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발중 49발 명중이 모두 10차례. 한번은 100발 쏘아 98발 명중….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나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가 아니다. 문체반정을 주창한 문예군주라는 정조 임금의 활쏘기 솜씨이다.

정조의 활쏘기 점수가 다름아닌 <정조실록>에 아주 자세히 기록됐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10~12월 사이 춘당대에 출근하다시피 해서 활쏘기 행사를 벌인다. 왜 유달리 이무렵에 집중된 것일까. 정조는 “과인이 활쏘기를 원체 좋아했고 그것이 가문의 법도여서 젊은 시절에는 즐겼지만 최근 10~20년 사이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1792년 10월12일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밝혔다. 

<정조실록>을 보면 10월에는 32발(17일)~47발(26일)이던 것이 30일 49발이 된 이후 가히 신궁의 경지에 올랐다. 박제가의 ‘임금의 활쏘기 기록(御射記)’을 봐도 10월 30일 이후 12월22일까지 50발 중 49발을 맞춘 회수는 무려 10회에 달한다.(<정유각전집>) 특히 12월27일에는 10순이 아니라 20순, 즉 화살 100발을 쏘아 98발을 맞추는 기염을 토한다. 이것까지 치면 ‘49발 명중’은 12회라 할 수 있다. 

교지연구가 김문웅씨가 공개한 정조 임금의 ‘고풍’ 자료. 1792년(정조 16년) 10월30일 정조가 신하들과 활쏘기를 해서 50발 중 49발을 맞힌 뒤 검교제학 오재순이 올린  ‘고풍’에 써준 어필 자료다. ‘고풍’은 활을 명중시킨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고풍에는 제1순부터 10순까지 정조의 활쏘기 점수가 각 발마다 기록됐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맞혔고. 점수는 72점(분)이었다. 정조는 “원래 활쏘기는 가문의 법도였다”고 한껏 자랑한 다음 신하들에게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줄 것을 권하고 싶다”고 주문했다.|김문웅씨 제공 

■일부러 1발을 쏘지 않은 이유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길 법하다. 왜 만점(50발 명중)은 없는 것일까. 왜 번번이 한 발이 빗나갔을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10월30일에도 정조는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50발 중 마지막 발은 쏘지 않고 남겨두거나 일부러 빗나가게 했다.(<정조실록> <홍재전서>) 정조는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으며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홍재전서>)거나 “활쏘는 사람들의 예법은 본래 1발을 빼고 49발을 쏘는 것”(<정조실록>)이라고 했다. 

박제가(1750~1805)는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임금의 활쏘기 솜씨는 하늘이 내린 것이며, 50대를 쏘는데 번번이 1대씩 빠뜨린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 입을 모았다”고 전했다. 

이 대목에서 박제가는 “문무를 겸비한 우리 성상(정조)은 백왕을 뛰어넘으셨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랬다. 정조를 밤새도록 책만 읽고, 보고서만 읽은 공부중독, 일중독의 군주로 알기 쉽지만 절대 문약(文弱)에 빠진 임금이 아니었다.

정조는 과거를 앞둔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재시(再試)의 책문(일종의 논술고사)으로 ‘문과 무의 겸비에 대해 논하라’고 해놓고 “문과 무의 병용이야말로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계책”이라는 지문(제시문)을 내기도 했다.   

1792년(정조16년) 10월30일자 <정조실록>. 김문웅씨가 공개한 오재순의 ‘고풍’의 내용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아버지(사도세자)를 빼닮은 정조의 무인기질

즉위하는 순간 ‘아!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라고 선언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쏙 빼닮아 무인기질을 이어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특히 북벌론을 개진하며 국방력을 키운 효종을 특히 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1736년(영조 12년) 당시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를 보고 당대의 연신 조현명(1690~1752)은 “저하(邸下·사도세자)가 효종의 모습을 매우 닮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종묘 사직의 끝없는 홍복”이라고 치켜세웠다.(<정조실록> 1789년 10월7일자 ‘장헌대왕’ 지문) 

 아닌게 아니라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무예 및 군사놀이에 심취했다. 15~16살 때 이미 힘깨나 쓰던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한 청동도와 쇠몽둥이를 들고 자유자재로 돌렸다. 

