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한 아동성범죄자인 조두순이 12년형을 살고 만기출소했습니다. 영원한 사회 격리도 아니고, 이런 인면수심한 사람이 너무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는데요. 조두순의 집 근처에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은 또 무슨 죄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라면 조두순 같은 사람에게 어떤 처벌을 내렸을까요. 뼈도 못추린 조선시대 성범죄 처벌사례를 일러드립니다.
혜원 신윤복의 ‘소년전홍’. 젊은이가 앳된 여성의 손목을 잡고 있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12세 이하와의 성관계는 무조건 간음
조선시대 형법은 주로 명·청나라 형률서인 <대명률> <대청률>을 따랐습니다. 이들 형률서의 성범죄 처벌 조항은 무시무시합니다.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성을 유혹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은 교수형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이다.”(<대명률>·‘형률 범간조’)
특히 12세 이하 어린 아이를 간음할 경우를 볼까요. 1395년(태조 4년)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해서 출간한 <대명률직해> 390-2조를 보면 비록 12세 이하와의 성관계는 ‘화간’이라 해도 강간죄로 처벌했습니다.
왜냐. ‘12세 이하의 어린 여자는 아직 남녀의 정의(情意)가 생기지 않아 음심(淫心)이 없고 또 속이거나 통제하기 쉬우므로 화간의 정상이 있더라도 속임을 당한 것이기에 역시 강간과 같이 논한다’는 해석(<대청률집주>)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행 형법 제305조의 미성년자 간음 및 추행, 즉 16세 미만의 사람과 합의하에 간음하였다 하더라도 강간으로 간주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처벌은 지금보다 조선시대가 더욱 엄했습니다.
강간범은 교수형에 처했고, 강간미수범이라도 ‘곤장 100대에 유배형 3000리’를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강간 및 강간미수범을 엄하게 처벌했을까요. 간음이 윤리를 무너뜨리고, 교화를 손상시키는 중대범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처벌 조항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혜원 신윤복의 ‘청금상련’. 고위관리들이 의정부나 육조 같은 관아의 후원에서 기생이나 의녀들을 희롱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우선 <태조실록> 1398년 윤 5월16일자를 볼까요. “11살 어린 아이를 강간한 사노 잉읍금을 교수형에 처했다”는 기사가 보이네요. 또 <세종실록> 1429년 11월27일자에도 일벌백계의 처벌 사례가 나오는군요.
“칠원(함안) 사람 정경이 처녀 연이를 강간하려 밤새도록 때렸습니다. 연이가 완강히 항거하다 죽었습니다. 정경은 교수형에 처하고, 연이는 정려문을 세워 정절(貞節)을 표창하게 하소서.”
욕정을 함부로 발산했다가는 뼈도 못추릴 엄격한 형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말입니다.
성범죄는 끊이지 않았답니다. 1404년(태종 4년)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와 그들의 처남인 박질이 능지처사의 혹독한 처벌을 받습니다.
“판사(1품~3품까지의 고위직) 이자지 부부가 잇달아 사망하자 부부의 16살짜리 딸 내은이가 삼년상을 치르려 했다. 그런데 가노(家奴) 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 등 3명이 내은이를 자기 집으로 끌고가 손발을 묶었다. 내은이는 밤새도록 저항했으니 그만 힘이 빠져….”(<태종실록> 1404년 2월27일)
실구지 형제에게는 사지를 서서히 찢어죽이는 능지처참형(거열형)을 받았답니다. 교수형도 모자라 능지처참형을 당한 까닭은 실구지 형제가 삼년상을 치르려던, 그것도 상전을 겁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중처벌을 받은 셈지요.
조선시대 형법은 주로 명나라 형률서인 <대명률>을 따랐다. 강간죄는 교수형에 해당됐고, 강간미수라도 장 100대와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받았다. 12세 이하 어린아이와의 성관계 때는 ‘화간’이었다 해도 강간죄에 따라 처벌했다.
■강간미수 전직 공무원은 변방의 관노로 전락
1477년(성종 8년)12월 16일, 내은산이라는 사람은 의붓 아버지와 짜고 양녀 덕비라는 여인을 부인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덕비와 덕비 아버지가 길을 가는 것을 보고는 아비를 강제로 붙들고, 덕비를 업고 달아났습니다. 덕비는 내은산의 집으로 끌려가 강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부자가 짜고 천인공노할 짓을 지지른 겁니다. 이 사건으로 내은산은 교수형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주범이 아버지냐 아들이냐를 두고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지만 결국 양녀를 겁간한 당사자인 아들이 극형을 받은 것으로 끝났습니다.(<성종실록>)
사족(士族)의 부녀를 강간하려 한 전직 공무원은 ‘강간미수’임에도 노비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군수를 지낸 황우형이라는 인물이 그 오명의 주인공이었습니다.
황우형은 1472년(성종 3년) 한밤 중에 사족의 부녀인 반씨의 방에 들어가 강간을 하려다가 반씨의 어머니와 종이 막아서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습니다. 성종은 ‘죄질이 좋지 않다’는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황우형의 직첩(관리임명장)을 회수하고 영원히 등용하지 않으며,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내린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이 처벌 또한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황우형은 다시 변방 중의 변방인 회령의 관노(官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습니다.(<성종실록> 1472년 4월 13일)
김윤보(1865~1938)의 ‘형정도첩’ 중 교수형 장면. 강간범에게는 원칙적으로 교수형의 처분을 내렸다. |개인소장
■사면령에서도 제외된 강간죄
그뿐이 아닙니다. 강간은 모반과 같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맞먹는 중죄로 취급됐답니다.
