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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지긋지긋한 학교, 그리고 체벌… 언제 생겼을까

'아! 지겨운 학교, 언제나 쉬려나.' 기원전 2000년 무렵 어느 수메르 학생이 설형문자로 점토판에 새긴 넉두리입니다. 학교생활,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그랬을까요. 수메르인이 새겨둔 점포판을 보면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교사가 지극히 산만한 학생을 체벌하고, 체벌당한 학생은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우리 선생님에게 좀 뇌물 좀 줍시다"라 했습니다. 자식이 뭐라고, 아버지는 자식의 호소를 듣고 교사를 초청해서 이른바 촌지를 건넵니다. 인류 최초의 촌지입니다. 그런데 촌지를 받은 선생님의 반응이 걸작입니다. 문제의 학생을 향해 "넌 형제들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낼 거야. 틀림없어."라 칭찬해줍니다. 촌지의 효과일까요. 물론 지금이야 사라졌다지만 촌지는 3000년 이상 지속되어온 관행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떨까요. 요순시대에 속하는 순임금 치하의 기록(<사기> '오제본기')을 보면 '학생은 회초리로 다스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학교의 기록은 상나라(기원전 1600~1046) 시대부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대학교육 역시 상나라가 원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6회는 '지긋지긋한 학교, 언제부터 생겼을까' 입니다.       

기원전 3200년 무렵 수메르인들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이라크)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창조했다. 기억력의 한계를 느낀 그들은 점토판에 글자를 새겨 경제와 행정문서로 활용했다.

이것이 그들이 인류 최초로 발명한 ‘쐐기(설형)문자’였다.  글자만 발명했다고 다 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글을 새길 두브사르(dub sar), 즉 필경사를 양성해야 했다. 인류 최초의 학교인 에두바(edubba)가 탄생한 것이다.

1902~1903년 사이 수메르 문명지의 한곳인 고대 슈르파크에서 상당량의 수메르 학교 교과서가 발굴됐다. 기원전 2000년 점토판이었다. 이 점토판이 적힌 학생(필경사)들의 아버지 직업은 총독, 도시고위지도자, 군대지휘관, 고위직 세금관리, 대사, 신전 관리자 등이었다. 필경사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고위층 자제들이었던 것이다. 

 말썽꾸러기 아들을 꾸짖는 내용을 담은 기원전 1700년 무렵의 수메르 점토판. “공부만 하면 된다”고 꾸짖는 아버지와 학교공부는 팽개치고 거리를 맴도는 아들 간 팽팽한 신경전을 볼 수 있다. |가람기획 제공

■인류 최초의 체벌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수업은 따분한 법이다. 발굴된 에세이 내용을 보자.

 “쉬는 날은 사흘이다. 예배보는 날도 사흘이다. 달마다 24일은 난 학교에 다녀야 한다. 지겨운 학교.”

어느 집 자제인지, 교과내용을 담은 서판에 학교 생활의 지겨움을 생생한 필치로 전달했다.

이 뿐이 아니다. 어떤 학교선생이 점토판에 쓴 에세이는 어느 학생의 학교와 가정생활을 다루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가 점심으로 싸준 빵 2개를 들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좀 주위가 산만했던, 문제학생이었던 것 같다.

교실에서 성급하게 일어나가거나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등 경솔한 행동으로 여러 교직원들에게 체벌을 받았다.

설상가상의 일은 선생님이 “필기가 엉망”이라며 매질을 가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체벌의 역사가 4000년이나 되는 것인가. 각설하고 이 학생은 교사의 체벌을 견디지 못한 것 같다.

■인류 최초의 촌지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한다.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한뒤 뇌물을 주자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집을 방문했다. 선생님은 상석에 앉았다. 학생이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아버지는 선생님과 술잔을 기울이며 식사를 했다. 선생님에게 새 옷을 입히고 선물을 주었으며. 반지를 끼워주었다.”

인류최초의 촌지였던 것이다. ‘촌지에 장사가 없었던 것’일까.

기분이 한껏 고조된 선생님은 학생을 마구 칭찬하기 시작한다.

“넌 네 형제들 중 가장 앞서나갈거야. 친구들 중에서는 우두머리가 될 것이고, 지도자가 될 거야.”

이 에세이는 21점의 점토판 사본으로 3곳의 박물관에 흩어져 보관돼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대학박물관에 13점, 이스탄불의 오리엔트 박물관에 7점, 루브르박물관에 1점 등….

