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확 트이네.”
햇살이 따가웠던 2008년 9월. 청주 신봉동 유적을 떠난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과 기자는 차용걸 교수(충북대)와 함께 북쪽 평야지대를 달렸다. 한 3㎞쯤 시원한 바람을 맞고 달렸을까. 눈길을 왼쪽으로 돌리는 순간 차 교수가 외친다.
“저기가 바로 정북동 토성입니다.”
이런 곳에 토성이라니. 금강 최대의 지류인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는 이른바 까치내의 상류 너른 평야지대에 조금은 생뚱맞은 자세, 즉 사각형 형태로 조성된 평지토성이다. 강(미호천)과 접해 있고, 조성된 해자(垓子)와 입지조건….
-청주에 있는 풍납토성
성을 둘러보던 기자는 왠지 소름이 돋았다.
“이거 풍납토성, 육계토성과 비슷한 입지가 아닌가요?”
한강변에 붙어있는 풍납토성은 물론, 임진강변 파주 적성 주월리에 남아있는 육계토성과 상당히 흡사한 토성이 아닌가.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라는 것이 이제 정설로 굳어졌지만, 육계토성의 경우도 초기 백제 때 초축한 성이라는 설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한강·임진강변에 조성된 한성백제기 토성과 흡사한 성이 금강 지류인 미호천변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토성 뒤편 멀리 우암산성과 상당산성이 있는데, 이것은 풍납토성을 품에 안고 있는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을 연상케 합니다.”
정북동 토성과 관련해서는 후백제 견훤이 상당산성을 빼앗아 성문 바깥 까치내 곁에 토성을 쌓은 뒤 창고를 지어 세금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상당산성 고금사적기’·1744년)
그런데 충북대박물관이 1997년부터 토성을 정식 발굴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진다.
“성벽의 잔존 높이는 5.5m(외부), 3.5~4m(내부)였고, 성벽의 총 둘레는 675m 정도됐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었어요. 정북동 토성의 축조기법을 살펴보니 백제 풍납토성과 흡사하지 않겠어요?”
즉, 나무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판자를 댄 뒤 그 속에 흙을 단단하게 다져 축조해나가는 판축(版築)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백제토기편이 출토되는데, 중요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에 백제시대 때 축조한 해자를 완전히 메우고 건물지를 조성한 흔적이 나오는 겁니다. 한성백제 때 축조된 토성이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러 성의 기능을 잃고 다른 목적으로 활용됐다는 증거죠.”(차용걸 교수)
그랬다가 전설에서처럼 후삼국 시대 견훤이 토성을 다시 쌓고 창고로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토성의 축조연대는 AD 2~3세기 무렵이다. 왜 신봉동 유적을 말하면서 정북동 토성을 갖다 붙이는가. 신봉동에 묻힌 백제 철기군의 위용이 신봉동 고분의 축조시기인 4~5세기 때 홀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의 실마리를 잡기 위함이다.
-동북아 철기교역의 주역
이미 청주와 충주 일대에는 정북동 토성을 비롯, 수많은 백제 유적이 속출했다.
백제 철기군의 공동묘지인 신봉동 유적은 한성백제 최절정기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 철기제작의 전통은 뿌리깊은 것이었다. 역시 지근거리인 송절동 유적과 봉명동 유적에서도 이 지역의 철기제작 기술을 증거하는 각종 마구류(말재갈)와 철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송절동은 AD 2~3세기, 봉명동은 3~4세기, 신봉동은 4~5세기로 편년됩니다. 그런데 송절동에서도 화살촉·창·칼·끌 등 철기류가 나왔고, 봉명동에서는 중국 동북방과 고구려의 4세기대 것과 비슷한 형태의 마구류가 보입니다. 이것은 특히 가야초기의 마구류와도 일맥상통하게 됩니다.”
