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아주 특이한 문화재 4점이 국가등록문화재 제792호로 등록되었습니다. 조선 임금 4명의 초상화, 즉 어진이었는데요. 등록문화재란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건설·제작·형성된 이른바 근대문화유산을 문화재로 등록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조선 임금의 초상화가 근대유산이라는 것도 그렇고, 또 그렇게 등록문화재가 된 4점의 임금 초상화를 보면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는 것도 그랬습니다.
예를 들자면 태조의 어진은 매서운 눈과 귀만 보이고, 원종(인조의 아버지·추존왕)은 왼쪽 뺨과 귀 부분이 없어졌으며, 순조는 귀밑머리와 귀만 보이고, 순종은 왼쪽 뺨과 코, 눈이 싹 다 날아가습니다. 뭐 이렇게 불에 타버린 어진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문화재로 대접해주었을까요.
1954년 한국전쟁 직후 부산 동광동 국악원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어진 등이 소실됐다. 그중 근대문화유산 자격으로 등록문화재(792호)가 된 태조 원종 순조 순종의 어진. 그나마 원종(두번째·인조 아버지·추존왕)의 경우는 얼굴 부분이 보이지만 다른 임금들의 얼굴은 다 훼손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수난 당한 임금 얼굴
사실 조선 왕조의 어진은 전란과 화재 때문에 수난을 당합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이괄의 난(1624년)-정묘(1627년)·병자호란(1636~37년)에 이어 1900년(광무 4년) 경운궁 실화까지 화를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영정모사도감을 설치했고, 모사본을 제작했답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12대왕의 어진 48점을 피란수도인 부산으로 옮겼답니다. 12대왕 48점은 태조(3점)와 세조·원종·숙종(각 2점씩), 영조(6점), 정조·순조(각 4점씩), 문조(익종·효명세자 3점), 헌종(2점), 철종(4점), 고종(9점), 순종(7점) 등이더라구요. 그래도 전란을 피해 잘 보관하겠다는 마음가짐의 발로였겠죠.
그러나 1954년 12월 26일 아침 부산 동광동에서 전기공사 청부업자의 집에서 자고 있던 가사도우미가 켜놓고 자던 촛불이 옮겨붙었습니다. 불은 판자집 290동이 불타고 1300여명의 이재민이 생기는 대형화재로 번졌습니다. 그런데 4일 뒤부터 신문기사에 엄청난 사고가 터졌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집니다.(경향신문 1954년 12월 31일)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란했던 12대왕 48점 어진의 현황.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결국 “12대 임금의 초상화(어진)과 궁중일기 등 약 4000여점 중 무려 3500여 점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후속기사(경향신문 1955년 1월 6일)가 보도됐습니다.
당시 언론에서 “부산에서는 당시 국제시장 대화재(1950년·53년)과 부산역전 대화재(1953년) 등 화재가 빈발했는데, 전쟁이 끝났으면 빨리 문화유물들을 서울로 옮기지 않고 어수선한 도심(동광동)에 이와같은 중요문화재를 보관해서 화를 불렀다”(경향신문 1954년 1월10일)고 발을 동동 굴렀답니다.
살아남은 어진 중 그래도 얼굴을 알아 볼 수 있는 온전한 것은 영조와 철종의 어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용케 1954년 화마에서 살아남은 영조 어진(보물 932호)과 영조의 21살 때(1714년·숙종 40년) 그린 ‘연잉군 초상’(보물 1491호), 1861년(철종 12년) 그린 ‘철종 어진’(보물 1492호) 등이 명실상부한 지정문화재가 됐습니다. 그래서 용안(임금 얼굴)을 그린 어진 중 국보·보물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는 1872년(고종 9년) 옮겨그린 전주 경기전의 태조 이성계 어진(국보 315호)까지 해서 모두 5점이랍니다.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연잉군 초상화’와 ‘철종 어진’은 3분의 1이 불탔지만 얼굴이 남아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죠.
