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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패전의 병자호란, 그러나 '대첩'도 있었다.

 “우리 임금님, 우리 임금님,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
 1637년 1월30일은 우리 역사상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 중의 하나이다. 병자호란 패배로 인조 임금이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스런 날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서 나온 인조는 청나라 태종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 즉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해야 했다. 말이 ‘조아린다’는 것이지 실은 머리를 찧어 피가 날 정도로 용서를 비는 절차였다. 이마저도 청나라가 봐준 것이었다. 원래 청나라는 인조의 두 손을 묶고 구슬을 입에 문채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 굴욕적인 ‘항복의 예’는 진나라 3세황제인 자영이 한나라 유방에게 항복하면서 노끈을 목에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탄 것을 본 딴 것이다. 한마디로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청태종은 “몸을 결박하고 관을 끌고 나오는 등의 절차는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은혜’를 입어 삼배구고두로만 그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가 벌어진 김화 생창리. 유림군은 백수봉에, 홍명구는 평지에 지을 쳤다. 청나라군은 홍명구군을 전멸시킨 뒤 유림군을 공격했지만 대파당한다.

■1637년 1월30일 그 날
 인조는 임금의 상징인 용포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입은 뒤 백마를 타고 산성의 서문으로 무릎을 꿇었다.
 신하가 된 주제에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은 주제에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며, 무조건 항복을 했으니 백마를 타고 나와야 한다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항복의식을 벌이면서도 그야말로 청사에 길이 남을 치욕의 순간이 이어진다. 인조가 술잔을 돌린 뒤 술상을 물리려 했는데, 청나라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개 두마리를 끌고 들어왔다. 그러자 청태종은 상에 차려진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 주었다.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었다.
 지루한 항복의식이 끝난 뒤 인조 일행이 소파진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려 했다. 그런데 진을 지키던 병사들은 모두 죽고, 배만 두 척 남아있었다. 이 모습을 전한 <인조실록>을 보자.
 “인조가 배를 타려 하자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인조 임금의 어의를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용골대(청나라 장수)가 이끄는 청나라 군병들이 인조를 호위했다. 사로잡힌 백성들이 그런 임금을 보고 울부짖으며 말했다. 임금님! 임금님! 어찌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그렇다. 한심한 임금과 신하, 그리고 그런 지도자를 둔 불쌍한 백성들…. 병자호란은 이처럼 단 한 순간도 기억하기 싫은 오욕의 역사로 남아있다.

 

 ■청나라 팔기군의 속전속결전
 하지만 이같은 수모의 역사 속에서 절대 무시해서는 안될 승리의 순간도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강원 김화에서 벌어진 백전전투이다. 연구자들은 당대 세계최강의 청나라 팔기군을 상대로 거둔 이 전투를 백전대첩이라 일컫는다.
 백전대첩의 상황을 더듬어보자.
 1636년(병자년) 12월8일 청나라 13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넌다. 정묘호란(1627년)의 참화가 가시기도 전이었다.
 주력군은 당시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에서 맹위를 떨친 팔기군이었다. 조선은 당시 고조선·고구려의 전통을 잇는 산성방어전략을 썼다. 군사력이 부족했던 조선으로서는 병력과 주민들을 보호하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도모하는 산성 위주의 전술이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 산성전술은 정묘호란 때 약간의 효과를 보았다.
 당시 후금이 평안도의 산성을 공략하느라 어느 정도 애를 먹었다. 하지만 청나라군은 이번에는 달랐다. 속전속결 전략을 폈다. 6000명의 선봉부대는 산성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곧바로 한양을 직공했다. 대신 일부 병력들은 조선병력을 산성에 묶어두는 전략을 폈다. 대로변에서 30~40리 떨어진 산성은 청군의 한양직공 전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청의 선봉은 압록강 도하 불과 6일 만에 한양 도성에 근접했다.
 서울~신의주 간 거리가 500㎞ 쯤 되니까 하루 80㎞ 이상씩 말을 달려온 것이다. 이윽고 12월29일 청나라 본진이 남한산성에 도착,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인조는 할 수 없이 전국 8도에 근왕병을 요청했다. 즉 화급한 지경에 빠진 임금을 지키는 병력을 급히 모집한 것이다.  

치욕의 역사가 담긴 삼전도비. 인조는 청태종의 무릎앞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치러야 했다.