즉, 재갈이 움직이지 않게 양 옆에 대는 장치인 표비(표비·재갈고삐)의 이음쇠(引手)는 지금의 중국 차오양(朝陽) 위안타이쯔(袁台子)묘와 번시(本溪)의 진묘(晋墓), 안양(安陽) 샤오민툰(孝民屯) 154호 등에서 보이는 선비 및 고구려 계통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차 교수가 또 강조하는 것은 봉명동에서 나온 마형대구(馬形帶鉤·말모양의 띠고리). 이 마형대구는 봉명동에서 20점 출토됐다. 그런데 마형대구는 경기도 안성과 천안 청당동, 충남 연기, 청주 송대리, 경주 조양동, 김해 구지로 등에서도 보인다. 이것은 당대 백제가 낙동강 유역을 통해 가야와도 교역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3~4세기부터 백제가 북으로는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 및 고구려와, 남으로는 가야, 멀게는 일본과 교역해왔음을 방증해주는 것입니다. 당시가 백제의 전성기임을 이 중원권 유적들이 웅변해주고 있어요.”
-한반도 중원의 패자
그렇다면 삼국사기 등 사서를 통해 당대의 이곳 상황을 고고학 성과와 맞춰보자. 누차 강조하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않으면 우리 고대사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일본서기 등 외국의 사서만 인용할 경우 왜곡 소지가 많았음을 수없이 목도해왔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청주(淸州)는 통일신라시대 때 서원소경(西原小京)→서원경(西原京)을 개칭한 것이며, 서원은 혹은 비성(臂城) 혹은 자곡(子谷)이라 한다”고 했다. 즉, ‘서원경=청주=비성=자곡’인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보면 이 ‘비성’과 ‘자곡’이 심심치않게 등장한다.
“AD 63년 다루왕이 땅을 개척해서 낭자곡성까지 이르렀다. 이때 신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백제본기 다루왕 36년)
그러자 백제와 신라가 반목하기 시작한다. 1년 뒤인 64년 백제는 군사를 파견하여 와산성(蛙山城·보은)을 공격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보은(와산성)은 AD 1세기 때 백제-신라간 처절한 쟁탈의 요소였던 것 같다.
백제와 신라는 AD 76년까지 와산성을 두고 빼앗고 뺏기는 혈전
을 벌인다. 이 일련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백제는 이미 1세기 중엽 이후 청주를 함락시킨 뒤 지금의 보은지역인 와산성을 끊임없이 공격한 것이다. 보은은 청주에서 약 50~60㎞ 정도 남쪽에 있다. 76년 이후 백제-신라 양국의 다툼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66년 다시 등장한다.
“166년 신라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자 백제로 도망갔다. (아달라)왕이 그를 신라로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백제가 거절했다. 왕이 군사를 냈지만 백제는 성을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신라본기 아달라왕 12년조)
다시 전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0년, 백제가 신라 서쪽 국경인 원산향(圓山鄕·경북 예천)을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군위)을 에워싸니 신라장군 구도(仇道)가 막았다. 우리(백제) 군사가 짐짓 물러나니 구도가 와산(蛙山·보은)
까지 쫓아왔지만 우리(백제) 군사가 크게 이겼다.”(백제본기 초고왕 25년)
이 기록으로 추론하면 190년 무렵에는 이미 보은 지역까지 백제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는 286년, 그러니까 고이왕 53년(신라 유례왕 3년) 화친을 맺을 때까지 괴곡(槐谷·괴산)과 봉산성(烽山城·경북 영주로 비정)을 중심으로 자주 다퉜다. 하지만 공격하는 쪽은 백제였고, 괴롭힘을 당한 쪽은 신라였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왜가 신라를 침략했을 때(295년) 신라 유례왕이 “백제에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 했지만 한 신하가 “백제는 속임수가 많아 늘 신라를 집어삼킬 것이니 생각도 하지마라”고 경고했을까.