1954년 12월 26일 새벽 부산 동광동의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에서 발화된 불이 삽시간에 번져 어진 등 궁중유물이 보관되어 있던 국악원 창고로 옮겨붙었다.|국립고궁박물관의 특별전 도록(<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2015년에서)
■눈치없는 신하들의 ‘팩폭’
남아있는 어진 중 그린 당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연잉군 초상 뿐인데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연잉군 초상화는 부왕인 숙종이 8개월간이나 병석에 누워있던 자신을 극진히 간호한 연잉군을 위해 그려 하사한 건데요. 연잉군 보면 눈꼬리가 올라가고 갸름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모습이죠. 앳된 얼굴이고 어떤 면에서는 다소 나약한 모습까지 풍긴답니다.
영조는 어느 임금보다 어진 제작에 힘을 쏟았어요. 51살 때인 1744년(영조 20년) 어진을 제작한 영조는 40살 때(1733년·영조 9년)의 어진을 가져오라 해서 11년동안 얼마나 늙었는지 품평회를 했답니다.
경향신문 1954년 1월 6일자. 54년 12월26일 화재로 12대 왕의 어진 48점과 궁중일기 등 3500점이 소실되었다고 보도했다.
영조는 신료들에게 “가까이 와서 보라”고 권하고, 특히 시력이 나쁜 도화서 화원 장득만(1684~1764)에게는 “안경 쓰고 자세히 보라”고 권했습니다. 아 그랬으면 “어쩌면 그렇게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시냐”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도 시원치않을 판에 장득만과 우의정 조현명(1690~1752) 등이 한다는 소리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지금의 용안이 옛날 모습과 다릅니다.”(장득만)
“진짜 그러하냐”(영조)
“크게 다르고 말고요. 수염과 머리카락은 물론 성상의 안색도 옛날 어진의 모습과 다릅니다.”(조현명)
임금이 웃으면서도 볼멘소리를 던졌습니다.
“아니 경들은 항상 날 두고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러나 그치지 않고 ‘팩폭’을 터뜨린 장득만의 한마디가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지금 임금의 용안은 수염이 세어 하얗게 변했고, 인색도 많이 좋지않습니다. 전에는 홍조를 띠고 윤기가 있었는데….”
어째 그렇게들 눈치가 없는지 원…. 이 일화는 <승정원일기> 1744년(영조 20년) 8월 20일자에 나옵니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51살 때의 영조 어진(보물 932호)은 1900년(광무 4년) 당대 일류 화가들이 1744년 당시의 원본을 보고 그대로 그린 건데요. 안타깝게 원본은 불에 타서 소실되었답니다.
1954년 화재에서 그나마 상태가 좋은 어진들. 영조(51살 때^왼쪽^보물 932호) 어진과 영조의 21살 때인 연잉군 초상화(가운데^보물 1491호), 그리고 그나마 얼굴이 식별되는 철종 어진(보물 1492호). 이 세 점의 어진은 모두 보물로 대접받고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아니 왜 (사대부인) 저에게?”
어진 그리기를 즐겨한 영조 시대의 일화를 또하나 볼까요.
1748년(영조 24년) 2월4일 영조 임금의 어진을 그리던 화가들이 임금의 얼굴을 감히 우러러보지 못한데다 너무 긴장을 한 탓에 자주 실수했데요. 영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대요. 그러자 대신들은 사대부인 조영석(1686~1761)이 초상화를 기막히게 그린다“고 추천했습니다. 영조가 당장 조영석을 불러 ‘한번 그려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조영석은 딱잘라 “아니된다”고 거절했습니다.
“<예기> ‘왕제’에 ‘기예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사대부의 반열에 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용렬하고 비루하지만 어찌 기예로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조영석은 그러면서 “도화서는 뭣하러 설치했냐. 어진을 제작하려고 설치한 것 아니냐. 왜 사대부인 저에게 그걸 맡기느냐”고 거절해버린 겁니다. 영조가 기분 나빠했고, 대신들도 “조영석의 거절이 외람스럽다”면서 처벌을 촉구했지만 그냥 넘어가고 말았답니다. 조영석은 전문화가들의 초상화를 감수하는 역에 맡는데 그쳤답니다.
일제강점기 화기 김은호가 세조 어진을 그리기 위해 1735년 제작된 세조 어진을 토대로 작성한 초본. 이 초본을 바탕으로 어진을 모사했지만 1954년 부산 동광동 화재로 완성본은 소실되고 초본만이 남아있다가 국립고궁박물관이 경매를 통해 구입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피의 군주’ 세조의 어진 초본
또하나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 2016년에 피의 군주라는 세조의 어진을 그린 초본을 경매에서 구입해서 공개했는데요. 이 세조 어진은 화가인 김은호(1892~1979)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이왕직의 의뢰를 받아 1735년(영조 11년) 제작된 세조 어진의 모사본을 토대로 옮겨 그린 초본이라는데요. 김은호가 그 초본을 토대로 완성한 어진은 1954년 부산 화재로 사라졌는데, 초본이 남아있다가 국립고궁박물관 수중에 들어간거죠.
