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고려 좀 배워라!” 조선의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려고 애쓰는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가슴을 쳤답니다. 왜일까요. 고려의 ‘줄타기 외교’하면 정평이 나있기 때문입니다. 즉 고려는 거란(요)-금-몽골(원)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얼음판 외교를 펼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물론 세계제국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답니다.
개성의 태조 왕건릉에 봉안된 ‘태조 왕건’ 영정(왼쪽 사진). 태조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는지는 1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속시원히 풀 수 없다. 오른쪽 사진은 이인문의 낙타도(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곡예외교의 달인인데…
뭐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죠.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이 서희(942~998)의 ‘세치혀’에 말려 280리나 되는 땅(강동 6주)을 떼주었잖습니까. 서희는 거란(요)의 소손녕이 “고구려땅은 지금 거란의 소유”라 주장하자 “우리가 고구려를 계승했기에 국호를 고려라 한 것”이라고 응수하면서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이 가로막고 있어서 거란에 조공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라고 어르고 달래 거저 강동 6주를 차지했습니다.
또 세계제국 몽골(원나라)도 강화섬으로 천도한 고려의 애간장 녹이는 줄타기 외교를 견디다 못해 재침공의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내 포기했답니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저들이 험준한 산과 강화섬에 기댄다면 100만 대군을 동원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고려 침공 불가 공론이 대세를 이뤘다고 합니다.
2008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만부교(낙타교) 터를 발굴하면서 그린 상상도. 현재 개성 동현동에 존재했던 다리이다. |‘북한 외국문 출판사의 <고려도읍 개성의 민족유산>, 2018’에서
■만부교 사건의 수수께끼
그런데 지금까지 1080년 가까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하나 있답니다. 바로 942년(태조 25년) 일어난 이른바 ‘만부교 사건’입니다.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절도에 유배시키고, 낙타 50필을 만부교 밑에 묶어 굶겨죽인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 만부교 사건은 고려 475년 역사 중 최대 미스터리로 꼽힙니다. 물론 <고려사>는 “무도한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라고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갑니다. 고려가 고구려-발해의 계승자를 자처한 고려가 고토 회복을 염두에 두고 강력한 북진정책을 천명한 의지의 발로라는 겁니다. 만약 한국사 시험 문제라면 이렇게 정답을 써야 할 것입니다.
2008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만부교(낙타교) 터를 발굴하면서 그린 상상도. 현재 개성 동현동에 존재했던 다리이다. |‘북한 외국문 출판사의 <고려도읍 개성의 민족유산>, 2018’에서
실제 고려를 건국한 태조(재위 918~943)는 만부교 사건 1년 뒤인 943년 ‘훈요 10조’를 남기면서 특히 거란을 겨냥한 조목을 2개나 포함시킵니다. 즉 “거란은 금수(禽獸)의 나라이고(4조), 강하고 악한 나라 이웃(거란)는 늘 경계하라(9조)”는 것이었습니다.
태조 왕건 이후 700년 정도 뒤인 조선 후기 이익(1629~1690)은 <성호사설>에서 ‘태조 왕건’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즉 “거란이 후백제 견훤(재위 892~935)을 꺾고 위명을 떨친 고려 태조를 두려워 한 나머지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낸 것”이라면서 “그러나 태조는 옛 고조선과 고구려 땅을 되찾으려고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두둔해주었답니다.