그러던 것을 학자들이 기막히도록 맞췄고, 훗날 수메르 학자인 시카고 대학의 소킬드 제이콥슨과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아담 팔켄슈타인 등이 완전 해석했다.

이 해석문은 1949년 전문 학술지인 <아메리칸 오리엔탈 소사이어티 저널>에 발표됐다.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의 갑골문자. 셈가지를 뜻하는 爻가 學과 敎자에 있는 것은 최초의 교육이 수리교육이었음을 알려준다. 또 敎자를 보면 회초리를 든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체벌교육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를 알 수 있다. |서예문인당 

■혹독한 아버지의 꾸지람

또 있다. 기원전 1700년에 제작된 에세이를 보라. 아버지가 답답한 나머지 말썽꾸러기 아들을 마구 몰아붙이고 있다.

“어디 갔었느냐?”(아버지)
“아무 데도 가지 않았습니다.”(아들)
“왜 집에서 빈둥대느냐? 학교에 가서~ 선생님 앞에서 과제물을 암송하고~ 거리에서 방황하지 마라. 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느냐?”(아버지)
“제발 철 좀 들어라. 공공장소에서 서성거리거나 길에서 배회하지 마라. 선생님 앞에서 겸손하게 굴고, 어려워해라. 그러면 선생님도 널 좋아할 것이다.”(아버지)

아버지의 훈계는 끝이 없다. 

“난 너에게 절대 나무를 해오라고 숲으로 보내지 않았다. 짐수레를 밀게 하지도. 쟁기를 끌게 하지도, 땅을 개간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다. 육체노동을 하도록 널 보내지 않았다. ‘가서 일을 해서 날 먹여살려라’라고 한 적도 없다. 너희 형을 본받아라. 너의 동생을 본받아라. ~그리고 아버지의 일(필경사)을 이어받는 것은 너의 정해진 운명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노는 아들’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들을 꾸짖는다.

“난 너 때문에 밤낮으로 고통받았다. 넌 밤낮으로 쾌락에 빠져 있다. 너는 너의 인간성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필경사)을 이어받지 않고 딴 짓을 하고 있는 것 때문에 더욱 진노하고 있는 것이다.

험한 일도 시키지 않고 금이야 옥이야 키우면서 그저 공부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아버지….

그리고 그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들…. 어쩌면 그렇게 오늘날의 ‘아버지와 아들’과 똑같을 수 있을까. 무려 3700년 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되는 싸움일 터….  

최초의 대학(大學) 글자를 새긴 상나라 때 갑골문. 대학에서 제사를 지낼 지를 묻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양동숙 교수의 <갑골문해독>에서

■교육의 시작은 체벌?
그렇다면 동양에서 학교는 언제 탄생했을까.

<예기> ‘내칙’은 “‘우하은주(虞夏殷周)’ 시대에 상(庠)·서(序)·학(學)·월교(月交)라는 학교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 학교의 기원은 우순(虞舜)시대, 즉 순임금 때인 기원전 2255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뜻이다.

당시의 학교를 뜻하는 ‘庠’은 갑골문의 구조로 볼 때 음식물을 그릇에 담아 양(羊)에게 주는 형상이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는 ‘상은 노인을 봉양하는 곳(養老之也)’라고 풀이했다.

그러니까 원시사회에서는 아마도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이 양과 같은 가축을 기르는 농장을 지켰고, 자연스레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겸했을 것이다. 그것이 교육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교의 존재가 확실하게 보인 때는 은(상)나라 시기(기원전 1600~1046)이다.

<상서> ‘다사’에는 “그대 은나라 조상들에게는 전적이 있었다(惟爾知惟殷先人有冊有典)”는 기록이 있다.

갑골문자를 만든 문명인이었으니 당연히 그 갑골문으로 책을 만들었을 것이다. 또 수메르인들이 설형문자를 창조함으로써 학교가 탄생했듯 은(상)도 갑골문의 창안과 함께 학교가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설문해자>를 보면 ‘학(學)’은 ‘가르칠 효(斅)’로 나타나는 데 이는 매를 맞아가며 배운다는 의미이다. 교(敎)자도 갑골문에서는 모두 손에 매를 들고 아이를 가르쳤던 형상을 나타낸다.

그러고 보면 수메르인이나 은(상)사람들이나, 학교체벌은 인지사정이었나 보다.

