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저게 어찌 된 것이요.”
1957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월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과 경복궁 내 경회루 산책에 나선 이승만대통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산산조각 난채 방치된 흉물스러운 탑 한 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외국정상과 함께 보았으니 얼마나 큰 망신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가 하늘을 찌르자 부랴부랴 방치된 탑의 복원에 나섰다.
한국전쟁 때의 폭격 유탄에 맞아 무려 1만2000조각으로 산산조각난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 이후 여러차례 복원 수리 과정을 겪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문제의 탑은 바로 원주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이었다. 원주 부론면을 떠나 서울-일본 오사카를 거쳐 원래의 자리인 원주로 가지못한채 서울 경복궁 한편에 서있다가 한국전쟁 때인 1950년 어느날 폭격을 맞아 무려 1만2000조각으로 산산조각난 바로 그 탑이었다. 경복궁 내 다른 유물들은 그대로 인데 하필이면 이 탑에만 포탄이 떨어졌으니 재수가 억세게 없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나저나 폭격을 맞은지 7년이나 지났지만 그대로 방치된 탓에 부서진 부재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당시 복원 팀은 강화도·익산 등지에서 모자란 돌을 조달해서겨우 복원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 지광국사 탑을 수식하는 표현이 있으니 바로 ‘미인박명’이다. ‘미인’이란 고려는 물론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승탑이라는 뜻이고, ‘박명’은 그러나 탑의 팔자가 기구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탑에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국사로 추대된 지광국사 해린 스님(984~1070)의 사리와 유골을 모셨다.
지광국사 탑의 기단부와 탑신부에 새겨진 각종 낙서들. ‘나 여기 언제 왔소’ 하는 당대의 낙서들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해린 스님의 본래 성씨는 원주의 제1토착성인 원주 원(元)씨다. 984년(고려 성종 3년) 태어난 해린 스님은 유년기에 유학을 배우다 법천사 관웅 스님에게 불경을 배워 개경의 해안사에서 출가했다. 16세에 비로소 용흥사에서 구족계(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아 득도승이 됐다. 21세에는 왕륜사에서 대선(大選·승려의 과거)에 급제했다. 해린 스님은 이후 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수좌(首座)를 거쳐 승통(僧統)에 이르렀고, 급기야 승려로서의 최고 영예인 왕사(王師)와 국사(國師)까지 지냈다.
해린 스님은 화엄종과 함께 불교의 양대산맥을 형성한 법상종의 고승이었다. 해린 스님은 법상종의 세력 강화에 큰 역할을 한다. 해린 스님이 왕사와 국사에 임명된 때는 문종 때였다. 고려 초의 과도기적인 혼란에서 벗어나 정치·사회·문화전반에 안정이 이룩된 시기였다. 나이가 든 해린 스님이 고향의 법천사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문종이 직접 나와 전송했다. 스님은 87세의 나이인 문종 24년(1070년) 법천사에서 타계했다. 문종은 해린 스님이 법천사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몹시 슬퍼했다. 사람을 보내 장례비용을 댔고, 장례를 감독하게 했다. 친히 지광(智光)의 시호를 내렸다. 지광의 입적 후인 1160년에도 왕(의종)이 직접 행차한 기록으로 보아 그 법천사의 법통은 이어진다. 법천사는 고려중기 문종시대 최대의 ‘파워맨’이었던 지광이 처음 불교에 입문해서 마지막으로 타계한 곳이다. 그 사세가 크게 떨쳤던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만다. 1609년(광해군 원년) 법천사를 찾은 허균(1569~1609년)은 기행문(<성소부부고> ‘유원주법천사기’)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강원 원주 법천사 탑에서 반출되어 서울 명동으로 옮겨진 1911년 당시의 지광국사 탑(국보 제101호).|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금년(1609년) 가을 휴가를 얻었다. 마침 지관 스님이 찾아와 ‘기축년(1589년)에 법천사에서 1년 주석했다’고 했다. 스님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난리(임진왜란)에 불타서 무너진 주춧돌과 함께 절터의 흔적이 토끼와 사슴이 다니는 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후 법천사가 이후 중창됐다는 기록이 없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후 400여년이 지난 1911년 9월 한 일본인(모리무라 타로·森村太郞)이 법천사 터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지광국사 탑을 발견하고 땅주인에게서 탑을 사들인다. 모리무라는 탑을 해체한 뒤 서울로 옮긴다. 서울로 옮겨간 탑을 산 이는 일본인 실업가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였다. 와다는 이 탑을 명동 무라카미(村上病院)을 거쳐 자신의 집(남창동) 정원으로 옮겨두었다가 다시 일본 오사카(大阪)에 사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3만1500원이라는 거액에 팔아넘긴다. 1912년 5월31일 탑은 오사카로 반출된다.
