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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조선인은 일본의 스파이다"?

 “자본주의 적들에게 포위돼있는 소련에는 외국의 스파이들로 가득차 있다.”
 1937년 3월3일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심상찮은 연설을 했다. 그러자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기다렸다는 듯 무시무시한 기사들을 쏟아낸다.  
 ‘일본의 간첩망’(3월16일), ‘소비에트 원동에서 스파이 행위’(4월23일)’ 등등…. 일본이 밀파한 조선 스파이들이 소련 내의 군대집결 및 이동 등 각종 정보들을 수집해서 빼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왜 일본을 경계한다면서 조선인들을 스파이로 지목했을까. 그것이 바로 망국의 설움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체르냐치노 마을유적 옆을 흐르는 라즈돌라야강(솔빈강). 이 마을에는 옥저-발해-고려인들이 시차를 두고 터전을 잡고 살았음을 알려주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개를 든 황화론
 조선인들이 좁은 경지와 지배층의 수탈로 살기 어려워진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연해주로 발길을 돌린 것은 19세기 중후반이었다.
 러시아의 탐험가 N.M 프르제발스키가 1867~1869년 연해주를 방문하고 남긴 여행기(<우수리 지방 여행>)는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가우리(Kauli)라 했다”고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주류성·2013)의 저자 김호준은 “조선 사람들이 연해주가 고구려의 땅이라는 점을 과시하려고 스스로 고려인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연해주에 정착해있던 ‘고려인’들은 을사늑약(1905년)-한일합병(1910년)으로 국권을 잃자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린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가 “연해주 조선인들도 이제 일본의 신민이 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러·일전쟁 패전 이후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노렸던 러시아 차르정부는 이범윤·유인석·이상설 등 42명의 항일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한다. 그 중 수괴로 지목된 이범윤 등 8명은 이르쿠츠크로 유배보낸다.
 연해주 고려인들의 수난이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차르 정부나 그 뒤를 이은 소비에트 정권이나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예컨대 1905년 연흑룡강 지방 총독으로 부임한 운테르베르게르는 ‘황화론(黃禍論)’의 신봉자였다. 만약 러시아가 중국이나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경우 같은 황인종인 조선인의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의 이주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자 연해주를 비롯한 원동지역의 고려인 수는 급증했다. 1932년엔 19만 6000명에 이르렀다.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여권과 비자 없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다가 검거되는 조선인이 매주 300명에 달할 정도였다. ‘탈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행렬이었던 것이다.  

소련당국의 강제이주 명령서. 소련은 조선인들을 일제의 스파이로 분류, 강제이주를 명령했다.|주류성출판사

■강제이주의 신호탄
 급증하는 이주행렬에 불안해진 소비에트 정부가 스탈린의 경고와 함께 대대적인 탄압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고려인 강제이주의 신호탄이었다.
 급기야 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극비 결의안을 채택한다. 결의안의 제목은 ‘원동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고려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대하여’이었으며, 목적은 “원동지방에서 일본 첩자의 침투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고려인 사회를 일본스파이의 온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격리시키자는 의미였다. ‘작업은 38년 1월1일까지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또 있었다. ‘고려인들 사이에서 발생 가능한 폭력과 무질서를 제압할 수 있는 조치들을 강구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우선 고려인 출신 지도급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다. 1935~37년 사이 2500여 명의 고려인이 구속됐고, 상당수가 날조된 약식재판을 통해 ‘반역죄’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의 레닌’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김 아파나시는 1938년 5월25일 밤 10시15분에 시작되어 단 15분만에 끝났다. 그날 밤 처형딘 그의 죄목은 ‘일본의 밀정으로 반혁명활동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고려문학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처음 도입한 작가 조명희도 이듬해 5월 처형됐다. 취조도 재판도 없었다.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소련정부의 다음 조치는 강제이주였다.
 강제이주 2~3일전에 급작스럽게 통보받는 일도 있었다. 부동산은 그냥 두고 가야했다. 1개월 여행에 필요한 식량과 옷가지, 이부자리 만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단 1명의 이탈자도 허용하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퇴원시켜 열차에 태웠고, 남편이 출장간 사이 혼자 열차에 타야 했던 여인들도 있었다. 국경지역 지휘관은 강제제대 후 ‘간첩죄’로 체포됐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경로. 무려 18만명이나 되는 고려인들이 시베리아 동토를 건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했다.

