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내용이 소략해서 수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 <고려사>는 내용이 번잡하지만 요점이 적다. <동국통감>은 의례가 크게 벗어났고….”
순암 안정복(1712~1791)이 평생이 역작인 <동사강목>을 쓴 이유를 조목조목 밝혔다.
“그런데 이런 오류와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은 여러 역사서가 비슷하다. ~대저 역사가가 반드시 다뤄야 할 것은 계통을 밝히고(明統系), 찬역을 엄하게 하며(嚴簒逆), 시비를 바르게 하고(正是非), 충절을 포양하며(褒忠節) 전장(국가의 통치제도)을 자세히 하는 것(詳典章)이다.”(<동사강목> ‘자서(自序)’)
■‘평생 재야사학자’
돌이켜보면 ‘순암’이라는 이는 지금의 기준이라면 평생 ‘재야 사학자’의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무려 35살(1746년)까지 독학으로 공부한 뒤에야 성호 이익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과거시험은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38살이 돼서야 스승(이익)의 천거로 동몽교관(초등학교 교사)이 됐고, 그 해 능참봉(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묘)에 제수됐을 뿐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역사에 푹 빠져 살았다.
‘사벽(史癖)’, 즉 ‘역사마니아’였던 것이다. 반면 ‘문사(文詞)’는 멀리 했다. 글 짓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제왕의 학문은 문사를 귀하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했다. 시나 산문이 아무리 정교해도 실학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성격도 급하고 직언을 잘했다. 이 때문에 “성품이 급하고 정밀하지 못했으며 입조심이 부족하다”고 자책했다.
상대방의 언행에 못마땅한 점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지적질’하는 버릇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오랜 친구 정수연이 안정복과 헤어지는 자리에서 ‘장중(莊重)’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갔을까. ‘까칠하게 굴지 말고 성질 좀 죽이라’는 충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0대들어 자주 혼절하고 언어장애까지 일으키는 희귀병에 걸려 유서를 3번이나 썼다.
그러면서도 “주자의 필법에 따라 잘못된 역사서를 바로잡고 역사가의 대법에 뜻을 갖춘 강목필법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 스승 이익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격려했다. 명재상 채제공은 “문인 안정복이 마침내 믿을만한 역사서 한 질을 냈다”고 평가했다.
순암의 <동사강목>은 한마디로 주자의 <통감강목>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강(綱)’은 시간의 선후에 따라 서술한 역사적 사실의 요강이다. 큰 글자로 쓴 표제의 기능을 갖추고 간단명료하게 요점을 제시하는 동시에 기자의 포폄도 포함돼있다. ‘목(目)’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주자는 “역사서에는 난신적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엄정한 포폄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인가.
주자의 <통감강목> ‘범례’에는 주-진(秦)-한-진(晋)-수-당 등 단지 몇나라만을 정통왕조로 취급하고 있다. 나머지는 열국·찬적·건국·무통·불성군·원방소국 등 7가지로 분류했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의 여후와 왕망, 당나라의 무측천 등은 왕위를 찬탈한 ‘찬적’으로 분류했다. 정통과 비정통의 구분을 엄격히 함으로써 강상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정통, 위만은 찬적
순암도 <동사강목>의 첫머리에서 “계통은 역사가가 책의 첫머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의리”라고 강조했다.
그가 그린 우리 역사의 정통계보는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문무왕 9년(669년)부터의 신라-태조 19년(936년)부터의 고려-조선’였다. 정통으로 볼 수 없는 왕조는 ‘무통·참국·도적·소국’ 등으로 분류했다.
순암은 단군조선의 영역을 ‘요동~한강 이북 사이’로 보았고, 단군을 동이족의 한 분파로 여겼다. 또 ‘처음으로 문물을 일으켜 신성한 정치를 한 기자(箕子)’를 정통으로 여겼다.
그러나 ‘위만’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찬적’으로 폄훼했다. 순암이 기자를 정통으로 삼은 까닭이 있다. 기자가 ‘홍범구주’(세상을 다스리는 9가지 도리)에 따라 신성한 교화의 정치를 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위만은 바로 그 기자조선의 왕위를 찬탈했으니 ‘찬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만이 중국인이니 찬적의 예로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이 말은 잘못이다. 조선이 항복한 위만을 박사로 임명했으니 그는 조선의 신하가 된 것이다. (조선의 신하로서 배신한 위만을 두고) 단군·기자와 함께 삼조선으로 칭하다니….”(<동사강목> ‘제1상’)
■마한이 적통, 삼국시대는 무통인 까닭은
순암이 위만조선 대신 마한을 적통으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만의 반란으로 남쪽으로 달아난 (기자조선의) 준왕이 마한을 공파하고 금마군에 도읍했다”는 기원전 192년을 ‘마한왕 기준 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기자의 제사를 기자의 후손인 기준(준왕)이 이었으니 적통이라는 것이다. 순암이 본 마한의 정통기간은 기준 원년(기원전 192년)~온조 27년(기원후 9년)까지 202년이다. 왜 기원후 9년(온조왕 27년)인가. 백제 온조왕의 마지막 공격으로 마한의 원산과 금현이 항복한 때를 마한의 멸망연도로 본 것이다.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의 적통만을 인정했으므로 위만조선과, 마한 멸망 전인 기원후 9년까지의 초기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은 ‘참국’으로 분류됐다.