■무관과 문관의 차이
 당시 평안감사인 홍명구(1596~1637년)와 평안병사인 유림(1581~1643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홍명구와 유림은 조정의 방침에 따라 자모산성(홍명구)과 안주성(유림)에서 청나라 병사들을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청군이 산성을 피해 한양직공을 선택했기 때문에 싸울 기회도 없었다, 홍명구군 2000명과 유림군 3000명 등 5000명의 근왕군이 평양에 집결했다. 평안감사(도지사)인 홍명구는 42살의 문신 출신이었고, 57살의 유림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신이었다. 당연히 의견충돌을 빚었다.
 그러나 홍명구군과 유림군은 우여곡절 끝에 평양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직로를 피해, 삼등-수안-평강을 거쳐 김화 읍내로 집결한다. 김화 역시 요충지였다. 함경도와 평안도, 강원도 쪽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의 인후(목구멍·咽喉)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청군의 우익군 6000여 명도 철원-연천-포천 일대에 진출, 강원도 방면과 수도권의 통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결전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두 지휘관은 끊없는 설전을 벌였다. 무장인 유림은 고지(성재산)에 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문신인 홍명구는 평지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고 맞섰다.     
 “청군에 비해 중과부적이니 성재산(해발 463)에 있는 산성(성산성)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유림)
 “임금이 난리 중에 있는데…. 마땅히 죽음으로 맞서야 합니다. 또 우리 군사가 여기에 있으니 청나라군의 전력이 흩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이 남한산성으로 내려가지 못합니다.”(홍명구)
 유림은 “적군이 많고 우리 병력이 적으니 반드시 두 군대를 합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홍명구는 끝내 거절하고, 남쪽 개활지인 탑곡에 주둔했다.
 유림이 “그곳은 평지라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우니 높은 곳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홍명구는 고개를 저었다. 유림은 홍명구 군과 달리 백전(栢田)의 언덕에 진을 쳤다.

 

 ■문관의 명분
 홍명구가 아무리 문신이었다지만, 왜 패배가 뻔한 평지를 고집했을까. 홍명구의 말 가운데 “우리 군사가 평지에 있어야 청군이 흩어진다”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앞서 밝혔듯 청태종은 조선의 산성방어전략을 무시하고 한양도성을 향해 물밀듯이 직공했다. 만약 김화에서도 조선군 병력이 산성에 올라간다면? 홍명구는 이 경우 청나라군이 산성공격을 하지 않고 남한산성으로 돌진하거나 다른 작전을 펼칠까 두려워 했을 것이다. 또 하나 홍명구에게는 1627년 정묘호란 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당시 홍명구는 평안감사였던 윤훤의 종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금군이 쏟아져 들어와 의주-안주를 휩쓸자 평안감사 윤훤은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윤훤은 참수된 뒤 본보기용으로 효수됐다. 윤훤의 참모였던 홍명구 역시 파직됐다.
 홍명구로서는 이번(병자호란)에 다시 평양성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들어 죽음을 각오한 전면전을 택했을 것이다.

 

 ■장렬한 산화
 전투는 1637년 1월28일 아침 시작됐다. 당시 관노였던 유계홍의 생생한 목격담이다.
 “적의 한 부대는 양진(홍명구군과 유림군의 사이) 사이를 횡단하고 한 부대는 홍명구군의 앞을 돌진했습니다. 흰 칼날이 번쩍거리며 잠깐 동안 접전을 벌어진 끝에 아군은 크게 패했습니다. 적은 아군을 뒤쫓아가면서 창·칼로 마구 찍어댔습니다. 한참만에 싸움은 끝났습니다.”(송시열의 ‘기김화전장사실’)
 그러니까 청군은 우선 홍명구군과 유림군의 벌어진 틈을 갈랐다, 그런 뒤 평지의 홍명구군을 맹공략, 조선군을 창과 칼로 마구 도륙했다. 홍명구는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
 “공(홍명구)이 노모에게 이별을 고하는 글 한 줄을 썼다, 몸에 화살 3대를 맞자 스스로 뽑아 활을 당겨 적에게 쏘니 적이 곧장 달려들었다, 홍명구 공이 맞싸우다가 결국 적의 칼에 맞았다. 따라서 죽는 자들이 많았다.”(박태보의 <정재집> ‘기김화백전지전·記金化栢田之戰’에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을 대패시킨 철원 김화의 백전(측백나무 숲).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이다.

 ■청태종의 매부를 저격하다
 홍명구군을 대파한 청나라군이 부대를 4곳으로 나누어 백전고지에 주둔하고 있던 유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곳(백전)은 이름 그대로 잣나무 숲이 빽빽한 고지였다. 조선군을 우러러 봐야 하는 청군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을 쏘아도 번번이 잣나무 숲에 걸렸고, 기병대(팔기군) 또한 힘을 쓰지 못했다.
 유림은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화살과 탄환이 별로 없다. 낭비하면 안된다. 적이 수십보 이내로 접근하면 내가 깃발을 휘두를 것이다. 그때 일제히 발사하라.”
 유림군은 적이 10보 이내에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군의 깃발에 따라 탄환과 화살을 발사하니 적의 시체가 성책에 가득 쌓였다.                 
 해가 저물 무렵, 청나라군의 총공세 때 백마를 탄 적장이 아래 위로 달리며 청군을 지휘했다. 유림 장군은 10명의 병졸을 뽑아 “저 백마 탄 장수를 쏘라”는 명을 내렸다.
 명령에 따라 병졸들이 포문을 열자 적장이 쓰러졌다. 이 때 전사한 적장은 청태종의 매부인 야빈대였다. 그랬어도 워낙 중과부적의 싸움이어서 전황은 일진일퇴였다. 지친 병졸들 가운데는 도망가는 자들도 있었다. 장군은 풍악을 울리며 병졸들을 격려했다. 마침내 날이 어두워지자 적이 후퇴했다.