즉 국가의 경사 때 종종 시행한 대사면령에도 강간죄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단적인 예로 성종(1469~1494)은 1471년(성종 2년) 1월24일 20살의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1438~1457)를 의경왕(훗날 덕종으로 추존)으로 추승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는데요. 그런데 사면령에서 제외되는 중죄를 나열했습니다.
“모반(謀反·역적모의)·대역 모반(大逆謀叛·다른 나라와 반역을 도모)한 것,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때린 것,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살인과 독살, 염매(사람을 죽이거나 병에 걸리게 하려고 귀신에게 빌거나 방술을 쓰는 행위)한 것과, 강간 및 강도 등은 대사면령에서 제외한다.”
강간을 대역 모반죄 및 존속살인죄 등과 같은 반열에 넣은 것입니다.
1481년(성종 12년)1월 22일 처삼촌의 조카딸을 강간한 최습은 뜻밖에 사면을 받았습니다. 5년 전인 1476년(성종 7년) 세자(연산군)가 탄생한 기념으로 내린 대사면령에 따라 용서를 해준 겁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감찰업무를 담당한 장령(掌令·정4품) 이감(생몰년 미상)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최습의 죄는 강상(綱常·삼강오륜)에 관계되므로 사면은 옳지 않습니다.”
5년 전에 내린 대사면령에 따라 강상죄를 저지른 최습을 용서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겁니다.
이에 성종 임금이 판결을 바꿉니다. “대사면령 때문에 용서한 것이다. 하지만 죄가 정말 중하구나. 그렇다면 전가사변(全家徙邊)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겁니다. ‘전가사변’이란 죄는 일족이 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하는 중벌입니다.
KBS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한 능지처참형(거열형). 사지를 찢어죽이는 극형이다. 성범죄범 중에서도 악질인 자에게는 능지처참형을 내렸다.
■성균관 유생들의 성범죄, 강간미수일까 성희롱일까
<세종실록>에 전모가 소개된 이 사건을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강간미수일까요, 성추행일까요.
1438년(세종 20년) 8월1일, 한 앳된 부인(소앙)이 평상복 차림으로 여종 2명을 데리고 성균관 옆 냇가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곳에서 옷을 홀랑 벗고 목욕을 하고 있던 생원 최한경이 갑자기 뛰어나가 소앙을 쓸어 안았습니다. 성균관 유생인 최한경 등은 성균관의 문묘(공자 등 성현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목욕재계 하던 중이었습니다. 공자 사당에 절을 올리기 위해 목욕재계하던 학생이 여인을 건드렸으니 참 한심한 작태였죠. 당연히 여인(소앙)이 완강히 항거했습니다.
여종이 “우리집 안주인이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최한경과 함께 목욕을 했던 동료 정신석이 여종들을 때려 쫓아냈습니다. 최한경 등은 완력으로 소앙을 눌러 옷을 벗기고 욕 보이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습니다.
그들은 소앙의 입자(笠子·일종의 모자)를 빼앗아 도망쳤습니다.
큰 일을 당할 뻔했던 소앙은 사헌부에 최한경을 비롯한 유생들을 ‘강간미수죄’로 처벌해달라고 고소했습니다. 유생들은 단지 “희롱을 했을 뿐 강간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세종실록>의 기사를 읽으면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최한경 등을 고소한 소앙 등의 진술이 오락가락했다는 겁니다. 처음엔 강간미수라 했다가 나중에는 단지 희롱만 당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답니다.
김윤보의 ‘형정도첩’에 묘사된 곤장(왼쪽)과 태형(오른쪽). 성희롱범에게는 이처럼 곤장과 태형의 처분을 내렸다.
■소앙 여인의 진술이 오락가락한 이유는?
<세종실록>은 이 대목에서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자못 의심했는데, 사대부 집안과 관련된 사건이어서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세종은 “들리는 바로는 단지 희롱에만 이르지 않았다고 하니 다시 진상을 조사하라”고 재수사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는 “이번 사건은 순전히 고소한 사람의 말로써 결단할 수밖에 없다”면서 “거듭거듭 조사하고 추궁하여도 소앙의 말이 오락가락해서 그 이상의 죄상을 밝혀낼 수 없다”는 주청을 올렸습니다.
결국 주범인 최한경은 곤장 80대, 공범인 정신석은 태형 40대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대명률>에 따르면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와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최한경은 강간미수와 성희롱의 경계선에서 장 80대로 마무리 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강간미수죄’로 최한경을 고소한 소앙 여인은 과연 무엇 때문에 진술을 ‘성희롱’으로 바꾸었을까요. 실록조차 ‘사대부 집안과 관련된 이야기라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했고, 세종 대왕조차도 “아니 들리는 바로는 성희롱으로만 그치지 않았다는데 다시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강간미수죄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모르긴몰라도 용기있게 ‘성균관 유생들의 성범죄’를 고소한 소앙 여인에게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앙 여인은 그 압력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진술을 바꾼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그럼에도 반만 인정됐지만 600년 전 성범죄에 맞선 소앙 여인의 분투가 실록에 기록됐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요.
자 어떻습니까. 끔찍한 아동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단 12년의 실형을 살고 나온 조두순인데요. 성희롱으로 판결이 나도 곤장 80대라는 가볍지 않은 처벌을 가했고, 웬만하면 3000리 유배형이나 변방의 관노비 전락, 일족의 강제이주라는 중벌을 내렸으며, 심하면 교수형과 능지처참형까지 가한 조선시대였다면 조두순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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