어떻든 백제-신라간 싸움은 여기서 일단락되고 554년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독차지할 때까지 260년가량 평화를 유지한다. 이 청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은 그동안 대체로 백제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 사이 백제에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영광
(전성기 구가·3~4세기)과 치욕의 역사(한성백제 멸망·475년)가 교차한다.
-근초고왕과 철정
그림 충주에서 확인된 철정(철괴).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철정을 연상시킨다
야금야금 남으로 밀고 내려온 백제는 정북토성을 쌓고 이후 절정의 철기 제작술을 발휘, 강국의 면모를 과시한다. 2세기대 이미 보은 지역까지 내려온 백제는 고이왕(재위 234∼286년) 때 최강국의 기초를 닦는다.
즉, 신라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낙랑을 치는(246년) 등 위세를 떨친다. 무엇보다 6좌평제와 16직제를 마련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발전시킨다. 마형대구(말모양의 허리띠)와 마구류 등이 쏟아진 청주 봉명동 유적이 바로 이 고이왕대부터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백제의 위세를 잘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그러나 역시 백제의 최절정기는 바로 근초고왕(재위 346~375년) 때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를 동북아 최강자로 키웠잖아요. 이견이 만만치 않지만 중국 사서인 송서(宋書)와 양서(梁書) 등 중국사서에 백제가 랴오시(遼西)지방을 공격하고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고….”(조유전 관장)
봉명동 출토 마구류와 마형대구에서 보이는 교역의 흔적은 고이왕~근초고왕대에 이르는 강대국 백제의 면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무엇보다 근초고왕은 동북아 강국의 표상이던 고구려를 빈사상태로 내몬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기병 2만을 이끌고 치양(雉壤·황해 배천)에 쳐들어왔다. (근초고)왕이 태자(근구수왕)를 시켜 지름길로 달려가 급히 쳐부수고 5000명의 목을 얻었다. 371년 정예병 3만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쳤을 때 고국원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백제본기 근초고왕 24·26년조)
이쯤해서 재미있는 자료 하나 추가. 지난 2006년 충주 탄금대 토성을 발굴한 차용걸 교수는 깜짝 놀랐다.
바로 5개씩 8묶음, 즉 40개의 철정(鐵鋌)이 확인된 것이었다. 철정은 금괴와 마찬가지로 철제품의 재료가 되는 철괴. 차 교수의 뇌리를 스친 사료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서기 신공기 46년조(366년)였다.
“사료를 보면 근초고왕은 왜의 사신에게 오색채견(五色綵絹) 각 한 필과 각궁전(角弓箭), 그리고 철정 40개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5개씩 8묶음이 40개잖아요. 우연치고는 재미있지 않나요.”(차용걸 교수)
철정, 즉 철괴의 하사는 선진국 백제=철강강국임을 마음껏 과시한 것이 아닐까. 차 교수는 바로 이 무렵, 근초고왕이 철정 40개와 함께 그 유명한 칠지도(七枝刀)를 왜왕에게 하사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3~5세기 철강강국 백제를 만든 철의 생산지는 어디일까.
“지난 2006년 철정이 나온 충주 탄금대 입구에서 4~5세기대의 제철 유적이 발견됐어요. 충주와 진천, 청주, 보은 등은 예로부터 철광으로 유명합니다.”
조유전 선생이 운을 뗀다.
“자, 고고학 자료로 한번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봉명동·신봉동에서 출토된 철제무기와 마구류를 보면 오래도록 사용해서 닳았거나 재활용한 흔적들이 보이잖아요. 시대도 고이왕~근초고왕 시기를 아우르고….”
상상은 기자의 몫.
신봉동·봉명동 유적은 청춘을 전장에서 보내고 고이왕~근초고왕 때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역전의 노병들이 묻힌 바로 그곳이 아닐까. 고구려군을 쫓아 지름길로 달려갔고, 평양성을 치던 백제 철기병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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