그러나 그해 10월 쯤 뒤늦게 탑의 일본 본토 반출소식을 알게 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폐사지는 원래 국유지로 봐야하고 그 폐사지에 있는 탑 역시 국유물”이라고 앙앙불락하면서 모리무리와 와다 등을 구류에 처하고 소환 하는 등 수사에 나섰다. 모리에게서 탑을 사서 일본의 후지타에게 되판 실업가 와다는 총독부의 서슬퍼런 강경책에 놀라 전전긍긍한다. 결국 와다는 일본의 후지다에게 팔았던 탑을 되사서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일단락 시킨다. 이때가 1912년 12월6일 쯤이다.
하지만 환수된 이 탑의 행방은 2~3년동안 묘연해진다. 그러던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많은 석조물들이 공진회장인 경복궁 내로 이전됐는데, 이 지광국사탑이 포함됐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제가 5년간의 총독정치가 얼마나 조선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 기간 동안 일본 덕분에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개최한 박람회였다.
1927년 후지무라 도쿠이치(藤村德一)가 쓴 ‘(지광국사) 현묘탑 강탈시말’. 1911년 모리루타 타로가 서울로 반출한 탑은 서울 명동-남창동을 거쳐 일본 오사카로 팔려갔으며 다시 서울로 돌아와 경복궁에 세워졌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문제의 지광국사탑은 경복궁 내 미술관(조선총독부 박물관) 앞 정원 중앙에 전시됐다. 탑은 1923년까지 약 8년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1923년 이후 경회루 동편의 사정전과 아미산 사이로 다시 이전했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산산조각난채 방치된 것이다. 박살난 탑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당시에는 문화재위원회 같은 기구도 없었다. 그랬으니 공식적으로 나설 사람이 없었다. 문교부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쪽에 복원 이야기를 꺼냈으나 씨도 안 먹혔다. 그러던중 고딘디엠 월남대통령이 방문했고, 고딘디엠 대통령과 경회루를 산책한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탑의 복원이 이뤄졌지만 이미 원주-서울 명동-서울 남창동-일본 오사카-서울 경복궁 등을 전전하며 10여차례의 해체와 이전 등을 거치면서 본래모습을 일부 잃어버렸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6년부터 지광국사탑의 보존처리를 위해 탑을 해체하고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옥개석(지붕돌)과 하층기단 갑석(대석 위에 올리는 돌)의 부재를 찾았다. 또 석재의 산지를 추정하고 과거 복원에서 뒤바뀐 옥개석의 위치를 바로 잡는 등 연구 성과를 냈다. 최근에는 지광국사탑의 보존처리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와 역사적 의의를 사진과 함께 실은 도록을 발간했다.
이번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11년 명동으로 옮겨졌을 때 찍은 유리건판 사진에서 확인된 묵서의 내용이다. 바로 19세기말~20세기 초 지광국사탑을 방문한 근방(원주·여주·충주) 사람들이 남긴 낙서였다. 낙서는 탑을 찾은 시기, 즉 ‘계사삼월(癸巳三月)’, ‘윤월(閏月)’, ‘임진삼월초(壬辰三月初)’ 등과 지명(원주읍 중동리, 원읍 하동, 여주 근동면, 본계), 한글(긔묘, 여긔서), 이름(李景燁, 朴俊石, 金石永) 등이다. 간지와 연호를 살펴보면 1879년(긔묘·기묘)부터 1905년(광무 9년)까지의 낙서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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