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하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뭍 사람들에게는 로망이지요.
뭔가 세파에 찌들어 살고 있는 육지 사람들은 한번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도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곤 하지요. 최근에는 가수 이효리씨가 세상 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한껏 부러워하게 되지요.
얼마나 부러우면 제주도 여행가서 굳이 이효리씨의 집을 찾아가는 분들도 있다면서요. 뭐 제주도까지 가서 남의 사생활을 훔쳐볼 필요가 있습니까. 그보다 훨씬 의미있는 곳들도 많은데….
화산섬 제주도의 풍치는 말하지 않아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을 어떨까요. 지금으로부터 1만년전의 제주도를 가보는 그런 여행 말입니다. 제주도야 말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연결하는 이른바 ‘경계인’이 살았던 곳이거든요. 그 이들의 흔적이 제주도 고산리라는 곳에 남아있습니다.
뭐 뻑적지근한 유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발고도 15~20m의 넓은 평탄대지에서 살았던 1만년 전 ‘경계인’의 체취를 한번 맡아보면 어떨까요. 이곳에서는 구석기 최말기의 유물과 신석기 조기의 유물이 공반되어 나옵니다. 제주도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문화상입니다. 게다가 풍치까지 빼어납니다. 그렇다면 1만년전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경계인들은 어떻게 거센 파도를 헤치고 제주도로 왔을까요. 엄청 쉬웠습니다.
왜냐면 제주도는 섬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때는 지금부터 2만~1만8000년 전입니다. 그때부터 지구는 온난화의 길을 걷게 되지요. 그 무렵 서해바다는 몇개의 강줄기가 흐르는 육지였습니다. 중국과 한반도, 제주도는 그냥 육지로 통해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빙하가 녹아 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1만1000년부터는 급속도로 차올랐습니다. 급기야 제주는 섬이 되었고, 아주 쉬운 방법, 즉 도보로 왔던 사람들은 더이상 빠져나가지 못했던거지요. 그 사람들이 남긴 문화가 바로 제주섬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밟아보는 1만년전의 세상….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5회가 할 이야기는 바로 ‘1만년전 제주도에 정착한 경계인…그들은 누구인가’입니다.
1987년 5월 어느 날.
제주도 서쪽 끝 마을인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흙을 갈고 있던 마을주민 좌정인(左禎仁)씨가 돌 두 점을 주웠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지?”
고구마처럼 생긴 돌이 예사롭지 않았다. 좌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돌 두 점을 집으로 가져갔다.
“(윤)덕중아, 이 돌들이 이상하게 생겼는데 한번 봐라.”
마을엔 제주대 사학과에 다니던 윤덕중이란 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심상치 않은 돌을 보여준 것이다. 윤덕중 학생은 이 돌 두 점을 다시 스승인 당시 이청규 제주대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이 교수는 곧 돌을 수습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다.
■농부가 찾은 1만년 전의 세계
좌씨가 주워온 것은 길이 8.5㎝, 촉 3㎝, 두께 1㎝나 되는 큰 석창(돌로 만든 창) 1점과 긁개 1점(길이 4.3㎝)이었다. 석창과 긁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제작 기법인 잔잔한 눌러떼기 수법으로 성형했다. 지표조사 결과 마제석부(자갈들을 때려 다듬은 다음 날부분과 몸통부분을 부분적으로 간 것) 1점과 각편석기 1점을 추가로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후 7개월이 지난 88년 1월, 영남대 대학원생이던 강창화씨(현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한번 조사해보고 싶었어요. 겨울 바람을 헤치고 이리저리 헤맸죠.”
이어 제주대박물관은 91~92년 겨울 약 6000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습했다. 이어 94년부터 98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이 벌어졌으며, 모두 10만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졌다.
■그들은 ‘맥가이버’였다
이쯤에서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전환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해 고산리 유적은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초기로 넘어가는 전환기, 즉 1만2000~1만년 전의 유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고고학적인 설명을 가하자면 동북아 후기 구석기의 전형적인 문화는 이른바 세형돌날문화(좀돌날문화)이다. 작은 몸돌에서 눌러 떼어낸 아주 자그마한 돌날과 긁개, 조각도, 석촉, 창끝, 양면석기, 송곳 등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동북아 후기 구석기 사람들은 손재주가 기가 막힌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들이었어다. 5㎝가 될까 말까 한 몸돌에서 맥가이버처럼 아주 다양한 도구들을 척척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1만년 전을 전후로 구석기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정착을 하게 된 사람들은 농경생활을 하게 되고 곡식 등을 저장하는 도구, 즉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게 된다.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그런 점에서 이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의 세형돌날 문화와 신석기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古土器)가 속출했고,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출현을 알리는 토기 즉 융기문 토기가 나왔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부연 설명해보자. 고산리에서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의 전통이 밴 세형몸돌, 세형돌날, 첨두기(尖頭器·끝이 뾰족한 도구), 양면 석촉(돌화살촉) 등이 속출했다. 또한 신석기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 조각도 2500여점이나 확인됐다.