 “효종도 일찍이 무예를 좋아해서 한가한 날에 말을 몰아 무예를 시험하곤 했다. (사도세자도)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해 화살을 손에 쥐고 과녁에 쏘면 반드시 목표를 정확히 맞혔고 고삐를 잡으면 나는 듯이 능숙하게 말을 몰았고 사나운 말도 잘 다루었다.”(<정조실록>  ‘장헌대왕 묘지문’) 


■“동궁(세손)이 알 필요가 없다”는 세가지 

정조의 신궁(神弓) 솜씨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다. 정조가 무예를 닦을 수밖에 없었던 말못할 이유가 또 있었다. 평생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조의 세손시절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노론이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동궁(정조)은 세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이다. 즉 1775년(영조 51년) 11월 20일 노쇠한 영조가 전현직 고위관리들을 불러 “내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운을 뗀 뒤 “어린 동궁(정조)에게 나라를 맡길 것이 걱정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을 알겠는가? 소론을 알겠는가? 남인을 알겠는가? 소북(少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는가? 조사(朝事·조정 일)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난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그것을 보고 싶다.”(<영조실록>)

그러자 세손의 외종조부이자 좌의정 홍인한(1722~1776)이 모골이 송연한 발언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이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조정 일도 알 필요 없습니다.”

노론 벽파에 가담해서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한 홍인한은 ‘정사는 우리(노론)가 알아서 할테니 임금(영조)나 동궁은 가만 계시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기가 막힌 영조는 “내 뜻을 경들이 몰라 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는 등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며 한참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모두 물러가라”고 했다. 영조는 “정녕 내 사업을 손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말이냐”면서 “지금 난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도 못한다”고 한탄했다. 

‘고풍’에 기록된 정조의 활쏘기 점수. 활은 1순에 5발씩 모두 10순에 걸쳐 쐈는데, 세부점수도 기록했다. 즉 과녁의 정가운데에 맞으면 2분(점)을 부여하는 ‘貫(관)’, 주변에 맞으면 1점인 ‘변(邊)’으로 기록했다. 예컨대 정조가 쏜 제1순(巡)의 세부점수는 ‘변(1점)·관(2점)·변(1점)·관(2점)·관(2점)’이어서 8분(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제10순째는 4발만 쏘고 마지막 한 발 자리는 공란으로 비워두었다. 정조는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므로 남보다 앞서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일부러 마지막발을 쏘지 않거나 빗맞혔다. 당대 사람들은 이를 두고 ‘겸양의 미덕’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정조 암살 미수 사건의 내막

이렇게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끊임없는 살해위협에 시달렸다.

“적도(賊徒)와 역당(逆黨)들이 흉모를 빚어내고 얽어내어 위태롭게 만드니…난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 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좌우에서 몰래 엿보는 무리 때문에…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했다.”(<존현각일기> 1775년 윤10월5일)

정조는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776년(영조 52년) 3월 영조의 승하 후에 천신만고 끝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렇게 왕위에 올랐지만 살해위협이 줄어들기는커녕 실제 소름끼치는 암살미수사건까지 벌어졌다.

즉위한지 1년4개월 후인 1777년(정조 1년)7월 28일 밤 정조가 책을 보고 있던 존현각(정조의 침전)의 회랑 위를 따라 자객이 침입한 것이다. 사상초유의 정조 암살 미수사건이었다. 이것은 아버지 홍지해를 귀양 보낸 정조에게 불만을 품은 홍상범 등이 주축이 되어 정조를 시해한 뒤 장조(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 이찬(1759~1778)을 추대하려 했던 역모사건이다. 이런 황당한 사건이 왜 벌어졌을까.