하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르치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속이 터져 주먹이 먼저 나가고, 매를 들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갑골문에서 보이는 ‘학(學)’자의 형상 가운데 ‘효(爻)’가 있다. 爻는 셈가지를 교차시켜 놓은 숫자의 개념이기도 하고, 역(易)의 육효(六爻), 즉 점괘의 6개 획을 의미하기도 한다.

숫자는 사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기 전부터 심볼의 형태로 창조됐다. 곡물과 가축사육의 순환과 이동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인류가 제일 먼저 만들어낸 개념이 바로 숫자였으니까….

■학교는 언제 세워졌는가.
그러니까 爻라는 문자가 가르치고 훈련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인류가 맨처음 했던 교육이 아마도 산수와 수학교육이었음을 암시한다.

갑골문은 기본적으로 왕이나 귀족들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점을 친 뒤 점의 내용과 결과를 거북등이나짐승의 뼈에 써놓은 글자이다. 학교와 관련된 갑골문도 상당수 나온다.

“도성 내에 학교를 세우려는데 순조로울까요?(作學于入若)”
“기라는 사람으로부터 용이라는 악기를 학교로 들여올까요?(入學 自夔 庸至 新)”
“오늘 정유일에 만이 가르칠까요?(今日丁万其學)”

두번째 문장의 ‘용(庸)’이라는 악기는 대종(大鐘)이다.

또 세번째 문장에서 보이는 ‘만(万)’이라는 사람은 은(상)나라 때 전문 악사 조직의 일원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갑골문은 은(상)때 이미 전문적인 음악교육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위의 갑골문은 도성내에서 학교를 세우려는데 순조로운지 점친 내용이다. 아래 갑골문은 악기인 용(대종)을 학교로 들어와도 좋은 지를 점친 것이다. 음악교육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 |양동숙 교수의 <갑골문 해독>에서

■대학은 상나라의 제도
학교의 역사는 수메르와 견줄 때 뒤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大學)’의 역사 만큼은 중국도 당당히 명함을 내밀 수 있다.

기원전 1600년 무렵에 중국 중원을 차지한 상나라가 바로 대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상나라 ‘대학’의 존재는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기록돼있다.
“제후는 천자가 백성을 가르칠 것을 명한 후에야 학교를 세운다. 소학은 공궁의 남쪽 왼편에 세우고 대학은 교외에 세운다. 천자의 대학은 ‘벽옹(피雍)’이라 하고 제후의 대학은 ‘반궁(반宮)’이라 한다.”

그런데 후한시대 유학자 정현(鄭玄·127~200)은 이 대목에서 ‘학교의 역할’에 대한 주석을 달았다. 

“임금은 이 학교에서 조화를 높이고 밝히며 도예를 익혀서 천하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통달하여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정현은 이어 재미있는 주석을 단다.

이 <예기>에 나오는 ‘소학과 대학’은 “은(상)의 제도”라고 못박은 것이다. 하기야 공자도 “주나라는 은(상)의 예의와 제도를 이어 받았다”(<논어> ‘위정’)고 하지 않았던가.

<예기> ‘내칙’을 보면 “8세 정도에 소학에 입학해서 15살 정도에 대학에 입학한다”고 했다. 또 왕후 귀족 자제들은 “예절(禮)·음악(樂)·활쏘기(射)·말타기(御)·글쓰기(書), 숫자의 개념(數) 등을 익힌다”(<주례> ‘보씨’)고 했다.

그 가운데서도 소학에서는 숫자와 동서남북의 방위, 그리고 천문역법을 익힐 수 있는 60갑자를 배웠다. 대학에서는 제사와 종교활동에 필요한 예절과 악무, 그리고 군사·전쟁·수렵을 위한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웠다.(<대대기(大戴記)> ‘보전’)  

 인쉬(은허) 유적에서는 지난 2008년 갑골문 발견 10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열었다. 갑골문 쓰기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기환 기자

■최초의 대학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은 모두 문헌상에만 나타난 기록일 뿐이었다.

1972년 12월,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에 살던 농부 장위안우(張元五)가 도로가에서 흙을 파다가 갑골 하나를 수습했다.

이곳 안양은 기원전 1300년 이후 상나라의 도읍지였던 곳이었다.

특히 샤오둔촌은 갑골이 처음 발굴됐던 곳이기도 했다. 농부는 즉각 고고연구소 안양공작대에 보고했다. 본격 발굴 끝에 5000여 점의 갑골복사가 쏟아졌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갑골문이 있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정(상나라 왕·재위 기원전 1466~1434)을 모셔놓은 제당에서 제사(심제)를 드릴까요? 대청과 제당에서 심제를 드릴까요? 대학에서 심제를 드릴까요?(于祖丁旦尋 于庭旦尋 于大學尋)”

발굴단은 유적의 연대를 은(상)의 말기 왕들인 강정(재위 기원전 1220~1199)~문정(기원전 1112~1102) 사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사를 어디서 지낼 것인지를 점치고 있는 것이다.