또 하나, 마한 멸망 이후(온조 28년·기원후 10년)부터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까지의 삼국시대를 ‘무통’으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삼국이 팽팽한 접전을 벌였던 시기니 만큼 ‘무통(無統)’ 즉 ‘정통이 없던 시기’라는 것이다. 또 재미있는 것은 고려 태조 원년(918년)~후삼국 통일(936년)까지의 고려 18년을 ‘참국’으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왕건이 ‘도적’인 궁예의 부하였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정통’인 신라가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야 ‘겨우’ 정통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순암의 고증은 엄정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두고 “한스러운 것은 문헌수집의 길을 열어 총명을 넓힐 줄 모르고 다만 부족한 그대로 간략함에 그치고 말았다”고 비판할 정도였으니….
■요동과 두만강 이북을 거론한 이유
물론 순암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이 100% 옳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역사와 역사인식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아닌가. 순암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예컨대 순암은 <동사강목>의 ‘강역연혁 고정’에 조선 8도 외에 국경 밖의 요동·영고탑 연혁을 별도로 기록해두었다. 왜 그 당시에는 이미 남의 나라가 된 요동과 영고탑을 기록해 둔 것일까. 순암은 그 연유를 분명히 밝혀두었다.
“~(동이의 옛 땅인) 요동을 회복하지 못해 압록강이 커다란 깰 수 없는 경계가 되어 마침내 천하의 약한 나라가 되었구나. 애석하다.”(<지리고> ‘요동군고’)
요동이 천하를 다투는 요충지인데, 세 차례의 수복 기회(통일신라 문무왕 때, 고려 태조 때, 조선 태조 때)를 모두 잃었음을 한탄한 것이다.
‘영고탑’ 즉 두만강 이북땅을 특별히 언급한 까닭은 무엇인가. 순암이 백두산정계비를 두고 한 말을 살펴보자.
“숙종 임진년(1712년), (청나라) 목극등이 와서 백두간 꼭대기에 돌을 세워놓고 두 나라의 경계로 삼는다고 기록했다. 분계강은 두만강 북쪽 300여 리에 있는데 그 때의 당국자들이 깊은 생각없이 공공연히 그곳을 버려 이제 야인의 사냥터가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순암집> 권7)
이것이 <동사강목> 수권의 ‘지도’에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표기하면서도, 그 북쪽에 영고탑과 분계강(分河)의 위치를 분명히 그려놓은 이유이다.
“강역과 경계는 나라에서 반드시 자세하게 해야 할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어두워 잘못이 많으니 만약 사변을 당하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개탄할 노릇이다.”
■역사가의 자세
순암이 ‘고토(요동·영고탑) 수복’을 외치며 “당장 쳐들어가서 되찾아와야 할 땅”이라고 대책없이 앙앙불락한 것은 아니다. “알 만한 것은 상고하고, 지금의 지명으로 주(注)를 달아 후인들이 연혁의 사실을 알려고 할 때 참고하도록 한다”(<동사강목> ‘웅진도독부고’)는 것이다. 즉 후손들에게 분명한 역사적 사실만큼은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300년 뒤에 펼쳐질 치열한 ‘역사전쟁’을 예견한 것일까. ‘만약’ 순암의 기록이 없었다면 한·중 역사전쟁에서 입도 벙긋 못하고 당하지 않았을까. 그의 한마디 가운데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역사가의 자세가 있다.
“사람과 사물을 평론·평가하기란 매우 어렵다. ~경솔하게 서툰 평을 가하는 것은 사가(史家)의 신중한 뜻이 아니다. ~삼장(三長·재능·학문·식견)의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저울대와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어찌 실수를 가리지 못할까.”
역사가는 ‘저울대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없으면 차라리 쓰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오죽했으면 공자님은 “의심나는 것은 공백으로 남긴다”(<논어>·위령공편)고 하지 않았던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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