■병권은 노론과 무반가문의 손에

정조가 즉위할 무렵 조선의 군대(5군영)는 오랜기간 형성된 무반가문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군영은 특정 정파, 특히 노론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군영의 운영의 전권을 갖고 있는 군영대장의 임용에도 각 정파와 척리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정조도 어쩔 수 없었다. 예컨대 정조는 즉위 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 사건 당시 포도대장이었고 홍인한과 함께 ‘음흉한 꾀를 부린 역적’으로 지목된 구선복(?~1786)을 ‘어쩔 수 없어서 울분과 원통함을 참으며(含痛齎憤)’ 군영대장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실록> 1791년 6월5일조)

정조가 손수 써준 어필 소감문.  “활 쏘는 기예는 바로 우리 가법인데(射藝卽我家法也)…오늘 명중한 화살 수(49발)가 약속했던 그 수와 맞아떨어졌기에…문방 용구와 마첩 등을 제신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전에 했던 말을 실천하려는 것이었다.…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줄 것을 권하고 싶다. <시경>에 ‘덕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 이에 다툼이 있지 않으니 왕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 바로 그 뜻이다”라 했다. 끝에 “이날 등불 아래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是日燈下漫題)”고 했다. 맨 왼쪽에 ‘반숙마(길들이지 않은 말 1필’을 하사한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예컨대 1786년(정조 10년) 역적죄로 능지처참을 당한 구선복의 일당을 탄핵한 사간원 정언 조진택은 “역적 구선복이 30년 동안이나 포도대장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보통의 무사들에게 무종(武宗·무예의 종주)라 자칭하면서 무리를 모았다”고 극렬하게 비판했다.

즉위 후 정조는 자신이 임명하는 병조판서를 통해 군권을 통제하려 했다.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는 훈련도감과 금위영, 어영청 등의 제조(책임자)를 겸한 군권의 핵심관리였다. 그러나 당대 병조의 인사권은 제한적이었다. 휘하 각 군영에서 단지 한사람의 후보자만 추천해서 올렸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한사람 추천하니 병조판서는 도장만 찍으라는 격이었다. 

정조는 즉위 후 해당 군영에서 후보 1명이 아닌 3명을 추천하라고 했다. 후보 3명 중 1명을 낙점하면 그래도 병조판서가 적임자를 거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 군영의 대장이 이미 노론과 연계된 무관들이 독점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제도개선만으로 해결하기는 힘들었다.

정조는 즉위 후 호위부대인 숙위소를 만들고(1777년·정조 1년), 그것도 모자라 훈련도감 출신 무사와 무예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30명을 선발해서 장용위(1785년·정조 9년)를 출범시켰다. 처음에 정조의 호위부대로 출범한 장용위는 장용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1788년) 훗날 5000명이 넘는 대부대(1794년)로 발돋움했다. 호위부대인 선기대(善騎隊)와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경군(京軍), 경기도 일대에 편제된 향군(鄕軍) 등으로 구성됐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50발을 다 쏜 다음 덤으로 작은 가죽 과녁(小小皮革)을 쏘아 제1순에 5발 모두 명중해서 7점(관 2발, 변 3발)을 얻었고. 유엽전 1순(5발)을 쏘아 5발을 다 맞히고 6점(관 1발, 변 4발)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번에 공개된 오재순의 ‘고풍’에도 똑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다산은 왜 10일간 ‘해병대 캠프’에 입소했을까 

아버지(사도세자)를 닮아 무인의 자질을 이어받은 정조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연마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무의 겸비가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계책’이라는 지론을 갖게 된 정조는 무신은 물론 문신들에게도 ‘무예를 연마하라’고 다그쳤다. 하기야 스스로를 ‘군사(君師)’, 즉 만백성의 군주이자 스승이라고 생각한 정조가 아닌가.