2008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만부교(낙타교) 터를 발굴하면서 그린 상상도. 현재 개성 동현동에 존재했던 다리이다. |‘북한 외국문 출판사의 <고려도읍 개성의 민족유산>, 2018’에서
왜냐면 당시 거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멸망한(926년) 발해의 유민이 10만 여 명이나 고려땅으로 밀려들어오던 시기였습니다. 이 중에는 발해 세자인 대광현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익은 태조가 ‘고려로! 고려로!’를 외치며 밀려들어온 발해 세력을 의식해서 거란 사신단을 모질게 대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익은 “만약 거란이라면 치를 떠는 발해 유민들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거란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태조가 ‘만부교 사건’ 1년 만에 서거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게다가 중국측 자료인 <자치통감>은 “고려가 다른 나라 승려(호승)을 파견하여 (5대10국 중 하나인) 후진의 고조(석경당·재위 936~942)에게 다른 나라 승려를 통해 비밀리에 거란 협공을 제의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고려와 발해가 혼인한 사이인데 발해 임금이 거란에 붙잡혔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만부교 사건을 기록한 <고려사>. 942년 거란이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왔는데, 사신 30명은 섬에 유배를 보내고, 낙타 50필은 만부교 밑에 묶어 굶겨 죽였다는 내용이다.
■대가가 너무 컸던 낙타 굶겨죽이기
그러나 개운치는 않습니다. 태조가 발해 멸망(926년) 후 16년이나 지난 때(942년)에 발해 운운 하면서 신흥강국인 거란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 왜냐면 만부교 사건의 대가는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이후 3차례(993·1010·1018년)에 걸쳐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습니다. 물론 서희의 ‘세치 혀’ 외교로 강동 6주를 획득하고(1차),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3차)으로 거란(요)의 침략을 마침내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만약 태조가 거란 사신들을 후히 대접하고 낙타 50마리를 받았다면 치르지 않아도 될 희생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제기한 문제가 아닙니다. 고려말의 대학자인 이제현(1287~1367)도 태조의 처사에 의문점을 제기했습니다.
“고려와 발해와 혼인을 맺었다는 기록은 국사에 보이지 않는다. 또 신흥국인 ‘후진’은 당시로는 별볼일 없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와 손잡고 발해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창 강성해지는 거란을 칠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남의 나라 승려를 보내서?”(<역옹패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10조를 남기면서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며, ‘강하고 악한 이웃(거란)을 늘 경계하라’로 누누이 강조했다.
이제현은 한마디로 중국측 기록은 <자치통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태조 왕건은 쓸데없는 외교분쟁을 일으켰을까요. 만부교 사건 후 360여 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1308~1313)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이제현에게 물어봅니다.
“아니 태조대왕께서는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키우는게 백성들에게 무슨 피해가 간다고 굶겨죽이셨을까. 나라 임금이 그 정도 낙타를 키우지 못했을까.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싫으면 돌려보냈으면 될 일이 아니었을까.”
합리적인 의문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현의 대답은 알쏭달쏭합니다.
“글쎄요. 원래 나라를 건국한 창업주의 소견은 워낙 원대하고 깊어서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태조께서 오랑캐(거란)의 간사한 계책을 꺾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제현은 “태조대왕의 조치에는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것”이라면서 “전하(충선왕)께서 묵묵히 생각하시고 힘써 행하셔서 태조대왕의 숨은 뜻을 알아내셔야 한다”고 공을 임금에게 돌립니다. “그것이 임금이 할 일이며, 어리석은 저는 잘 모릅니다”(<고려사>)라고요.
고려말 학자 이제현 초상화(국보 110호). 이제현도 태조의 만부교 사건에 몇가지 의문점을 제기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아무도 태조 왕건이 뜻을 모릅니다.”
안정복(1712~1279)의 <동사강목>은 이 대목에서 최부(1454~1504)의 언급을 인용했는데요. 역시 태조 왕건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평했습니다.
즉 “강성해진 거란이 사신을 보내옴으로써 동맹을 맺는 것이 나라를 보존하는 정책일텐데 태조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거란이 발해에게 신의를 잃은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들과 끊기를 원수같이 했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또 “이 때문에 (3차례나 거란의 침공을 받아) 현종(1009~1031) 때에 (전라도 나주까지) 피란길에 오르는 위태로움을 겪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도 이 만부교 사건을 이으킨 태조의 마음을 100% 읽는 이들은 없겠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재현의 궁색한 답변이 오히려 후대 임금을 다그치는데 아주 좋은 인용사례가 된다는 거죠. 이제현은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태조 왕건의 뜻이 ‘거란의 간계를 물리치려 한 것인지,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면서 태조대왕의 숨은 뜻을 알아내 정답을 찾는 것이 바로 후대 임금들의 몫이라고 슬쩍 공을 돌린 겁니다.