 

  ■신묘한 계책
 유림 장군은 정탐병을 보내 적의 상황을 점검했다.   
 “적 진영에서 곡(哭)소리가 진동합니다. 한데 구원병들이 계속 밀려와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유림 장군은 결단을 내린다.
 “오늘 전투는 요행히 승리했지만 화살과 탄환이 이미 떨어져 더는 싸울 수 없다. 이 승세를 타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상(인조)을 구하는 편이 낫겠다.”
 유림 장군은 한 가지 신묘한 계책을 냈다. 즉 부서진 총을 거두어 탄약을 장전하고 화승줄에 매달되 그 길이를 들쭉날쭉 하게 했다. 그 다음 잣나무 숲 속에 여기저기 걸어놓고 맨 마지막 후퇴하는 병사들이 불을 질렀다. 그러니 귓전을 흔드는 총소리가 밤새도록 울려퍼졌다. 병력의 90%를 잃은 청나라군은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적들이 도착했으나 유림 군은 이미 멀리 진군한 뒤였다. 전투에서 크게 패한 청나라군은 유림의 계책에 또 한 번 농락당한 것이다. 
 “이 전투로 죽은 적병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적들이 시체를 수습해서 화장한 뒤 돌아가는데 3일이나 걸렸다. 아군의 시체 역시 벌판을 덮고 언덕에 가득 찼다. 홍명구 감사의 시신은 쌓인 시신 더미에서 발견했다. 칼의 상처가 얼굴과 왼쪽 눈썹으로 그어진 채로 사망했다.”(박태보의 <정재집>)
 전장을 빠져나온 유림군은 암정리-마현리-말고개-산양리-화천 방면으로 이동한다. 2월3일 가평에 이른 유림군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승첩 그 후…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가 1월30일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것이었다. 유림으로서는 참으로 힘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김화현령 이휘조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전쟁터 주변에 가매장 시켰다. 이휘조의 뒤를 이은 안응창은 가매장된 시신들을 김화현 북쪽 계곡에 이장했는데, 바로 전골총이다. 접전이 벌어진 전투지역 하천은 피로 물들었으며, 지금도 이 개울가를 ‘피냇개울’이라 한다. 전쟁 후 홍명구와 유림을 평가하는 시선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홍명구의 졸기(부음기사)를 보자.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안에 있는 전골총. 백전전투에서 죽은 전사자들의 뼈를 모두 묻은 곳이라 한다.

“홍명구의 죽음이 알려지자 상(인조)이 울면서 ‘내 평소 그의 사람됨을 알았다. 이렇게 나라가 결딴난 때에 단지 이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고 했다.”
 1658년(효종 9년) 조정은 순절한 홍명구에게 충렬공의 시호가 내린다. 반면 유림은 사헌부로부터 탄핵 당하는 신세가 된다.
 “유림은 김화 싸움에서 형세좋은 곳을 먼저 점거한 채 홍명구 감사와 합세하지 않아 그의 죽음을 좌시하고 구원하지 않았으니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소서.”(<인조실록> 1637년 윤4월 11일)
 이 때문인지 유림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도록 묘도문(墓道文·공적을 알리는 비문)조차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구만(1629~1711년)이 안주와 김화를 답사하고 현장기록과 주민들의 구전을 살핀 뒤 신도문을 완성했다. 그러고도 100여 년이 지난 1796년(정조 20년) 조정은 유림에게 충장공의 시호를 내린다.

 

 ■인조의 죄상 
 이것이 병자호란의 치욕에서 그나마 조선의 체면을 세워준 <백전대첩>의 전말이다.
 서술했다시피 승첩의 과정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당대 최강의 철기병으로 무장한 청나라군과 맞선 어려웠던 전투…. 게다가 문신인 평안감사 홍명구와와 무신인 평안병사 유림 간의 끊임없는 의견차이…. 이 때문에 진을 평지(홍명구)와 고지(유림)로 나눠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개인의 영달을 위한 다툼이었던가.
 싸움의 방법만 달랐지 둘 다 나라를 위한 싸움이었기에 버텨냈으며, 결국 승리로 귀결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백전대첩>은 홍명구의 희생을 토대로 한 유림의 승전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어쨌든 누란의 위기에서 목숨을 바치고(홍명구), 대첩을 이끌어낸(유림) 장수와 백성들이 있는데…. 악전고투 끝에 승첩을 거둔 뒤 남한산성에 갇힌 임금을 구하려 달려간 유림군이 받은 소식은? 임금이 그 새를 못참고 항복했다는 것이었다. 세상물정 모르고, 다쓰러져가는 명나라에 맹목적인 사대를 펼친 임금의 초라한 말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게 그런 임금을 믿고 피를 흘린 백성들은 무슨 죄인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경향신문 선임기자