정조는 37살 이하의 당하관(정 3품 이하) 중 글재주가 있는 문신을 선발해서 공부시키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친히 시험문제를 내어 성적을 가르는 이른바 초계문신제도를 두기도 했다. 정조는 이들에게 “내가 만약 먼저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신하들이 공부할 수 있겠느냐”면서 “그러나 난 원래 공부를 즐겨서 하루종일 해도 피곤한 줄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말을 듣고 공부하지 않는 신하들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정조가 그토록 총애했던 다산 정약용도 정조가 친히 출제한 시험에서 낙제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다산은 재시험, 3시험을 치뤄 겨우 1등에 해당되는 ‘상중(上中)’의 점수를 받아 체면치례했다.(<일성록> 1790년 6월8일자)

그런 다산에게 정조가 또한번의 굴욕을 안긴 사례가 있었으니 바로 ‘활쏘기’였다. 

다산은 <여유당전서>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에서 굴욕사건의 전말을 전한다. ‘북영벌사기’는 문자 그대로 ‘북영(창덕궁 서쪽 훈련도감 본영)에서 벌로 활쏘기를 한 기록’이다. 때는 1791년(정조 15년) 9월 어느 날이었다. 

정조는 창경궁 춘당대에서 규장각 신하들에게 웅후(곰을 그린 과녁)을 10순(50발)을 쏘라고 명했다. 그러나 다산을 비롯한 7명이 50발 중 단 4발도 맞추지 못했다. 이런 경우엔 정조가 벌주(罰酒) 1잔씩 내려줘야 했다. 그러나 정조는 “벌주를 내리는 것은 그대들에게 오히려 상을 내리는 것”이라면서 다산 등 낙제점을 받은 7명에게 10일 간의 ‘북영 입소’를 명했다.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 의당 그대들을 북영(北營)에 잡아놓고 하루에 20순(화살 100개)씩 쏘아서 매 순마다 한 발씩은 맞힌 뒤에야 풀어주겠다.”

100개 중 최소한 20개는 맞출 때까지 풀어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북영 입소’라면 지금으로 치면 ‘해병대 캠프 입소’가 아닌가.

졸지에 북영(훈련도감 본영)로 끌려간 다산은 이때의 생고생을 생생한 필치로 토로한다.

“벌로 북영에 가서 활을 당겨야 했다. 처음엔 활이 망가지고 화살은 굽었으며, 깍지(활을 쏠 때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끼는 기구)는 떨어져 나갔다. 팔찌(활을 쏠 때 왼팔 소매를 걷어 매는 띠)는 질질 끌렸으며, 손가락은 부르트고 팔뚝은 부어올랐다.”

화살만 쏜게 아니었다. 다산은 “말 타는 솜씨가 서툴러서 사람들이 얼마나 웃어대는지…”하고 부끄러워 했다.


■‘성인을 만나 활쏘는 법까지 배웠네’

그러나 며칠간 피나는 연습을 한 덕분에 점점 능란해졌다. 1순(5발)을 쏘면 3발을 맞히는 때가 많았다. 정조는 예서 멈추지 않았다.

“이젠 하루에 10순씩(50발) 쏘고 남는 시간에는 경서의 뜻을 연구하라”면서 <시경>과 관련된 문제를 800조목 내린 뒤 “조목별로 답안을 작성해서 올리라”고 지시했다. 신하들을 이렇게 들들 볶을 수가 있을까. 활쏘기에 경전 공부에 800문제 시험까지…. 

다산은 그렇게 10일간 훈련하고 나서야 겨우 북영에서 풀려났다. 다산으로서는 섭섭할만 했다. 자신을 그토록 총애했던 정조가 안면몰수하고 합숙유격훈련까지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캠프에 다녀온 다산은 오히려 “난 행운아였다”는 정조의 처사를 고마워했다.

