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226년 전인 1792년(정조 16년) 4월 24일 정조가 규장각 관리들에게 시험문제 하나를 낸다.
“사흘 뒤 묘시(卯時·오전 5~7시)까지 <성시전도>를 보고 시(詩)를 지어 바쳐라.”
한양의 저잣거리 풍물을 그린 대형 두루마리(병풍), 즉 <성시전도(成市全圖)>의 완성기념으로 시(詩) 한 편 씩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규장각 관리들에게는 엄청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끄적끄적 몇자 안되는 시를 완성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 200구, 1400자가 넘는 장편시를 제출하라”는 지엄한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조가 어영부영한 군주인가, 본인이 직접 답안지를 체크하고 등수를 일일이 매긴 다음 시험지에 촌평까지 해주었다,
■"제 점수는요?"
“음, 신광하는 ‘소리가 있는 그림(有聲畵)’이고, 박제가는 ‘말할 줄 아는 그림(解語畵)’이다. 이디보자. 이만수는 아름답고(가)’, 윤필병은 ‘넉넉하며(贍)’, 이덕무는 ‘고아하고(雅)’, 유득공은 ‘모두가 그림(都是畵)’이로구나.”
신하들이 ‘제 점수는 요?’하고 궁금하겨 여겼을 것이다.
“그래. 1등은 (병조정랑) 신광하다. 2등은 (검서관) 박제가다.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이고, 4등은 승지 윤필병, 5등은 겸검서관 이덕무·유득공이다.”
특히 정조의 어평을 받은 6명 중에 신광하·박제가·이만수·이덕무·유득공 등의 시가 전해지고, 상을 받지 못한 서유구의 시도 남아있다.
<성시전도>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태평성시도>. 한양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렇다면 규장각 관리들은 한양 저잣거리 풍경, 즉 백성들의 일상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을까. 지엄
한 임금이 낸 시험 답안지에 곧이곧대로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독설가로 알려진 초정 박제가가 제출한 답안지의 시를 봐도 약간은 석죽은 감이 있다.
“놀고 먹는 백성 없이 집집마다 다 부자요, 저울 눈금 속이지 않아 풍속 모두 아름답다.”
아니 박제가가 누구란 말인가. “한양 안에 똥과 오줌이 넘쳐나고 냇가의 석축에 인분이 가득차 더러운 냄새가 진동한다”(<북학의>)고 독설을 퍼분 이가 아닌가.
그렇지만 임금의 면전에서 한양 저잣거리를 두고 ‘똥!덩!어!리!’라고 대놓고 디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독설가 박제가가 표현한 한양거리
그러나 박제가는 역시 박제가다웠다. 임금에게 제출한 다른 이들의 시가 대부분 정제되고 고답적인 언어로 한양의 풍경을 묘사했지만 박제가는 되도록 한양거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물가주막엔 술지게미 산더미네.~ 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깔깔 거리고~개백정이 옷 갈아 입으면 사람들은 몰라뵈도, 개는 쫓아가 짖어대고 성을 내며 노려본다.” 특히 시의 반 이상을 시장과 거리의 풍물을 표현하는데 할애했다.
“배우들 옷차림이 해괴하고 망측하다. 동방의 장대타기는 천하에 없는 거라. 줄타기와 공중제비하며 거지처럼 매달렸다.…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해 사람이 시키는대로 절도 하고 꿇어 앉기도 하네.”
마치 200여 년 전 한양의 시장에서 벌인 광대와 사당패의 공연 한 편을 그대로 보는 듯 하다.
■이빨 사이로 침 뱉어낸다
“아전배들은 허리로 인사하고, 시정잡배들은 이빨 사이로 침을 뱉어낸다.(吏胥之拜拜以腰 市井之唾唾以齒)”
‘침 좀 뱉고 껌 좀 씹는’ 동네 양아치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박제가가 언급한 시정잡배의 인사법을 두고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林下筆記)>는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날 이유원과 필담을 나누던 중국인이 갑자기 박제가의 ‘문제의 시’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는 것이다.
