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은 쏘지 않는게 군자의 도리니라.”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왕실의 군사적 노력과 군사의례를 소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3월1일까지 열린다는데요. 저도 다녀왔습니다. 흔히 조선을 ‘문치의 나라’여서 ‘문약’에 빠졌다고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조선은 무치도 겸했다, 뭐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특별전이라는데요.
■신궁의 솜씨를 자랑한 정조
전 전시품 중 특히 눈에 띄는 유물 한 점을 소개하려 합니다. ‘고풍(古風)’이라는 유물인데요.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가 1792년(정조 16년) 12월 16일 활쏘기를 한 뒤 그 기념으로 함께 참가한 검교제학 오재순(1727~1792)에게 상을 내린 공식문서입니다. 그런데 고풍을 보면 정조의 활쏘기 성적이 나와있는데요. 점수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화살 50발 중 49발을 맞췄다고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교지연구가인 김문웅씨가 소장한 ‘고풍’ 자료를 기사로 쓴 적이 있어요. 그 자료는 같은 1792년 10월30일 역시 오재순에게 준 것이라는데, 역시 50발 중 49발을 맞췄답니다. 그런데 이 자료에는 정조의 활쏘기 성적이 아주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즉 활은 1순에 5발씩 모두 10순에 걸쳐 쐈는데요. 이날 정조의 세부점수(50발 중 49발 명중·점수는 72분)가 기록됐습니다. 과녁의 정가운데에 맞으면 2분(점)짜리인 ‘관(貫)’, 주변에 맞으면 1점인 ‘변(邊)’으로 기재했어요.
예컨대 정조가 쏜 제1순(巡)의 세부점수는 ‘변(1점)·관(2점)·변(1점)·관(2점)·관(2점)’이어서 8분(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10순까지의 성적을 계산한 겁니다. 이날의 활쏘기 성적은 <정조실록> 1792년 10월31일자에도 틀림없이 나옵니다.
한번만 그랬다면 ‘에이, 우연이겠지’ 하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아닙니다.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10~12월 사이 춘당대에 출근하다시피 해서 활쏘기 행사를 벌입니다. 박제가(1750~1805)의 ‘임금 활쏘기 기록(御射記)’을 보면 10월 30일 이후 12월 22일까지 50발 중 49발을 맞춘 회수가 10회에 이릅니다.(<정유각집>) 심지어 12월27일에는 10순이 아니라 20순, 즉 화살 100발을 쏘아 98발을 맞추는 기염을 토했으니까 이것까지 치면 ‘49발 명중’은 12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하죠. 50발 중 퍼펙트 기록(50발 명중)은 없고 매번 49발로 끝났으니 말입니다. 왜 번번이 한 발이 빗나갔을까요. 여기서 김문웅씨의 ‘고풍’을 봅시다. 마지막 제10순째의 경우 4발만 쏘고 마지막 한 발 자리는 공란으로 비워뒀죠.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답니다.
즉 정조는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으며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홍재전서>)거나 “활쏘는 사람들의 예법은 본래 1발을 빼고 49발을 쏘는 것”(<정조실록>)이라고 했답니다. 박제가는 “다들 ‘임금의 활쏘기 솜씨는 하늘이 내린 것이며, 50대를 쏘는데 번번이 1대씩 빠뜨린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 입을 모았다”고 전했습니다. 박제가는 한술 더 떠서 “문무를 겸비한 우리 성상(정조)은 백왕을 뛰어넘으셨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습니다.
■암살위협에 시달린 정조의 선택
신기하죠. 모두들 정조라 하면 밤새도록 책만 읽고, 보고서만 읽은 공부중독, 일중독의 군주로 알고 있는데…. 이런 반전이 있을까요. 보시다시피 정조는 절대 문약(文弱)에 빠진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즉위하면서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寡人思悼世子之子也)”(<정조실록> 1776년 3월 10일)라고 선언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쏙 빼닮아 무인기질을 이어받았던 것 같아요. 그 사도세자 역시 북벌론을 개진하며 국방력을 키운 효종(재위 1649~1659)을 특히 닮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례로 1736년(영조 12년) 당시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를 보고 조현명(1690~1752)은 “저하(邸下·사도세자)가 효종의 모습을 매우 닮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종묘 사직의 끝없는 홍복”이라고 치켜세운 바 있어요.(<정조실록> 1789년 10월7일자 ‘장헌대왕’ 지문)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무예 및 군사놀이에 심취했고요. 15~16살 때 이미 힘깨나 쓰던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한 청동칼과 쇠몽둥이를 들고 자유자재로 돌렸답니다. <정조실록>을 보면 “효종도 무예를 좋아해서 틈마면 마상 무예를 시험하곤 했다. (사도세자도) 활쏘기에 능해 과녁에 쏘면 반드시 목표를 정확히 맞혔고, 말타기에도 능해 고삐를 잡으면 사나운 말도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장헌대왕 묘지문’)고 했어요.