“고산리에서는 특히 문양이 없는 원시 고토기 즉 식물성 섬유질이 혼입된 고토기가 전체 수량의 85% 이상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토기는 아무르강 유역의 세형돌날문화(1만1000~1만년 전)에서 보이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여명기에 출현하는 고토기와 흡사한 모습입니다.”(강창화씨)
이런 고토기는 인류가 토기라는 것을 처음 만들면서 450~600도에서 구운 저화질 토기이다. 구울 때 성형(成形)을 위한 보강재로 식물의 줄기를 섞었다. 연한 억새풀 같은 것을 짓이겨 썼다. 그런데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두개 있다.
첫번째는 이런 고토기가 한반도 본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술적으로 고산리에서 출토된 고토기를 ‘고산리식 토기’라 부르게 되었다.
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은 고토기가 제주도에서는 보일까. 두번째 수수께끼. 이런 고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8000년 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구석기와 신석기에 넘나든 경계인
사실 제주도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현상을 느낄 수 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 세형돌날문화 석기들과 고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곳, 즉 1만1000~1만년 전의 유적은 고산리 한 곳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8000년 전부터로 편년되는 융기문(덧띠무늬) 토기문화가 제주도에서 성행한다.
융기문 토기는 애월읍 고성리, 제주시 아라동, 구좌읍 대천리 등 해발 200~450m인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흔히 확인되는 유물이다. 또한 한반도와 중국 동북방에서 확인되는 지(之)자문 토기(빗살무늬 토기)도 보인다.
지(之)자문 토기는 제주도 온평리 유적과 고산리 동굴유적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지그재그형의 사선으로 짧고 깊은 문양을 보인다.
덧띠무늬와 빗살무늬 등의 토기들은 동이족의 문화를 알 수 있는 표지 유물들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확인된 강원 고성군 문암리와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희한한 것은 고산리에서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인 세형몸날문화+고산리식 고토기는 보이지만 덧띠무늬 토기는 공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8000년전부터 제주도 중산간에서 덧띠무늬 토기를 쓴 사람들과, 1만1000~1만년전 고산리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는 동떨어졌음을 의미한다.
다시 요약해보자. 지금으로부터 1만1000~1만년 전 중국 동북과 연해주 사이인 아무르 강에서 살던 사
람들이 내려와 지금의 제주도에 정착했다고 치자. 그들은 세형돌날문화와 식물성 섬유질을 보강한 고토기를 사용한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의 여명기, 즉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풍미한 ‘경계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산리 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런 뒤 융기문과 지(之)자문 토기문화의 주인공들로 교체된다. 이때가 8000년 전 쯤이다. 이후 제주도는 광범위한 동이의 문화권이 되어 문화의 연속성이 이루어지고 지금에 이른다.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한 제주도 가운데서도 고산리의 바람은 악명높다.
그렇지만 고산리의 절경은 빼어나다. 인근의 섬 비양도는 제주도에서 가장 최근인 고려 목종 10년(1007년)에 화산폭발이 일어난 곳이다.
고산리는 해발 고도 15~20m 가량의 평탄대지다. 인근 수월봉에서 바라보면 차귀도와 당산봉(해발 148m)이 보인다. 당산봉은 기생화산(오름)이다. 당산봉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중국의 상하이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중국과 가깝다.
■육지였던 서해
1만1000~1만년 전 제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세형돌날문화)~신석기 여명기(고토기문화)를 산 경계인들이었다. 출발지는? 고산리 신석기 유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강창화(제주문화예술재단)는 지금의 아무르 강 유역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식물성 고토기의 모양이 아무르강 유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을 꼽는다. 그들은 어떻게 이 머나먼 제주 땅까지 왔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1만년 전 이전엔 황해는 바다가 아니라 표고 20~30m 정도 되는 완만한 평원지대였다. 또 요동(遼東) 반도에서 흘러오는 여러 개의 강줄기가 주변 대지를 아우르고 있었다.
당시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평원이나 혹은 강줄기를 따라 남으로 향해 제주도에 닿아 정착했다는 게 강창화씨의 결론이다.