“옛 사람들은 육예(六藝)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유자(儒者)라고 이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연회 때는 반드시 활쏘기를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문(文)을 귀히 여기고 무(武)를 천하게 여기게 됐다. 어려서부터 지필(紙筆)을 익혀 먹을 다루고 편지글이나 쓰는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평생 동안 활을 잡아 보지도 못하고 늙는 자가 있다.”

다산은 “그런데 지금 우리 몇사람은 성인(聖人·정조)의 세상에서 태어나 성인의 문하에서 노닐며 화살 쏘는 법까지 이 얼마나 천고에 한번 만나는 행운이냐”고 한상 말아올렸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다산은 “360일 중에 단 10일만 훈련해도 이 정도인데 여태껏 뭐하고 있었을까”하면서 “임금의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배웠으니 이것은 우리의 죄”라 자탄했다.

1792년(정조 16년) 10월30일 오재순과 똑같이 올려 정조에게 수결(사인)을 받은 고풍. 정조 활쏘기 성적은 똑같이 썼지만 오재순의 고풍에서처럼 정조의 친필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고풍이요’ 소리치면…

교지연구가 김문웅씨(79)가 지난 6일 경향신문에 공개한 ‘고풍’지는 문예군주로 통했던 정조의 ‘무예군주’ 풍모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정조가 처음으로 50발 중 49발을 맞춘 1792년(정조 16년) 10월30일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특히 정조가 49발을 맞힌 다음 ‘내 활쏘기 솜씨가 가문의 법도’라는 점을 한껏 자랑하는 어필 소감문이 실려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시간을 227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활 쏘는 기예는 바로 우리 가문의 법도(家法)여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데…내가 장난삼아 ‘49발 맞히면 그 때 가서 고풍(古風)을 청하라’ 했거늘 오늘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수와 맞아 떨어졌기에….”

1792년(정조 16년) 10월 30일 정조가 창경궁 내 춘당대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한 결과 50발 중 49발을 과녁에 맞혔다. 점수는 72점(분)이었다. 과녁을 맞추면 1점, 정곡(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히면 2점이었으므로 49발 중 23발이 정곡을 꿰뚫은 것이다. 정조의 화살 49발이 과녁을 맞히자 ‘고풍(古風)이요’ 하는 외침이 울려퍼졌다. 


■못 이기는척 선물을 하사한 임금

고풍(古風)은 활을 명중시킨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임금과 함께 활을 쏘던 신하들이 ‘고풍이요(상을 내려달라)’고 외치면 임금은 못이기는 체하고 여러 상품을 하사했다. 즉 신하가 먼저 임금이 쏜 화살의 점수를 자세하게 적어 ‘고풍’을 올리면 임금은 하사하는 선물명을 써서 내리거나 ‘후과(後課·선물은 나중에 정하겠다는 뜻)’라 써서 내려주었다. 선물명을 쓴 경우에는 즉석에서 임금의 ‘느낀 바’를 신하의 고풍지에 쓰기도 했다.

김문웅씨가 공개한 자료는 바로 그 날 정조 임금이 화살 50발 중 49발을 맞힌 뒤 당시 검교제학 오재순(1727~1792)의 ‘고풍’에 한껏 가문의 활솜씨를 자랑하며 손수 써준 어필이다. 물론 이 자료는 <정조실록> 1792년(임자년) 10월 30일자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재순이 올린 ‘고풍’지에도 정조가 쏜 화살 점수가 차례로 기록돼있다. 임금이 쏜 유엽전(柳葉箭·촉이 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화살) 10순(巡·1순이 5발이므로 50발) 중 49발을 맞혔고 점수는 72분(점)이라 했다.