‘심(尋)’은 제물을 올리고 술을 뿌리는 제사의 일종이다. 양동숙 숙명여대 교수는 “왕이 적장을 제물로 삼아 드리는 제전일 것”이라고 보았다.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적장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학교에서 제사를 지냈다?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니다.  

<예기> ‘왕제’를 보면 “전쟁에 나서 죄인을 잡아 돌아오면 ‘학궁(學宮)’에서 석전제를 올리고 신문할 자와 왼쪽 귀를 벤 자의 수를 고한다”고 기록했다. 또 하나의 기록을 보자.

“천자가 장차 출정할 때는 ~조상의 사당(祖廟)에 출정의 길흉을 점치고, 학궁(學宮)에서 그 모책을 결정한다”(<예기> ‘왕제’)고 했다. 그러니까 학교는 학문을 닦고 장소였을 뿐 아니라 전쟁의 모책과 같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나라의 제사를 올렸던 성스러운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예체능교육
그렇다면 누가 학생들을 가르쳤을까. 양동숙 교수는 “왕과 귀족을 대신해서 점을 쳤던 집단인 정인(貞人)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은(상)대의 정인은 12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왕을 대신해서 점을 쳤으며, 왕실·귀족 자제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간지(干支)와 역법(曆法), 방위(方位)를 가르쳤다.

어떤 갑골문에는 미숙한 글자체로 60갑자표를 쓴 예가 있다. 중국의 석학 궈모뤄(郭末若)은 “이것은 서툰 글자형으로 보아 학생들이 연습용으로 새긴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이는 “소학에 들어가면 천문역법을 익힐 수 있는 60갑자를 배운다”는 <예기>의 기록과 정확히 부합된다.

또한 갑골문에 나오는 만(万)이나 다만(多万)은 앞서 밝혔듯이 왕실의 전문 악사로 음악과 무도(舞蹈)를 담당한 전문가들이다.

“만에게 춤을 추게 하면 큰 비가 내릴까요?(万呼舞 有大雨)”
“대왕은 만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할까요?(王其呼万奏)”

기우제를 지내며 전문악사인 만을 시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게 하면 큰 비가 내릴 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또 앞서 인용했듯이 용(대종)을 학교에 들여올 지, 전문악사인 만이 가르칠 지를 묻는 갑골문이 보인다. 이는 ‘만’이라는 사람이 학생들을 음악과 무도를 가르치는 예능교사의 역할도 했음을 보여준다. 

 2008년 갑골문 발견 100주년 학술대회에 참석한 필자가 상나라 초기 도읍지인 정저우 상성(鄭州商城)을 찾았다.

■최초의 유학

안양의 인쉬(殷墟) 화위안좡(花園莊) 동쪽에서 발굴된 갑골문이 유독 눈에 띈다.

“많은 소국들의 자제와 관리들을 불러 교육할까요?(其呼以多方子小臣其敎)”         

이 갑골문은 주변국 자제들이 중국에서 공부하는, 이른바 ‘유학(留學)의 효시’를 말하고 있다.

양동숙 교수는 “흉노가 한나라 국학(國學)에 입학시킨 것을 유학의 효시로 보고 있는 지금까지의 정설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상나라 대의 학교는 지식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나라의 원로들을 봉양하고, 국정을 논의하며,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지냈던 장소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류가 모여 사회를 이루고 문자를 발명한 이상 학교는 필요악이었나 보다. 아무리 제도를 바꾸고 분위기를 바꾼다 해도 학교는 학교…. 그랬으니 3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겨운’ 학교일 수밖에 없을 터…. 그럼 어떤가. 학교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은….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양동숙, <갑골문으로 본 상대의 교육>, ‘중국문학연구 제28집’, 한국중문학회, 2004
         <갑골문 겸 갑골문 해독>, 서예문인당, 2005
         <갑골문자>, 서예문인당, 2010
왕우신, 양승남, <갑골학 일백년>, 하영삼 역, 소명출판, 2011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가람기획, 2000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Ⅰ>, 들녘, 2009
李濟, <安陽>, 上海世紀出版集團, 2005
이기환·이형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