“지금으로부터 2만~1만8000년 전이 마지막 빙하기의 최전성기였습니다. 서해안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150m 아래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즉 지금의 중국 동부해안과 서해안이 하나의 육지, 즉 황토층이었다는 것입니다.”(강창화씨)
어디 서해뿐인가.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시베리아 최동단 추코카(Chukotka) 반도와 알래스카의 최서단 스워드 반도가 서로 연육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인류가 아메리카로 건너간 이곳을 베링육교라 했을까.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해수면은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고산리에 정착한 사람들은 육지였던 황해가 해수면 상승으로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는 과정에서 막차를 탄 셈입니다.”(강창화)
그렇다면 1만1000~1만년 전 사이, 즉 1000년 동안 해수면이 급속도로 상승했다는데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었을까.
물론 수렵채집생활을 했던 구석기인들은 사냥감을 찾아 하루에 최고 50㎞씩 이동했다는 분석도 있기는 하다.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는 얘기다.
“급속도로 해수면이 증가했다지만 1000년이라는 세월이잖아요. 하루 아침에 물이 불어나고 그러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물이 서서히 불어났을 겁니다.”(강창화)
■ 지구온난화가 낳은 승자와 패자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화산이 빚어낸 빼어난 절경의 제주 땅 고산리에 둥지를 튼다. 식물성 섬유질 토기와 세석기 같은 당시로서는 첨단도구를 사용하면서….
그러나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제주땅은 외딴 섬으로 고립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환경변화로 인해 고산리 사람들의 삶도 정체되고 만다. 이윽고 2000여년이 지난 BC 6000년 쯤부터 섬이 된 제주도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다.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땅을 밟기 시작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융기문 토기(덧띠무늬)와 지(之)자문 토기를 쓰는 사람들이었다.
토기에 융기문, 빗살무늬 문양을 넣을 줄 안다는 것은 문화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토기의 표면을 화폭 삼아 다양한 무늬를 덧대거나 새기거나 그린 것이다.
새로운 이주자가 도착하자 고산리 문화는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고산리식 토기와 석기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이다. 기자가 보기엔 지구온난화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남는 의문점이 있다. 고산리 사람들과 융기문 토기를 쓴 사람들은 과연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종족인가.
여하튼 절해고도가 된 제주땅을 차지한 융기문 토기인들은 왕성한 생명력과 활동력으로 제주땅을 풍미한다.
그때부터 제주도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의 문화가 이어진다. 중산간지역에 폭넓게 발견되는 덧띠무늬 토기(융기문 토기) 문화가 단적인 예다.
이후 한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파상적으로 밀려들어온다.
제주 삼양동 유적(사적 416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30여기 집자리가 확인됐고,
이른바 송국리형 주거지, 즉 뭍의 문화가 성행했음을 증거하는 마을유적이다. 부여 송국리에서 처음 확인되어 그 이름을 얻은 송국리형 주거지는 원형집자리 내부 중앙에 타원형의 구멍을 파고 기둥 두 개를 세우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이다. 강창화가 들려주는 여담 하나.
“원형 집자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예를 하나 들까요. 제주의 비바람은 유명하잖아요. 몇년 전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지붕까지 날릴 정도였는데…. 저희 재단(제주문화예술재단)이 무릉리 폐교 운동장에다 송국리형 집자리를 복원했는데, 월드컵경기장 지붕을 날린 비바람이 불어닥쳤을 때도 이 복원된 집자리는 끄떡없었습니다.”
2000년 전 기법대로 축조한 집자리는 끄떡없고 21세기 최첨단 시설물은 바람에 날아가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각설하고 제주의 송국리형 주거지는 BC 3세기를 상한으로 해서 기원전후를 중심연대로 갖고 있다. 그런데 삼양동 대형집자리에서는 옥환(玉環), 청동칼 조각, 유리환옥 등 중국 및 한반도산의 흔적이 보인다.
옥은 두말할 것 없는 발해연안 등에서 확인되는 동이문화의 원형이다. 또한 화폐도 엿보인다. 제주 산지항과 금성리 패총유적의 예를 보면 오수전(五銖錢·BC 118년부터 주조된 중국돈)과 화천(貨泉)·화포(貨布·기원 직후에 주조된 중국 돈) 등이 확인되었다.
이렇듯 고산리 유적이 담고 있는 함의는 크다.. 제주역사가 한낱 변방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 제주는 화산이 낳은 자연유산으로만 알려질 수 없다는 것…. 또 하나 무엇보다 지구 온난화라는 극적인 환경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의 지구온난화에 대비하려면 1만년 전 제주 고산리를 연구해보면 어떨까. 다만 1만년 전의 지구온난화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이었다면, 요즘의 지구온난화는 사람이 뿌린 불행의 씨앗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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