■악몽의 그 날 밤
 1937년 9월9일 밤, ‘강제수집’된 이주민을 태운 열차가 블라디보스특을 떠났다. 열차는 객차, 화물차, 가축운반차 등을 엮어 50량으로 편성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차를 4칸으로 나눈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화물차엔 유리창 하나 없었다. 널판지로 막은 문만 있었다. 외부에서는 대체 무슨 열차인지 몰랐다. 고려인의 이주는 그렇게 비밀로 위장됐다.
 저녁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기차 안은 꽁꽁 얼어붙었다. 수송열차는 한번 달리면 며칠동안 서지 않았다. 그러다 한 곳에 2~3시간이나 2~3일 정차할 때는 가족들이 객차마다 뒤엉켜 이산가족이 다수 생겼다.
 출산소동이 벌어지고, 식량약탈과 겁탈이 자행되고…. 심지어는 ‘배신자’를 처단하는 인민재판이 열리고…. 동승한 비밀경찰에 의해 불순분자로 체포된 이들 가운데 10여 명은 행방불명됐다. 수송 도중 전염병이 발생해 상당수가 사망했고, 주인없는 시신은 밤에 열차밖으로 던져졌다. 이렇게 18만명에 달하는 고려인이 1937년 11월까지 추방됐다. 고려인들의 곡(哭)소리가 시베리아 동토를 뒤덮었다. 

 체르냐치노 마을에서 확인된 옥저 시대 쪽구들. 이 문화층 바로 위에서 발해의 온돌도 나왔다. 또 이 마을에서는 1937년까지 터전을 잡고 살았던 고려인들의 흔적도 남아있었다.|정석배 교수 제공

■35~38년생이 드문 이유
 장장 6000㎞를 달려 강제이주된 곳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반사막지대와 갈대밭 지역이었다.
 모기 떼와 벌레 떼만 우굴거리는 황량한 지대…. 밤에는 진창이 얼어붙어 뼛속까지 바람이 들었고…. 갈대가 울고, 이리떼가 울던 곳에 토굴을 짓고, 흙벽돌에 구들을 놓거나 갈대로 두툼한 자리를 만들어 바닥으로 삼았다. 모기에 물려 학질에 걸리고, 사막의 독거미와 독사에 시달리고…. 어린이들은 늪의 물을 마시고 피똥을 싸다가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가운데 1935~38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드문 이유였다. 38년 1월에는 타슈겐트 주의 세 지역에서 300명의 어린이가 홍역에 걸려 80명이 사망한 일도 있었으니….
 이주 고려인들을 둘러싼 차별대우는 극심했다. 국경지역으로 이주가 금지됐고, 정착지의 고려인 수는 농가 1000가구 이하로 제한됐다. 전쟁에는 나가지도 못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등 대도시 대학에서는 공부할 권리도 없었다. 공업대와 군사·항공계통 대학에서는 입학원서도 받지 않았다. 고려어(조선어)는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됐다. 그 사이 지식인들을 겨냥한 탄압과 처형은 계속됐다.
 이 즈음 발표된 시(詩)를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너를 두고 떠나느냐?~북두는 말없이 지평선을 떨어지며/마음은 너를 찾아 달음박질/아, 아직도 동녘은 껌껌나라/어서 동이 트고 날이 밝아야 우리는….”
 1838년 시인 강태수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사범대 벽보신문에 발표한 시 ‘밭갈던 아씨에게’의 내용이다. 시인은 고향인 연해주를 그리워한 시를 지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21년 동안이나 북극원시림에서 유배형을 당했다. 
 “등굽자 아매들은 삭다 고레 아매들이오. 느르 이르 마이 해서 등이 고부러졌소.”   
 할머니들이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모두 등이 굽었다는 얘기다. 김호준이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 한마디가 가슴 아프다.

 

 ■백제·고구려 유민들의 고투
 망국의 설움…. 그리고 쫓겨난 백성들의 피눈물나는 고초…. 소름 끼치도록 반복된 역사의 수레바퀴이니까….
 “660년,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와 왕자 및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만2807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당나라가 백제 멸망 후 의자왕을 비롯, 백제 유민들을 대대적으로 끌고갔다는 기록이다. <구당서> ‘본기’의 기록을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소정방이 의자왕 등을 낙양성 앞에서 황제(당 고종)에게 바쳤고, 고종은 의자왕의 죄를 꾸짖고 사면시켰다.”
 역사에 기록된 첫번째 강제이주였던 것이다. 백제 뿐인가. 고구려 멸망(668년) 뒤 부흥운동이 거세지자 당나라는 고구려 백성들을 대거 오지로 내쫓는다.
 “669년 4월,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인 3만8200호를 양자강과 회하(淮河)의 남쪽지방과 산남(山南)·경서(京西) 등의 광할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자치통감>)   
 3만8200호라. 1호가 5명으로 구성됐다면 무려 20만명에 이르는 민족대이동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구려 부흥운동은 갈수록 심해졌다. 당나라는 고구려 최후의 왕인 보장왕을 요동(遼東) 도독과 조선왕의 작위를 주어 파견한다.(677년 3월) 고구려 유민들을 다독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보장왕이 요동에 도착하자 마자 몰래 말갈과 연락을 취하였다.
 “당나라는 보장왕을 불러들어 공주로 이주시켰다. 고구려 유민 가운데 일부를 하남·농우의 여러 주로 분산시켰다. 일부 무리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가 살았다.”(<자치통감>)
 보장왕이 유배당한 ‘공주’는 요즘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서도 서남으로 50여㎞ 떨어진 오지이다. 나머지 백성들을 요동·요서(遼西)에서 수 천㎞ 떨어진 서쪽으로, 남쪽으로 강제분산 이주시킨 것이다.