효종-사도세자로 이어지는 재능을 고스란히 받았고, 또한 세손 시절부터 살해 위협 속에 살았던 정조로서는 무예를 닦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정조의 세손시절 일기인 <존현각일기>를 보면 “적도와 역당들이 흉모를 빚어내어 위태롭게 만드니…밤낮으로 좌우에서 몰래 엿보는 무리 때문에…난 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했다”(1775년 윤10월5일)고 토로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즉위했지만(1776년 3월) 살해위협이 줄어들기는커녕 실제 암살미수사건까지 벌어졌잖아요. 즉위한지 1년 4개월 후인 1777년(정조 1년) 7월 28일 밤 정조가 책을 보고 있던 존현각(정조의 침전)의 회랑 위를 따라 자객이 침입했거든요.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는데…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회랑 위를 따라 울려왔고…기와 조각과 모래를 던져 쟁그랑거리는 소리가 나서…”(<정조실록>)
어떻습니까. 정조가 무예를 닦을수밖에 없었겠죠.
■활솜씨는 가문의 법도
그런데 정조가 활솜씨를 자랑하면서 재미있는 한마디를 얹죠. 즉 “원래 활쏘기는 가문의 법도였다”면서 “20여년간 활을 놓았는데, 성조(聖朝·태조 이성계)의 크신 업적에 감흥이 일어나 화살을 다시 쏜다”고 갑자기 태조 이성계를 ‘소환’한 겁니다.
사실 정조의 화살 실력은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 1392~1398)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 할 수 있죠. <태조실록>을 보면 이성계의 활솜씨는 그야말로 신출귀몰, 그 자체입니다. 화살 한발에 까치 5마리가 떨어졌다는 기록도 있구요. 화살 한발이 노루 두 마리를 꿰뚫고는 풀명자나무에 꽃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또 고려 공민왕(1351~1374)이 은거울 10개를 80보 밖에 두고는 신하들에게 경쟁을 시켰답니다. 조선시대의 척도로 1보가 120㎝ 정도 되므로 80보라면 96m에 이르는데요. 태조는 이 은거울 10개를 모두 맞혔다네요.
고려 우왕(1374~1388) 때의 일입니다. 50보(60)m 거리를 두고 주발크기로 큰 과녁을 만들고, 그 가운데 은(銀)으로 작은 과녁을 만들어 복판에 붙였답니다. 지금으로 치면 10점 골드 안에 ‘퍼펙트 골드(X점)’ 과녁을 더 만든 건데요. 그 X과녁의 직경은 2치(6㎝)였답니다. 이성계는 정확히 그 X과녁에 화살을 명중시켰데요. 우왕은 이성계에게 말 3필을 하사했다는군요.
한번은 이성계가 우왕과 함께 사냥을 나서서 “오늘 짐승을 쏠 때 등골을 맞힐 것”이라고 약속했데요. 평소 짐승을 쏠 때는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는데, 이날만큼은 등골을 쏘겠노라고 예약한 것이었다는데요. 과연 이성계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등골을 명중시켰다는군요.
■소년장군 아기발도의 투구꼭지를 쏘다
역사적으로 가장 장 알려진 활솜씨는 1380년(우왕 6년) 왜구와의 전투로 유명한 황산대첩 때 유감없이 발휘돼죠. 왜병의 기병과 예병이 급습하자 화살 50대를 잇달아 쏘아 적군의 얼굴에 명중시켰답니다. 특히 15~16살에 불과한 왜장 아기발도는 매우 용맹했고,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에 감쌌기 때문에 빈틈이 없었다는데요. 이성계가 “투구의 정자(頂子·꼭지)를 쏘겠다”고 예약한 뒤 한 치의 실수없이 두 발을 맞히자 투구가 떨어졌답니다. 그러자 이성계 휘하의 부하인 이지란(1331~1402)이 아기발도를 쏘아 쓰러뜨렸다는군요.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도 대단한 활솜씨를 자랑했는데요. 1385년(우왕 11년) 왜구 침입 때 이방원은 화살로 적군 20여 명을 사살했고요. 세조(재위 1455~1468)도 16살 때 사슴과 노루 수십마리를 사냥했답니다. <세조실록>에는 “바람에 짐승의 털과 피가 날려 옷을 붉게 물들였다”고 기록돼있어요. 한 개의 화살로 6마리를 죽인 것이 세번이고 5마리를 죽인 것도 4~5번이었다니 대단한 실력이죠.