■애완동물 키우기에 인용된 만부교 사건
바로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진실과 상관없이 배우는 자의 몫이라는 거죠. 단적인 예가 있는데요. 1486년(성종 17년) 조선조 성종(1469~1494) 때의 일입니다.
반려동물을 유달리 좋아했던 성종 임금이 “중국에서 낙타를 구입해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흑마포 60필을 낙타 구입 비용으로 책정합니다. 그러자 대사헌 이경동(1438~1494)이 바로 만부교 사건을 인용하며 극력 반대에 나섭니다.
“고려 말 이제현은 ‘태조(왕건)가 거란의 간계를 꺾고, 후세의 사치하는 마음을 막으려고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 했습니다. 전하(성종)께서는 낙타 한마리 때문에 성스러운 인품에 오점을 남기시겠습니까.”
이경동은 왜 극렬하게 반대했을까요. 흑마포는 중국 황제들까지 보물로 여겼던 검은 빛깔의 삼베를 뜻합니다. 그랬으니 당연히 비쌌겠지요.
안정복의 <동사강목>. 만부교 사건이 발생하고 360여 년이 지났을 때 고려 충선왕이 “낙타 50필을 굶겨죽인 태조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이제현에게 묻는다. 그러나 이제현 역시 “태조의 깊은 뜻을 알기 힘들마”면서 “전하(충선왕)께서 그 숨은 뜻을 알아내시라”고 공을 넘긴다.
이경동은 “흑마포 60필은 콩으로 치면 6000두, 벼로 치면 400석”이라면서 “쓸데없는 짐승을 사려고 그렇게 많은 비용을 쓴다는 게 말이 되냐”(<성종실록>)고 조목조목 따집니다. 이경동은 이 대목에서 백성을 떠올리는데요. “해마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궁핍한데 이 무슨 짓이냐”고 따집니다. 아니 성종 임금이라면 세종대왕 버금가는 성군인데 이렇게 지적 당하고 있습니다. 성종은 결국 꼬리를 내리는데요.
“그대의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애초에 내가 낙타를 귀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알았다. 그만두마.”
이경동이라는 신하에게 만부교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 역사적 사실을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가한 고려말 학자 이제현의 추정 중에 ‘사치’ 부분에 방점을 찍어 성종 임금의 마음을 돌리는 데 인용한 겁니다.
사실 왕조시대에는 군주가 천하를 제멋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반려 동물 한 마리 키우는 것도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 중 하나인 <서경>은 “군주라면 개와 말 같은 동물은 기르지 말아야 한다. 작은 행위를 조심하지 않으면 큰 덕에 누를 끼친다”(<서경> ‘여오·旅獒’)고 했습니다. 군주가 애완동물, 특히 토종이 아닌 외국산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그때까지 이룬 업적을 다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죠.
태조 왕건이 일으킨 만부교사건은 고려사 최고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동사강목>은 ‘최부’의 논평을 인용해서 “태조 왕건의 생각이 짧았다”면서 “그 때문에 나라가 위태로워졌다”고 비판했다,
■만부교 사건의 이유는 ‘메르스 때문?’
예전에 메르스 사태가 일어났을 때 온라인상에서 우스갯소리가 나돌았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이 보낸 낙타를 왜 굶겨죽였을까’를 묻는 역사문제에 어느 학생이 ‘메르스 때문’이라 답했다는 겁니다. 사실 지금도 만부교 사건의 진실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메르스 때문’이라는 답안도 전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태조 왕건이 왜 거란이 보내준 낙타를 만부교 밑에 묶어놓고 굶겨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성호 이익의 해석이 가장 그럴 듯하다고 여기는데요. 그러나 해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교훈 삼는 지는 역사를 배우는 자의 몫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현이나 이경동처럼 말입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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