 

 ■60만명의 강제이주된 발해
 발해는 또 어찌됐는가.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발해가 926년 속절없이 멸망하고 만다.
 거란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발해를 멸한 요(거란)는 발해의 고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운다. 그러면서 요나라는 발해인들을 거란의 본거지인 내몽골과 요서 지방으로 강제이주시킨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년 뒤인 928년 요 태종 아율덕왕은 동단국을 요양(遼陽)으로 천도한다. 그 이유는 “발해땅이 오지여서 통치하기 힘들었다”(<요사>)는 것이었다.
 <요사>는 “발해멸망 직후와 동단국의 천도 이후 강제이주 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 호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1호당 가족수가 5명이라면 47만~50만명이 강제이주 당했다는 뜻이다. 이 뿐인가. 발해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을 비롯해 고려로 망명한 발해 유민들도 10만명으로 집계된다, 결국 발해멸망으로 유민 60만명이 고향을 떠났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것은 요나라가 발해인을 강제 이주시킨 뒤 많은 마을(현)을 폐쇄했다는 것이다. 이를 ‘폐현(廢縣)’이라 한다. <요사>를 보면 거란이 폐쇄시킨 마을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유역과 동해안의 읍락 및 연해주 지역이다. 1937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를 능가하는 사상 유래 없는 엑소더스이자, 민족대이동이었던 것이다.
 발해멸망 이후 이 광활한 땅은 사실상 공지로 남아 있었다. 17세기 초 여진의 후예인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한 뒤 대륙을 석권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중원으로 이동하면서 연해주를 선조의 발상지라면서 신성시, 금단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봉금령(封禁令)’을 내린 것이다. 이 땅의 새로운 지배자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58년 아이훈(愛琿) 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아무르)을 점령하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확보했다. 700년 동안 금단의 땅에 다시 끈질긴 조선인들이 속속 터전을 잡고 살아가기 시작한 때였다.

 

 ■옥저·발해·고려인의 흔적이 켜켜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연해주에 자리잡고 있는 체르냐치노 마을 유적에는 이 파란만장한 ‘고려인’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해주는 흔적이 남아있다.
 2007년 마을유적을 발굴 중이던 한국전통문화학교 조사팀(정석배 교수)이 옥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와 발해(698~926)의 온돌(쪽구들)을 나란히 발견한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주거지 1기의 밑바닥에서 옥저인들이 만든 온돌을 확인했고, 바로 1m 위에 발해 온돌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옥저인들이 이 집에 살다가 떠났고, 떠난 지 400년 뒤에 다시 발해인들이 다시 똑같은 집에 둥지를 틀었다는 뜻이 아닌가. 발해인들은 옥저 사람들이 썼던 것과 같은 ㄱ자 모양의 온돌(쪽구들)을 얹고 불을 땠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뿐이 아니다. 발해멸망 후 700년이 지난 19세기 이후 다시 이 마을에 정착했다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고려인들의 주거지와 온돌이 확인된 것이다. 담뱃대와 비녀 같은 고려인들의 유물들도 보였다. 이곳은 고려인 집단촌이 있었던 시넬리코프 마을과 가깝고, 라즈돌라야 강(솔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 터다. 백두산과도 300㎞ 정도 떨어져 있다. 마을 주변에는 지금도 백두산 화산폭발의 증거인 현무암이 즐비하고, 이 현무암을 주춧돌로 삼아 지은 발해시대 절터와 성터가 남아있다. 
 정석배 교수의 해석은 당연했다.
 “옥저인, 발해인, 고려인 모두 농업을 주업을 삼은 민족이니까…. 농사에 적합한 땅을 찾는 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을 겁니다.”
 체르냐치노 마을은 옥저-발해-고려인의 2300년 역사가 ‘고고학적’으로 농축된 지점이다. 그러니까 기원전 3세기부터 불과 70여 년 전까지…. 그야말로 ‘징한’ 역사다. 망국의 시대마다 강제로 터전을 떠나야 했지만, 끝내는 되돌아 오고야 말았던…. 아무리 봐도 끈질긴 생명력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