■퍼펙트골드의 신궁들
뭐 신궁이라면 동방의 명궁이자 전설상의 인물인 예가 멋대로 떠오른 태양 9개를 화살로 떨어뜨렸다는 전설이 있죠(<산해경> <회남자>). 예의 후예인 고구려 동명왕(주몽·기원전 37~기원전 19)은 어떨까요. 졸본천에 나라를 세운 주몽이 비류국왕인 송양과 맞서서 활쏘기로 승자를 가렸죠. 이때 두사람은 사슴을 그려 100보 안에 놓고 쏘았다다는데요. 주몽은 옥반지를 100보 밖에 두고 쏘았는데 화살을 맞은 옥반지가 기와 깨지듯 부서졌답니다. 거짓말 같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을겁니다. 여러분은 1996년 8월1일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에 출전한 김경욱 선수가 양궁 여자개인 결승에서 ‘퍼펙트 골드’를 기록한 사실, 기억하시죠. 당시 기사를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TV화면이 뻥 뚫렸다. 가운데 과녁에 박힌 화살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10발 가운데 2발이 과녁의 정가운데 숨겨놓은 POV(Point of view) 카메라를 정통으로 맞힌 것이다.”
70m 거리에서 직경 12.2㎝의 10점 과녁, 그것도 정가운데 점인 정곡(正鵠·퍼펙트골드)을 맞힐 확률은 1만2500분의 1일이라 하죠. 그런데 그 퍼펙트골드를 두 번이나 맞혔다니…. 그뿐이 아니구요.
그보다 2년 전인 1994년 6월12일에는 남자양궁의 한승훈 선수가 청주에서 열린 제1회 국제양궁대회 30m 예선에서 360점 만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답니다. 36발 모두를 10점 과녁에 명중시킨 건데요. 10점 과녁의 직경은 장거리(70·90m) 12.2㎝, 단거리(30·50m) 8㎝인데요. 한승훈이 쏜 36발 가운데 단 2발만 10점 라인에 걸쳐 있었을 뿐이었답니다. 나머지 34발은 안정적으로 직경 8㎝인 10점 과녁 안을 뚫었구요. 특히 ‘골드 중의 골드’를 뜻하는 ‘X(직경 4㎝)’ 안에 무려 22발이 꽂혔어요. 표적지를 보면 한 점처럼 보이는 곳이 5군데나 있었습니다. 화살 위에 화살이 꽂혔다는 얘기죠. 양궁 역사상 100년 만에 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에 세계양궁 관계자들이 기립박수를 쳤답니다.
■무용총 궁사의 신묘한 솜씨
전설의 명궁이라는 ‘예’에 문자 그대로 ‘신화의 존재’이니 그렇다 칩시다. 주몽이나 이성계, 태종, 정조 등의 활솜씨는 어떻습니까. 과장의 냄새가 물씬 풍기죠?
하지만 무용총과 같은 고구려 벽화고분의 예를 봅시다. 맨 위에는 기마무사가 몸을 돌려 사슴을 쏘죠. 내닫는 말 위에서, 그것도 몸을 반대방향으로 돌려 활을 쏘는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흰 말에 화려한 복장을 갖춘 것을 보면 왕·귀족이 분명하죠. 말을 타고 달려 달아나는 호랑이를 쫓으며 활을 쏘는 장면도 있어요. 호랑이는 오랫동안 쫓겼으면 입을 크게 벌린, 지친 모습일까요. 그뿐입니까.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활솜씨를 자랑한 김경욱·한상훈 같은 신궁이 진짜 존재하잖습니까. 그러니 섣불리 역사인물들의 활솜씨를 가짜니 과장이니 하면서 폄훼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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