그렇다면 그렇게 몇번씩 모사한 어진인데 세조 얼굴이 남아있을까요. 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김은호가 왜곡하지 않았다면 세조의 원 모습을 빼닮았을 거라 하네요.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옛 사람들은 ‘터럭 한올이라도 다르면 내가 아니라는(一毫不似 便是他人)’ 정신으로 초상화를 그렸다고 했잖습니까.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은 더 말나위가 없었겠죠.
1900년(광무 4년) 4월 경운궁(덕수궁) 선원전에 보안하려고 태조 어진을 모사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이다. 그러나 이 태조 어진은 제작한지 4개월만인 8월 선원전 화재로 다른 어진들과 함께 소실됐다. 이듬해인 1901년 새로운 어진이 제작되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내 초상화 당장 불태워라!“
이렇게 ‘털끝 하나도 잘못 그리면 부모(임금)가 아니’라는 의식 때문에 몇몇 임금들은 초상화 그리기를 매우 꺼렸답니다. 인종의 경우 생전에는 물론 죽은 뒤에도 그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답니다.
태종은 어떠했는가. 효성이 지극한 세종 임금은 상왕인 아버지(태종)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는데요. 정작 주인공인 태종은 완성된 초상화를 보고는 “당장 불살라버리라”고 명했답니다.
“‘만일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다면 내 자신이 아니다(若有一毫未盡 卽非吾親)’라는 말이 있어요. 주상! 이 초상화는 불태우는게 좋을 것 같아요.”(<세종실록> 1444년 10월22일)
그러나 아들인 세종은 이미 그려진 아버지의 초상화를 불태울 수 없어 그냥 남겨두었답니다. 그런데 그 날짜 실록에는 “계해년, 즉 1443년(세종 25년) 세종 자신과 소헌왕후(세종의 부인·1395~1446)는 물론 아버지(태종)와 할아버지(태조)의 어진까지 그려서 선원전에 봉안했다”고 기록했어요. 당시 태조의 어진은 경상·전라·함길·평안도에 있는 것을 다 모셔다가 다시 그린 것이고, 선원전도 다 새로 중수했는데, 아름답고 화려함이 극치에 달했다고 설명해놓았습니다.
■국모의 얼굴을 그린다?
소헌왕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고려 공민왕 부부의 초상화처럼 조선시대에도 임금 부인, 즉 왕후의 초상화도 그렸을텐데 어땠을까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1695년(숙종 21년) 7월27일 숙종이 전 응교사대부 화가인 김진규(1658~1716)에게 “중전(인현왕후 민씨)의 초상을 그리라”고 명했어요.
그런데 김진규는 물론이고 다른 신료들까지 “신하가 감히 왕비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다”고 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숙종은 “정 그러면 종친인 임창군 이혼(?~1724)과, 중전의 오빠인 민진후(1659~1720)까지 곁에 머물면 되지 않겠냐”고 달랬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신료들의 반대가 수그러들지 않았답니다, 결국 ‘왕비 초상화’ 건은 무산됐습니다.
내외법이 철저했던 시절, 여인, 그것도 국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더구나 왕실의 종친과 중전의 친오빠까지 두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상황이라니 어떤 화가가 제대로 붓을 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소헌왕후 초상화는 그렸다니까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봐요.
이렇게 임금들의 초상화는 고려 조선을 통틀어 거의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고려 임금들의 초상화는 조선조 세종이 불태웠고, 조선 임금들의 초상화는 잇단 전란과 화마 때문에 역시 불에 탔죠. 지금 이 순간 21살 때 얼굴과 51살 때 얼굴이 남은 영조의 어진을 보면 어떻습니까. 놀랍도록 비슷하지 않습니까.
만약 고려·조선의 역대 임금 초상화가 남아있었다면 그야말로 숱한 이야깃거리와 연구거리가 생겼을텐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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