의 이변, 즉 금성과 같은 별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며, 따라서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면 하늘의 원망도 풀릴 것’이라는 얘기다.
■금성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
임진왜란 발발 20년 전인 1572년(선조 5년)에 금성이 태양을 침범하는 등 천문 이변이 벌어지자 사헌부가 상소문을 올린다. 어쩌면 그렇게 175년 전 강덕유가 연산군을 다그쳤던 내용과 똑같은 지 모르겠다.
“금성이 해를 침범하고 흰 무지개가 하늘을 범했으며, 겨울인데도 번개와 우뢰가 번쩍거리고 진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나라의 유왕·여왕 시대처럼 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
사헌부는 “성상(선조) 치세 5년 동안 훌륭한 치적이 별로 없고 잘못된 일만 많다”고 비판하면서 역시 <서경> 구절을 인용한다.
즉 “백성이 보고 들은 것이 바로 하늘이 보고 들은 것”이라면서 임금더러 백성의 처지를 생각하고 몸과 마음을 닦고 반성하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는가. 20년 뒤 나라는 임진왜란 속에 누란의 위기에 빠진다. 금성이 전하는 경고를 무시한 것일까.
■쩔쩔 맨 임금들
그 뿐이 아니었다. 금성의 이변이 일어날 때마다 신하들은 임금더러 “제발 반성 하라”고 다그쳤다.
1663년(현종 4년)에는 응교 이민적이 금성이 낮에 나타난 것을 보고 “이것은 백성의 걱정과 원한의 기운이 하늘에 사무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임금을 몰아붙인다.
“그저 하늘에게 비는 정도로는 안됩니다. 임금 신하 할 것 없이 반성하고 회개하며, 잘못된 정책을 깨끗이 씻어버림으로써 하늘의 단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옳은 말을 아뢰는 대신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듣기싫은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러자 현종은 “내가 듣기 싫어했다는 것은 나도 사실 몰랐던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어쨌든 이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난다”고 반성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1665년(현종 6년) 부응교 김만기는 “기근이 심해지고 금성이 낮에 나타나며, 무지개가 해를 침범하고 도적이 들끓고 백성이 유리걸식하는 데도 임금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현종 임금을 다그친다. 현종은 “그대의 말을 되새기겠다”고 쩔쩔 맸다.
■지옥별 금성은 지구의 미래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금성은 샛별이니, 개밥바라기별이니, 비너스니 하는 낭만적인 이름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 속속 드러났다.
역시 옛날 사람들의 눈이 신기할 정도로 맞았던 것이다. 그렇다. 질량(지구 질량의 0.82배)과 크기(지구 반지름의 0.95배)가 지구와 비슷해서, 형제별로 통하지만 금성의 실체를 보면 놀랄 것이다. 이산화탄소(대기중 96.5%)가 가득한 섭씨 450도 이상의 지옥별이기 때문이다. 최근 인류가 지구 온난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예로 드는 것이 바로 금성이다.
왜냐. 금성이 바로 온실효과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대기의 절대다수가 이산화탄소이고 엄청난 온실효과 때문에 지표의 온도가 태양계에서 가장 높은 450도 이상까지 치솟는다. 수성이 더 태양과 가깝지만 온실효과에 따른 금성의 온도에 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땅이 흐물흐물하다. 또 대류권이 지표에서 80㎞ 존재한다. 이 때문에 엄청난 대류운동이 일어나 평균 풍속이 초속 360m나 된다. 대기압은 지구의 90배에 이른다. 그 때문에 1967년 금성의 대기권으로 내려가던 구 소련의 베네라 4호 탐사선은 금성 표면 24㎞ 상공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또 다른 특징은 금성의 자전이 늦다는 것이다. 태양계 8개 행성 가운데 가장 느리다. 금성의 하루는 지구의 1년과 맞먹는다. 때문에 자기장이 별로 형성되지 못했다. 따라서 태양이 뿜어내는 엄청난 태양풍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러니 증기의 형태로 남아있는 수분조차 남기 어렵다. 여기에 잇단 화산활동으로 이산화탄소와 황산이 대기 중에 떠돌고, 95%를 웃도는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실효과가 무한반복되어 지옥별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구의 미래는 곧 금성’이라는 불길한 예측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 지구온난화를 야기한 온실가스가 계속된다면 지금 450도까지 치솟은 지금의 금성처럼 변할 수도 있으니까…. 때문에 지구온난화를 언급할 때 어김없이 회자되는 행성이 바로 금성이다. 또하나, 태양은 10억년마다 10%씩 밝아진다. 결국 30억년 후에 지구의 바닷물은 모두 증발해버릴 것이다. 그러니 금성은 곧 지구의 미래가 틀림없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옛사람들의 혜안이 신기하지 않은가. 금성을 ‘재앙을 예고하는 불길한 별’이라고 여긴 옛 사람들의 생각이 어찌 그리 딱 맞았는지 모르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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