“이빨 사이로 침 뱉는게 조선인의 인사법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순간 당황한 이유원은 약간 딴청을 피우며 “글쎄요. 내가 이 시를 처음 봐놔서….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조선 양아치들의 ‘침뱉기 신공’이 인사법이라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화를 내면서 박제가의 시를 중국에 소개한 자를 색출해서 처벌했다.
박제가도 자신의 <성시전도시>를 두고 “이언(邇言), 즉 천박하고 깊숙한 맛이 없는 시일 수밖에 없다”고 자인했다.
그러나 당대사람들은 박제가의 표현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단적인 예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박제가의 시는 당대의 실정을 잘 형용했다”고 칭찬했다.
박제가 뿐 아니라 신택권·이학규·신관호 등도 당대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언어로 한양의 저잣거리를 표현했다.
“바닥에 쌓인 생선에선 비린내 살살 풍겨오고, 사람보곤 냅다 달리는 놈은 돼지라네. ~누더기 입은 사내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어린 계집종은 정수리에 동이 이고~쏟아지려 하자 머리를 치켜든다.”(이학규)
“가련타! 광통교 색주가는 별자(別子) 쓴 등을 걸고 탁자를 늘어놓았네. 가련타! 구리개 약파는 늙은이는 망건 쓰고 어슬렁 주렴 안에 머무네.”(신택권)
두 사람은 종로~청계천~을지로를 무대로 살아간 시장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했다.
■골초가 된 조선
이중 신택권의 시를 보면 한양거리를 강타한 담배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위로 정승판서부터 아래로 가마꾼까지, 안으로 규방서부터 외방고을의 기생까지 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담배를) 즐기지 않겠느냐”고 했다. 따지고보면 정조 임금 자체가 지독한 골초였으니 누굴 탓하랴. 실제로 정조는 과거시험의 시제로 ‘남령포(담배)’를 내걸면서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담배만한 것이 없다”고 담배예찬론을 편 것으로 유명하다.(<정조실록> 1796년 11월18일)
당대 부동산거래의 실상과 부동산 가격 및 인기지역 동향도 알 수 있다.
“집주름(家쾌·부동산 중개업자)이 천 냥을 매매하고 백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동쪽 집, 서쪽 집’으로 이사를 유도하고 중개수수료를 챙기는 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또 집값 1000냥 중에 100냥을 받아 챙긴다면 부동산 중개료가 매매가의 10분의 1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남촌과 북촌에는 이름난 집들이 몰려있으니 부귀한 자는 성세(聲勢)에 기대야 한다”는 것과
“예전엔 조용하고 외진 곳을 좋아했으나 지금은 시끄럽고 낮은 데를 탐낸다”는 표현도 있다.
지역에 따라 집의 가치가 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시대에 따라 부촌의 조건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조용하고 외진 곳을 선호했던 양반들이 낮고 번화한 동네를 찾아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했던 것 같다.
“외진 골목에 팔짱끼고 살자니 생계가 어려워/빈촌에 둥지 틀어 시장 가까이 산다”고 했으니 말이다.
■조선판 힙합전사들의 인사법
의리’를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한량들의 모습도 보인다.
“아직도 협객을 사모하는 풍모가 남아 말 달리고 투계(鬪鷄) 하면서 한 자나 되는 칼을 찼네. 문득 의기투합하는 자를 만나면 술집과 찻집에서 손바닥을 부딪히네.”
의리있는 협객을 그리며 의기투합한 한양 한량들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한량들끼리 만날 때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장면은 마치 ‘힙합 가수들’의 독특한 인사법 같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보면 박제가를 비롯한 이학규·신택권 등의 시는 신문의 르포르타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조 임금이 다스리던 18세기말 한양의 저잣거리를 취재해서 아주 간결한 필치로 다듬은 ‘내러티브식 기사’가 아닐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글은 안대회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와 18세기 서울의 풍경’, <고전연구> 제35권 35호, 한국고전문학회, 2009와 역시 안대회의 ‘성시전도시 9종’, <문헌과 해석> 봄호, 문헌과 해석사, 2009 등을 참고했습니다. 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책문, 2014에서 발췌하여 팟캐스트용으로 재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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