맨처음 5발을 쏜 제1순(巡)에서는 관(貫·과녁의 한가운데 정곡)에 3발, 변(邊·주변)에 2발 맞아 8분(점)을 기록했다. 제2순은 관에 2발, 변에 3발 맞아 7분(점)이었다. 이렇게 제10순까지 정조가 과녁의 어떤 부분을 맞혔고 각 순별 점수가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록돼있다. 정조는 10순(50발)을 다 쏘고도 만족하지 않았다. <정조실록>과 오재순의 ‘고풍’지는 “10순이 끝난 뒤에도 정조는 작은 가죽 과녁을 쏘아 1순에 다섯 발을 명중해서 7점(관2발, 변3발)을 얻고, 또 유엽전 1순을 쏘아 다섯 발을 맞히고 6점(관 1발, 변 4발)을 얻었다”고 했다. 

조선 후기 화기 이명기의 오재순 초상화(보물 제1493호).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의 손자이며 정조 때 대사헌,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부사까지 오른 관리이자 제자백가에 두루 달통한 학자로 유명하다. 이 ‘오재순 초상’은  초상화를 잘 그렸던 화원 이명기가 오재순의 나이 65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을 쏘아 49발을 명중시킨 1792년 무렵에 그렸을 것이다.

■“활쏘기는 가문의 법도다”   

정조는 오재순의 ‘고풍’에 손수 쓴 글에서 “원래 활쏘기는 우리 가문의 법도”(射藝卽我家法也)라 어깨를 으쓱댔다. 그러나 10여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힘을 시험해보려고 몇차례 10순(50발)씩 쏘았는데 40여발씩 명중시켰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경(신하)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그래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때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10월30일)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49발)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

정조는 참석한 각신(규장각 관리)들에게 반숙마(길들이지 않은 말) 1필씩 하사하고 검서관(규장각 5급이하) 이하 관리에게는 차등있게 선물을 내렸다. 오재순은 현종의 셋째딸인 명안공주(1667~1687)의 손자로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고 학문에 뛰어나 제자백가에 두루 통했고, 특히 <주역>에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정조는 그날 평소 총애하는 인물인데다 참석자 중 맨머리에 있던 오재순에게 특별히 임금의 소감문을 써준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공개된 ‘고풍’지를 보면 오재순에게 ‘반숙마 1필 하사를 약속한다’는 증서(馬帖)와 함께 직접 어필로 소감을 써주는 특전을 배풀었다. 정조는 글의 말미에 “이날 등불 아래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是日燈下漫題)”는 낙관을 썼다. 물론 <정조실록>과 김문웅씨의 공개자료에 똑같이 등장하는 ‘낙관’이다. 정조의 글내용 중 특히 주목되는 내용이 있다. 

“(경들이)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줄 것을 권하고 싶은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德)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이에 다툼이 있지 않으니 왕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는데 바로 그 뜻인 것이다.”

김문웅씨는 “활쏘기 후에 고풍(선물)을 내림으로써 덕을 베푼 정조는 여전히 세력을 떨치던 노론 벽파에게 <시경>을 인용하면서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서 임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문예 뿐이 아니라 무예군주도 자처한 정조라는 임금 밑에서 들들 볶이며 신하노릇 했던 이들은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기야 똑똑한 군주 밑에서 똑똑한 신하가 나는 법이다. 그런 임금과 신하가 만나 서로 존경하고 믿으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경우를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한다. 물고기가 좋은 강물을 만나 활발하게 헤엄칠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준혁, ‘사도세자와 무예’,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기획전 ‘사도세자’ 도록>, 수원 화성박물관·용주사효행박물관, 2012

배우성, ‘정조의 군사정책과 무예도보통지 편찬의 배경’, <진단학보> 제91권 91호, 진단학회, 2001

송일훈, 진윤수, 안진규,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정조대왕의 궁술. 무의 신체지’, <한국사회체육학회지> 제30권 30호, 한국사회체육학회, 2007 

이방섭, ‘정조의 장용영 운영과 정치적 구상’, <조선시대사학보> 제53권 53호, 조선시대사학회, 2010

김형국, <활을 쏘다-고요함의 동학, 국궁>, 효형출판, 2006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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